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의의 슈킹 1 > 에서 이어집니다.
12월 28일 (금)
시간이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형사들은 팀장 방에 모여 전체 회의를 열었다. 이번 회의는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기 위한 자리였다. 먼저 정 형사가 입을 열었다.
“범인은 네 명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들은 치밀하게 사전 계획을 세운 상습범으로 보입니다.”
“사무실에서 범죄 증거는 발견했나?”
팀장이 물었다. 그 질문에 박 형사가 대답했다.
“사무실을 철저히 수색했지만 범행의 증거는 전혀 없었습니다. 집기와 벽, 유리창을 물수건으로 닦아 지문조차 찾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족적이나 머리카락 한 올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런 증거 인멸로 보아 상당히 지능적이고 용의주도한 범인들입니다. 게다가 그 건물에는 CCTV가 없어서 반경 300m 내의 CCTV를 전부 확인했지만, 용의자의 모습이 흐릿하게 찍힌 영상 몇 개만 확보했습니다. 그런데 화질이 좋지 않아 범인을 특정하는 데는 실패했습니다. 아마도 CCTV가 없는 골목길로만 요리조리 피해 다닌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김 형사가 말했다.
“문제는 이와 유사한 사기 사건이 단 한 건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금고털이범이라면 동종 전과자를 조사하면 되겠지만, 이 사건은 어디서부터 단서를 찾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현재 상황이라면 돈을 인출한 여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피해자라는 말인데…”
팀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정 형사가 자신 있게 끼어들었다.
“구상일이 이 사건의 공범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나?”
팀장이 물었다.
“그의 진술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의심이 갑니다. 마치 사전에 범인들과 각본을 짠 것처럼 자연스럽습니다. 무엇보다 수일금융 직원의 진술이 ‘구상일이 잔고증명의 방법을 잘 아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한 번도 잔고증명을 한 적이 없다고 했거든요. 이 모순이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주범은 아닐 것 같고 종범으로 보입니다.”
“구상일은 대출 사무실에서 시킨 대로 했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그렇게 말했지만,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을 직원이 진짜 의뢰인처럼 느낀다는 것은 쉽지 않죠.”
“그 정도의 혐의로는 공범으로 엮기에는 부족해.”
팀장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물러설 정 형사가 아니었다.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뭔데?”
“잔고를 의뢰한 6명은 범인에게 교묘하게 이용당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서류만으로 잔고증명이 가능한 사무실에 의뢰했으며, 이 업체들은 의뢰인의 신분, 직업, 용도에 관계없이 잔고증명을 해줍니다. 그런데 유독 구상일의 경우는 같다는 점이 의심스럽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수일금융은 의뢰인이 반드시 방문해야 하고, 의뢰인의 직업과 잔고증명 용도가 일치해야만 해줍니다.”
“정 형사 말인즉, 구상일이 맞춤형으로 작업했다는 거군.”
“맞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봐.”
“구상일은 이전에 철공소를 운영했기에 사업자등록증 종목의 공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용해 잔고증명 용도를 ‘철근 골조 공사용’으로 하여 수일금융을 감쪽같이 속인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 사전에 범인들과 모의했을 것입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야. 그 정황 증거로는 구속하기 어려워.”
팀장은 이를 일축하고 다른 형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 외에 혐의점은 없나?”
모두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며 멍하니 있었다.
팀장은 손으로 턱을 만지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형사들의 시선이 그의 입에 집중되었다.
“이 수사 결과로는 구상일을 검찰에 구속 신청을 하면 기각되거나 재수사 지휘가 내려올 게 뻔해. 일단 돈을 인출한 여자들은 불구속으로 송치하고, 구상일에 대해서는 보강 수사를 진행하도록 해. 체포 시한 48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빨리 서둘러!”
모두 자리를 뜨려는데, 밖에 나갔던 조 형사가 USB 두 개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왔다. USB를 건네받은 정 형사는 노트북에 꽂으며 자신감 넘치게 말했다.
“구상일이 진술하기를 어제 오전 9시경 장 부장이 J은행 통장을 개설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낮 12시쯤 다시 전화가 와서 그 통장을 분실했다고 하며 재발급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 통화 내역이 담긴 USB입니다.
다른 USB에는 같은 날 장 부장이 지시한 대로 통장을 만들고 오전 11시경 J은행 앞에서 전달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오후 2시경 그 통장을 분실 신고하고 재발급을 받아 그에게 건넸다고 합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은행 주변 CCTV에 찍힌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이 USB들을 듣고 보면 구상일의 진술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아마 우리가 여기까지 조사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형사들의 눈길이 노트북 화면에 고정되었다. 정 형사는 마우스 버튼을 힘차게 클릭했다. 현우와 상일의 대화가 흘러나왔다. 형사들은 현우의 목소리를 당연히 장 부장으로 인식했다.
“구상일 씨, 현재 K은행 통장으로는 실적이 부족하여 대출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통장을 하나 더 발급받아 실적을 쌓아야 약속한 날짜에 대출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J은행 통장으로 만들어 주세요. 그리고 저희가 큰 금액을 입출금할 수 있도록 인터넷 뱅킹 신청을 반드시 해주셔야 합니다.”
이때 시간은 오전 9시 5분이었다. 두 번째 통화 내역이 이어졌다.
“이거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거래처로 가다가 구상일 씨 통장이 든 가방을 택시에 두고 내렸습니다. 미안하지만 재발급을 부탁드립니다. 통장 계좌번호는 ***-****-****-**이고 비밀번호는 2970입니다.”
시간은 낮 12시 10분이었다. 정 형사는 얼굴색이 홍당무처럼 벌게졌다.
두 번째 USB의 영상이 재생되었다. J은행 정문 주변이 나타났다.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장 부장이 CCTV를 등지고 있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구상일이 통장을 건네자마자 그는 빠르게 사각지대로 사라졌다. CCTV 타이머는 10시 5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오후 2시 20분에 다른 J은행에 만나서도 행동은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구상일의 진술과 알리바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어, 어. 이게 아닌데?”
조금 전까지 호기롭던 정 형사는 멘붕에 빠졌다. 장 부장은 정면으로 찍은 영상이 없었기에 그의 몽타주를 특정 짓기는 불가능했다.
이 상황은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바지 구하기’로 현우의 특별 작전이었다. 그는 경찰이 구상일의 진술 진위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그날의 통화 내역과 CCTV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현우의 예측은 맞았다. 감독도 좋았지만 배우의 연기도 훌륭했다. 실망한 형사들이 회의실을 나가려 할 때, 조 형사가 소리쳤다.
“잠깐만요! 구상일에게 거짓말 탐지 검사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이 말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정 형사였다. 그는 여전히 상일이 범인과 연관이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과학적 수사보다 20년간의 형사 경험으로 수많은 범인을 검거해왔던 그였다. 그러나 통화 내역과 CCTV의 오판으로 전전긍긍 하던 차였다. 그런데 파트너인 조 형사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안하니, 그는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좋아. 그렇게 하지.”
팀장은 흔쾌히 승낙했다.
“구상일 씨,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 응하시겠습니까? 만일 거부하신다면 범인임을 시인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네, 좋습니다.”
거짓말 탐지기 검사는 반드시 상대방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자신이 당당하다면 거부할 이유가 없다. 상일은 조사에 동의한다는 서명을 했다.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증거 능력으로는 인정되지 않지만, 수사 참고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만약 결론이 거짓으로 나온다면 정 형사는 조사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이제 넌 가면을 벗게 될 거야!’
드디어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온 것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승부처로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