< 정의의 슈킹 1 > 에서 이어집니다.
12월 27일 (목)
“J은행에서 통장을 개설한 후, 왜 분실 신고를 하셨나요?”
정 형사는 심문의 강도를 높였다.
“오전에 통장을 만들고 J은행 앞에서 장 부장에게 전달한 후 집으로 돌아갔는데, 다시 연락이 왔어요. 통장이 든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렸다고 하며 재발급을 요청해서 분실 신고를 하게 된 거죠.”
“그렇다면 어제 장 부장과 두 번 만났다는 건데, 그 시간과 장소를 말씀해 주세요.”
상일의 알리바이를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오전 11시쯤 교대역 부근의 J은행에서, 오후 2시경 사당역 근처의 J은행에서 만났습니다.”
정 형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 형사를 한쪽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의 귀에다 뭐라고 속삭이자, 조 형사는 부리나케 밖으로 나갔다.
“장 부장은 뭐하는 사람인가요?”
“사무실 직원인 것 같아요.”
상일은 지갑에서 '부장 장성식'이라고 적힌 명함을 꺼내 정 형사 앞에 내놓았다.
‘아직 속단은 일러. 현재로서는 심정일 뿐이야. 곧 결정적 단서가 나오겠지.'
정 형사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그를 쏘아보았다. 상일은 전혀 위축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나와 기싸움을 하려는 건가? 보기와는 다르게 만만치 않겠군.’
드디어 정 형사가 히든카드를 빼 들었다.
“통장을 재발급받으려면 신분증이 필요한데, 구상일 씨의 주민증은 수일금융에서 보관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재발급을 받았죠?”
“운전면허증으로 했습니다.”
“음, 그렇군요.”
정 형사는 히든카드가 뻥카가 되자, 기운이 쭉 빠졌다.
“사무실에는 몇 명이 있던가요? 장 부장에 대한 인상착의를 말해 보세요.”
“세 명이 있었는데, 장 부장은 30대 후반으로 곱슬머리에 광대뼈가 도드라진 큰 키의 마른 체격이었고, 강 실장이라는 사람은….”
상일의 인물 묘사는 매우 정확했다. 만일 다르게 말한다면, 이후 소환될 참고인들의 진술과 비교했을 때 금방 들통 날 것이 뻔하다.
그때 정 형사의 휴대폰이 울렸다. 조 형사의 전화였다.
“선배님, USB와 CCTV는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구상일 씨의 주변을 탐문 수사하고 보고드리겠습니다.”
‘이제부터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하겠군.’
“구상일 씨, 범인들과 사전에 공모하고 작업한 것이죠?”
정 형사는 그의 반응을 살피며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그러자 상일은 목소리를 높였다.
“형사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도 엄연한 피해자입니다. 수십억 원의 입출금 통장을 보여주며 실적 대출이라고 하는데, 누가 안 믿겠습니까? 이제야 저도 깜박 속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상일은 펄쩍 뛰며 분노를 표출했다.
조사가 길어질수록 그의 저항은 더욱 강해졌고, 정 형사는 점점 기세가 꺾였다. 만약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피해자 중 한 명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지금 쓸데없이 시간과 노력을 낭비하는지도 모른다. 정 형사는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이 사람은 너무나도 완벽하게 허점을 보이지 않아. 어떤 용의자라도 신문을 받으면 불안한 기색을 드러내기 마련인데, 이 녀석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야. 대단한 내공을 가진 놈이군.’
정 형사는 수세를 만회하기 위해 결정적인 질문을 던졌다. 정면 승부를 하겠다는 의지였다.
“구상일 씨, 통장을 재발급받을 때 어떻게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았나요? 수일금융 측의 말에 따르면, 통장을 만들자마자 직원이 가져갔다고 하던데요? 게다가 직원이 손으로 가리고 직접 비밀번호를 입력했다고 하니, 이 부분을 설명해 보세요.”
“그것은….”
“공범이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꽝, 정 형사는 그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공포감을 조성해 그의 심리를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는 조사 기법 중 하나였다.
