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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Sep 05. 2024

디데이 - 3

< 정의의 슈킹 1 > 에서 이어집니다. 

12월 27일 ()     


동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현수 형, 다시 한 번 하면 안 될까요? 약속대로 마지막이었지만, 형도 알다시피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     

그의 목소리는 힘없이 흐트러졌다. 마치 현우의 선처를 바라는 듯 애처로운 느낌이 들었다.     

“그래, 현수야. 이번이 정말 끝이야. 인생은 삼세판이라고 하잖아.”     

동수의 호응으로 보아 이미 말을 맞춘 것 같았다. 현우는 표정이 굳어지며 동인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나는 이제 그만할 거야. 큰집에 가고 싶지 않아.”     

큰집이 교도소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다.     

“네 말대로 꼬리가 길면 잡히기 마련이지. 그걸 알면서도 또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야. 나는 지금부터 빠질 테니 냉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해. 분명 네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더 이상 붙잡지 마.”  현우의 음성은 차갑고 단호했다. 차 안에는 삭풍보다 매서운 공기가 휘감았다.     

동인의 눈짓을 받은 동수가 차 밖으로 나갔다. 트렁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수 형, 3천만 원이에요. 이것밖에 주지 못해 미안해요. 형이 우리 사정을 잘 아니까 이해해 줘요.”

현우는 숨이 컥 막혔다. 억지로 무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계산이 시작되었다.     

'바지에게 1억을 주고, 돈을 인출한 여자들에게 400만 원이 나갔다. 지금까지의 잔고증명 수수료와 사무실 경비, 술값 등을 합쳐 최대 5천만 원으로 잡았다. 총 작업비로 1억 6천만 원 정도가 들어갔으니, 나머지 3억 4천만 원에서 3천만 원만 준다는 거다. 처음부터 함께한 자신은 결국 바지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억울한 마음에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40억이 성공했더라도 자신에게는 3억 5천만 원이 분배될 것이다. 이 3천만 원의 배당금은 동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테다. 현우는 의식적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동인은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자식, 양심이 찔리나 보네.’     

“고마워. 작업이 잘 됐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네. 오늘 너무 피곤해서 먼저 일어날게. 동수야, 연락해.”     

현우는 쏜살같이 차에서 내려 축 늘어진 어깨로 그들의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걸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동인의 얼굴은 KO패 직전의 그로기 상태인 복서와 같았다.     

현우는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드디어 이들 사이에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왔다. 완벽한 이별을 이룬 것이다. 지금껏 그들과 통화했던 대포폰에서 배터리를 빼내고, 개천으로 힘껏 던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이로써 이들과의 연결고리는 영원히 끊어졌다.     


“기사님, 신사역으로 가 주세요.”     

택시는 강남역에서 출발해 가까운 거리에 도착했다. 조금 전 강남역 근처의 4개 은행에서 동수가 5억을 인출했다. 신사역 내에 있는 사물함에서 가방을 꺼낸 그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야구모자에 선글라스를 쓰고 잠바 깃을 올린 정체불명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그는 급히 택시를 잡아탔다.     

“지하철 명동역으로 가 주세요.”     

택시는 남산터널을 지나 명동역에 정차했다. 이동 수단과 경로를 복잡하게 한 것은 CCTV의 추적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이번에는 마스크와 후드 티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다시 화장실에서 나왔다. 바로 현우였다. 마치 첩보 작전을 방불케 했다. 만약 CCTV에 찍혀도 평소의 그를 특정하기는 어려웠다.     

연말이라 통로는 사람들로 붐볐다. 현우는 인파 속에 파묻혀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이윽고 사물함 앞에 섰다. 이곳에는 CCTV가 없다. 이런 장소를 찾기 위해 다양한 복장으로 이 일대의 지하철역을 모두 뒤졌었다.     

사물함은 약 50개 정도였다. 그 중 5개에 돈 가방이 있었다. 주머니에서 각기 다른 비밀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고, 떨리는 손으로 7번 사물함 번호를 눌렀다. 그 속에는 가방 3개가 있었다. 

현우는 몸으로 가리면서 서둘러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첫 번째 가방에는 오백만 원권 다발로 21개와 400만 원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가방에는 각각 1억 천만 원이 담겨 있었다. 총 현금은 3억 2천900만 원이었다.     

그는 흥분을 억누르며 나머지 4개의 사물함을 차례로 열었다. 총액은 16억 4천500만 원에 달했다. 현우가 35억 원을 모두 인출하지 않고 약 18억 원을 여러 개의 이체 통장에 분산해 둔 것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곁눈질로 주위을 살폈으나 누구 하나 그에게 관심을 두는 행인은 없었다. 33kg의 돈 가방은 꽤 무거웠다. 

