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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철 Sep 10. 2024

바지의 판정승

12월 31일 ()     


그는 정 형사와 조 형사의 호송을 받아 법원으로 갔다. 상일은 처음으로 법정에 서게 되어 무척 떨렸다. 높은 법대와 엄숙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곧 그의 재판 순서가 다가왔다. 

그런데 갑자기 사선 변호사가 등장했다. 상일은 당황스러웠다. 사선 변호인 선임은 공동각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우 판사가 인정신문을 마치자, 공판 검사가 범죄 사실의 요지를 읽었다. 재판장은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심문은 정 형사의 조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일은 냉정하게 또박또박 대답했다. 어느 순간에는 억울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회가, 이 연기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환점인걸 알고 있었다.     

변호사가 변론을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여기 피의자는 생활이 어려워 대출을 받으러 갔다가 사기 사건에 연루된 피해자 중 한 명입니다. 또한 피의자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혐의를 부인하고 있으며, 사건 발생일의 통화 내역과 CCTV 영상도 그의 알리바이를 뒷받침합니다.     

결국 이 사건에서 피의자가 범인이라는 증거는 거짓말 탐지기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것 외에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법조인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증거로서의 효력이 없습니다. 이는 피검사자의 심신 상태에 따라 언제든지 반응이 달라질 수 있기에 법원에서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이 결과가 재판에 영향을 미쳐 무죄인 사람이 유죄로 판결된다면, 그 사람의 인생을 누가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피의자는 지금까지 전과 없이 성실하게 살아왔으며, 안정된 주거 환경과 단란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다. 부디 이 피해자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지 않도록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바라오며 이상으로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현우가 선임한 변호인은 법원장 출신으로, 갓 법복을 벗은 전관예우 변호사였다. 수임료가 비쌌지만 그의 변론은 그만큼 뛰어났다.     

판사실로 돌아온 우 판사는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정황상으로 공범으로 의심은 가지만 물증이 없는 상태이다. 재판의 기본 원칙은 심증이 아닌 증거에 기반해야 한다.     

유일한 증거는 변호인의 주장처럼 거짓말 탐지기에서 양성 반응이 나온 것뿐이며, 이는 참고자료에 불과하다. 이 정도로 구속영장을 발부하기는 어렵고,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날 가능성이 높다.     

'피의자의 맑은 눈빛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를 보니 거짓말 같지 않아. 잘못하면 무죄인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도 있어. 범죄자 9명을 놓치더라도 무고한 1명을 처벌하지 말라는 법언도 있지 않나! 게다가 이번이 처음 맡은 선배님의 사건이니 체면을 세워 드려야 다음에 뵐 때 미안하지 않을 거야."     

우 판사는 결심한 듯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영장실질심사 결과를 기다리는 상일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그때 조 형사가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그러나 조 형사는 기각 결정서를 들고 불안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상일의 완전한 판정승으로 사건을 마무리 되었다. 시간은 오후 6시 40분을 조금 지나고 있었다.     

정 형사는 찡그린 얼굴로 그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풀어주었다.     

상일은 여유롭게 법원을 나섰다. 정 형사는 안경을 벗고 눈을 꾹 눌렀다. 범인을 잡으려는 그의 노력이 허무하게 무너진 순간이었다. 상일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 친구에게서 구린내가 나는데도 모두가 코를 막고 있었어. 결국 우리는 KO패한 거지.”     


상일은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두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 실장님, 저 나왔어요. 실장님이 시킨 대로 했습니다. 변호사를 선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가족을 위한 당신의 희생이 지금의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당신은 참 좋은 아버지입니다.”

상일은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그 대가로 거금을 손에 넣었다. 그가 경찰서에 출두하고 법원에서 석방되기까지 약 75시간이 걸렸다. 시간당 260만 원짜리 피 말리는 알바를 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상일은 마지막 순간에 운 좋게 기회를 잡은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내일 그는 가족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새해를 맞이할 것이다.     

현우는 그와 통화한 휴대폰을 부숴버렸다. 이제 이 사건은 영원히 미제로 남을 것이다. 동수는 어릴 적 폭력 전과가 한 번 있었고, 동인은 깨끗하다. 만일 그들이 이와 유사한 전과가 있었다면, 현우는 처음부터 작업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수사기관은 가장 먼저 동종 전과자를 용의선상에 올린다. 이는 특이한 사기 사건으로, 경찰의 범죄 유형 파일에서 1순위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살인이나 강도와 같은 강력범죄가 아니라 흔한 경제범죄이기에 몽타주를 배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럼에도 거액을 편취한 사건이므로 장담할 수는 없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CCTV에 흐릿하게 찍힌 동수의 모습이 지명수배 전단지에 실릴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 그가 검거되더라도 현우와의 연결고리는 끊어졌기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동수도 괜찮아야 할 텐데….”     

어느새 현우의 표정은 안쓰러움으로 바뀌었다.     


복 사장은 사무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문 앞에서 망설였다. 엊그제 사건이 발생해 10억 원이 날아갔다. 그래서 전주인 박후자의 불호령이 두려워 결근하다가 이제야 출근했다.     

“이거 큰일이네. 저년 성질로 봐서는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두 사람 사이는 말이 내연 관계이지 주인마님과 머슴이나 다름없었다. 그는 문을 살짝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그 순간 손에 쥘 수 있는 온갖 물건들이 복 사장을 향해 날아왔다.     

“이 빙신아, 내가 안전빵인 사채를 하자고 했잖아!”     

“언제는 잔고증명이 돈 회전도 빠르고 더 벌어서 좋다더니….”     

“시끄러워! 이제 나도 거지가 됐단 말이야. 네 몸을 팔아서라도 빨리 채워 넣어!”

후자가 의자를 번쩍 들어 그에게 던졌다. 복 사장은 혼비백산하여 줄행랑을 쳤다.

“그나저나 찜질방에서 잘 돈도 없는데 어떡하지?  이 추운 겨울에 공원에서 신문 덮고 잘 수도 없으니.”     

복 사장은 리어카에서 구워지는 붕어빵 냄새에 군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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