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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Sep 03. 2024

디데이 - 1

< 정의의 슈킹 1 > 에서 이어집니다. 

12월 27일 (목요일)     


시계는 새벽 1시 30분을 넘어섰다. 이제 동인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노트북 옆에는 이체 경로가 적힌 A4 용지가 널려 있었다.     

이번은 고려금융의 이체 작업이었다. 사무실과 개인 명의로 K은행 통장을 개설해 보냈기에 입금은행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들의 모든 신경은 아이디에 집중되었다. 예측할 수 없는 숫자 조합으로 두통을 안겨준 암호가 아닌가! 동인은 어제 접수한 수요일에 근거하여 주민번호 뒷자리를 순서대로 입력했다. 물론 비밀번호는 접수일인 1226이었다.     

“적중했어!”     

“만세!”     

동수가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다행히도 규칙성을 벗어나지 않았다.     

5억 원이 이체 통장으로 이동되었다. 인터넷 뱅킹으로 타행 이체를 할 경우 금액에 관계없이 500원의 수수료가 발생한다. 이 수수료는 이체 통장에 미리 몇만 원을 입금해 빠져나가게 했다. 인출할 때 잔돈이 남아 번거롭기 때문이다.

대양금융의 입금은행은 W은행이었고 비밀번호는 0526으로 변함이 없었다. 동인은 꼬박 2시간을 의자에 붙박이로 앉아 중노동을 했다. 만약 저렇게 고시 공부를 했다면 장원급제를 했을 것이다. 

‘대단한 자식! 인정할 건 인정한다.’  

수일금융과 대양의 돈도 무난히 이체 통장으로 분산되었다. 

이로써 서울금융을 제외한 초벌구이 작업은 끝났다. 이때가 3시 30분이었다.     

몇 시간 후면 고려, 대양, 수일금융은 난리가 날 것이다. 또한 슈킹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명동 사채 사무실들은 비상이 걸릴 것이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에 40억 원이라는 거금이 신기루처럼 증발했으니 말이다.     

수표로 입금된 서울금융의 이체 작업은 은행 영업이 시작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현수 형, 다음 작업까지 시간이 남았으니 눈을 붙이세요. 곧 있을 전투를 대비해서요.”     

동인은 책상에 다리를 걸치고 눈을 감았다. 이미 동수는 소파에 쓰러져 코를 골고 있었다. 현우는 자려고 했지만, 잠이 오기는커녕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는 살그머니 사무실을 나와 화장실로 갔다. 세면대에 찬물을 받아 얼굴을 담그자 정신이 바짝 들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이 낯선 타인처럼 느껴졌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를 깊게 빨아들여 허공으로 내뱉었다. 연기가 검은 도화지 위에 흰 물감이 퍼지는 듯이 춤을 췄다. 두 번째 연기로 도넛 모양을 만들어 날렸다. 그 원 안에는 넓은 정원의 전원주택과 외제 스포츠카가 있었다.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다 문득 창고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문을 당기며 중얼거렸다.     

“여기 출입하는 것도 마지막이네.”     

아직 어둠이 걷히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현우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스스로에게 명령했다.     

‘결정적인 순간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사무실에 들어서자 두 사람은 비품을 포장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수 형, 걸레를 적셔서 모든 집기와 벽을 지문이 남지 않게 닦아 줘요. 동수 형은 박스를 차로 옮기고 쓰레기는 비닐봉지에 담아 근처에 버리지 말고 멀리 갖다 버려. 증거가 남을 수 있으니까.”     

이제 사무실에는 노트북 두 대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현우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겨울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마침내 시간이 오전 9시 20분을 가리켰다. 각자 노트북으로 C은행에 접속했다. 동수는 인출할 여자들을 만나려고 1시간 전에 출발했다. 그들도 이 작업을 마치고 급히 그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두 사람은 모니터에 집중하며 실시간으로 입금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형, 수표가 현금으로 대체됐어!”     

동인이 번개처럼 엔터 키를 눌렀다. 순식간에 이체 통장의 잔액이 1만 원에서 5억 1만 원으로 바뀌었다. 현우의 가설이 사실로 입증된 순간이었다.

현우에게 동일한 현상이 발생한 것은 2분 후였다. 그의 손놀림도 동인 못지않게 빨랐다. 드디어 서울금융의 작업도 완벽하게 완료되었다. 그 시각은 9시 42분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복개천에 세워둔 렌터카로 향하는데, 동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이 렌터카는 동수의 위조 운전면허증으로 빌린 것이다.     

“위조 운전면허증이 왜 필요한 거야?”     

“나중에 다 쓸모가 있어.”     

언젠가 동수가 말한 ‘나중’이 지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긴 동인이 범죄 수익금을 자신의 차로 운반할 리는 없지만, 이 상황이 나중에 현우의 독자적인 작업에 힌트가 되었다.     

“동인아, 큰일 났어! 아줌마들이 은행에 갔다 왔는데 통장에 돈이 하나도 없대.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아침 8시까지 확인했는데.”     

동인은 절대 그럴 리 없다며 펄쩍 뛰었다.    

“왜 나한테 화를 내냐? 설마 여자들이 거짓말을 하겠어? 일단 이쪽으로 빨리 와 봐.”     

현우는 숨을 죽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여기서 사소한 말실수는 괜한 의심을 초래할 뿐이었다. 동인은 용변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이 심하게 떨렸다.

“형, 지금 귀신에 홀린 것 같아.”     

동인의 얼굴은 창백해지고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커피숍에 도착하니 여자들이 무리 지어 있었다. 이 광경에 현우는 어이가 없었다. 동수의 미련함에 혀가 찼다. 만일 그중 한 사람이 부정적으로 선동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따를 것이므로, 그들을 뭉치게 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명의 대여자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동수가 8개의 이체 통장을 내밀었다. 통장을 펼친 동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각 통장에는 5억 원이 입금되었다가 모두 빠져나가 잔액이 0원이었고, 단 하나의 통장만 서울금융의 돈이 그대로 5억 원이 남아 있었다. 사실 이것은 현우의 의도된 계획이었다.

동인은 이 사건의 원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해머로 뒤통수를 기습 당한 기분이었다.  

‘이건 꿈이야, 악몽이야!’     

동인은 몸서리를 쳤다. 자신의 신세계가 한순간에 붕괴되는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형들, 이런 일이 생기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눈이 반쯤 풀린 그는 고개를 저었다. 견디기 힘든 침묵이 흘렀고, 갑자기 동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우리가 넋 놓을 때가 아니에요! 저 돈은 은행 직원 눈앞에서 사라졌으니 빨리 찾아야 해요! 차에서 노트북으로 이체하고 올게요.”     

동인은 부리나케 나갔고, 금방 돌아왔다.     

“1억 2천500만 원씩 이체했어요. 은행에 한 번만 가면 될 거예요. 여자들에게 수당으로 100만 원씩 주세요. 저는 차에 있을게요.”     

동인은 비틀거리며 나갔다. 40억이 반의 반의 반으로 줄어들어 5억이 되었으니, 그 실망과 충격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후 동수의 지휘 아래 인출 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제 현우는 더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잠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경직된 얼굴 근육을 풀었다. 그리고 한적한 곳에서 희현에게 전화를 걸어 속삭였다.     

“희현 씨, 아침부터 이체하느라 수고 많았어요. 덕분에 제가 바쁜 일을 잘 처리했네요. 조만간 꼭 식사 대접할게요.”

이어 그는 희현이 이체한 돈을 인출하고 있을 5명의 여자들에게 각각 전화를 걸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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