지하철역에서 나와 200여 미터를 걸어가자, 모텔 벽에 세워둔 승합차가 눈에 들어왔다. 직선으로 왔다면 더 빨리 도착했겠지만, 대로의 CCTV를 피하기 위해 골목길로 돌아가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승합차를 보자, 시디를 교환하러 명동의 사채 사무실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거래신청서 원본이 없어 다시 은행으로 가려다, 주차장에 숨겨둔 동인의 승용차와 그 승합차가 겹쳐 보였다. 현우는 쓴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역시 동인이는 나의 교과서이자 스승이야.”     

화요일에 시영을 만나 30만 원을 주고 승합차를 3일 동안 렌트했다. 성탄절 저녁에 미리 이곳에 두고 갔다. 견인이 없는 장소를 찾느라 애를 먹었다.     

사물함에 가까운 주차장도 고려했지만, 큰 가방을 다섯 번이나 왕복하는 모습이 관리인의 기억에 또렷이 남을 것이다. 또한 경찰이 돈 가방이 보관된 사물함 주변을 탐문 수사할 경우, 주차장과 운반 차량이 연결될 수 있다. 그러면 관리실에 기록된 이 차의 번호가 드러나고, 렌터카를 빌린 시영의 인적사항은 자동으로 뜨게 된다.

다섯 번을 왕복하니 숨이 턱까지 차고, 추운 날씨임에도 속옷은 땀으로 축축이 젖었다. 차 뒷문을 열고 가방을 차곡차곡 쌓았다. 한 번에 3억 3천만 원을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여자들에게 1억 천만 원 정도로 배분한 것을 다행이라 여겼다.     


현우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서울에서 은행이 가장 밀집해 있는 지역이 명동역과 을지로입구역 사이임을 알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무려 100여 개의 은행이 있었다. 한 명이 4개의 은행을 방문하기로 했다. 각기 다른 장소에서 만난 5명의 여자에게 3억 5천만 원이 입금된 통장을 주며 말했다.     

“첫 번째 은행에서 현금으로 1억 900만 원을 인출하세요. 나머지 2억 4천만 원은 1억 원권 수표 두 장과 천만 원권 수표 네 장으로 찾으세요. 잔고로 100만 원을 남겨두세요.”     

그가 지정한 사물함에 현금을 넣은 후, 동일한 은행의 다른 지점으로 이동한다. 그곳에서 1억 2천 원의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 다시 사물함에 넣는다. 나머지 수표도 같은 방식으로 처리한다. 한 번 옮기는 돈의 무게는 약 12kg 정도로, 충분히 들 수 있다. 이렇게 해야 기동성을 살려 작업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당일에 입금된 3억 5천만 원을 한 번에 현금으로 찾으면 분명히 은행의 의심을 받을 것이다. 특히 신규 통장이라면 더욱 그렇기에 기존 통장을 사용했다. 또, 3억 5천만 원을 현금과 수표로 나눈 이유는 수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1억 정도의 현금은 시내 중심가의 은행들이라 대부분 비축하므로 미리 연락할 필요도 없다.

현우는 은행의 위치와 방문 순서를 적은 종이를 여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절대 한 곳에 두 번 가는 실수를 피하기 위해 은행의 주소를 꼼꼼히 확인했다. 이날 1명이 4곳을, 5명이 도합 20군데 은행을 들락거렸다.        

며칠 전, 현우는 5개 보관함의 대여료를 선불로 지급하고 얻었다.

“아주머니, 수고비로 천만 원을 가지고 나머지는 보관함에 넣어주세요. 비밀번호는 ****입니다.”     

여자들은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마지막 가방을 조수석에 던졌을 때, 눈송이가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현우는 힘차게 액셀을 밟으며 쾌재를 불렀다. 이 승합차는 시영이 빌린 렌터카였다. 그녀는 운전 면허증이 있었지만, 희현은 없었다. 그래서 이 역할을 시영에게 맡겼다. 사실 그는 수혜도 작업에 이용하려 했었다.

‘그래, 상황에 따라 동지가 되기도 하고 애인이 되기도 하는 거야.’     

이체 작업과 렌터카 대여를 위해 두 사람이 꼭 필요했다. 처음에는 이 조건에 맞는 인물이 애매했지만, 만약 시영이 운전면허증이 없었다면 수혜로 대체했을 것이다. 수혜도 운전면허증이 있었고, 곤경에 처한 그녀에게 대출을 미끼로 유도하면 가능했다.     

그 당시 현우에게는 사랑보다 작업의 성공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수혜는 그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어 이 작업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와이퍼는 유리창에 쌓인 눈을 규칙적으로 닦아냈다. 이 차에 16억 원이 넘는 돈이 실려 있다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마치 천국으로 향하는 기분이었다. 너무 기뻐서 눈물과 콧물이 뒤섞였다. 눈은 점점 함박눈으로 내렸다.     

‘수혜야! 눈송이가 되어 너에게로 날아가고 싶다.’     

현우는 바지인 구상일을 만나러 핸들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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