순간 상일은 움찔했지만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건 재발급을 받기 전에 장 부장이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줬습니다. 그때 저는 대출이 나오려면 빨리 통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에 계좌번호나 비밀번호에는 관심이 없었죠.”
“마치 미리 설계한 듯이 프레임이 딱딱 맞게 떨어져. 이게 더 기분이 더럽단 말이야.'
조 형사에게서 다시 연락이 왔다.
“구상일은 가정적으로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인 것 같아요. 현재는 컨테이너에서 살 정도로 힘든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자녀들은 학비가 없어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놓여 있고요.”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어때?”
“착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래? 수고했어.”
“이런 사람이라면 가족을 위해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어. 돈의 유혹에 빠져서 위험한 선택을 할 가능성도 있겠지.”
그는 수일의 인성보다는 현실에 초점을 두어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구상일 씨, 범행을 자백하면 당신의 형편을 고려해 정상참작을 하죠."
정 형사는 미전향 양심수에게 귀화를 설득하듯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일은 흔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정 형사는 초조해졌다. 하지만 곧 소환될 참고인들의 진술을 확보하면 증거가 나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이 수사과에 들어왔다. 조사는 대출 손님, 돈을 인출했던 여자, 잔고증명을 의뢰한 사람, 세 가지 파트로 나뉘었다. 수사는 내부적으로 신속하게 진행되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잔고업체의 전주들이 신분 노출을 꺼려 경찰 고위층에 손을 썼기 때문이었다. 수사과는 형사들의 고함과 소환인들의 한숨, 탄식 소리가 뒤섞여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사무실을 방문한 대출 손님들은 김 형사가 맡았다.
“아저씨는 이런 식으로 3천만 원 대출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나요?”
“저는 잘 모르죠. 그 사람들이 수억 원이 입출금된 통장을 보여주며 실적을 쌓으면 은행에서 대출해 준다고 하니까 진짜인 줄 알았어요. 또 그런 경우도 있잖아요.”
손님은 속은 것이 억울한지 이를 갈았다. 김 형사는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저씨에게 대출 상담을 해 준 사람의 인상착의를 말씀해 보세요.”
“번듯하게 생긴 청년이었어요. 신장은 보통이고 예의도 바르고….”
김 형사는 더 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대출 손님들의 진술이 모두 일치해서였다.
돈을 인출한 여자들에 대한 조사는 조 형사가 담당했다.
“솔직하게 말씀하셔야 아주머니에게 유리할 겁니다. 부탁치고는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이제 와서 형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제가 잘못했네요. 하지만 그때는 비자금 세탁에 통장을 빌려주고 돈을 찾는 일이 이렇게 큰 죄라는 걸 정말 몰랐어요. 생활이 어려워서 수고비에 눈이 멀었던 것 같습니다.”
여자는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기 시작했다. 조 형사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수고비는 얼마였나요?”
“100만 원이요.”
여성들의 대답은 다양했지만, 공통점은 전부 100만 원 이하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처벌은 받아야 합니다.”
“형사님, 제가 감옥에 가면 우리 어린 아이들은 누가 돌보나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여자는 조 형사의 다리를 붙잡고 애원했다.
“감옥은 가지 않을 겁니다. 아주머니의 사정이 안타까워 불구속으로 올릴 테니 집행유예나 벌금이 나올 거예요.”
명의 대여자 9명은 그렇게 조사를 받았다.
구상일을 신문하는 정 형사가 의뢰인의 조사도 맡았다.
“통장을 개설하고 바로 재발급을 받는 것에 의심이 들지 않았나요? 그리고 본인도 모르는 계좌번호와 비밀번호를 알려주면서요.”
“말이 너무 그럴듯해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어요.”
정 형사는 이 6명은 범인들에게 완전히 속은 피해자라고 단정 지었다. 이들의 조사에서는 어떤 혐의점도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분노한 감정을 진정시키느라 땀이 날 정도였다. 그는 의뢰인들의 진술이 구상일과 동일한 것에 더욱 불쾌감을 느꼈다. 확실히 범죄의 기미를 포착했지만, 문제는 심증만 있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