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철 Sep 11. 2024

영원한 동반자

12월 29일 (토)                    


창밖을 바라보는 수혜의 눈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현우에게 은행 대출이 거부되었다는 말을 들어서다. 가만히보니 그녀는 며칠 사이 꽤나 야위었다.     

“정말 안 되는 건가요? 다른 방법은 없나요?”     

절실한 바람이 수포로 돌아간 것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았다. 현우는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놓았다.     

“수혜 씨가 대출이 안 되어 제가 대신 받았어요. 금액은 같을 거예요. 일단 이 돈을 쓰세요.”     

이어 개구쟁이처럼 말했다.     

“이자를 연체하시면 압류에 들어갈 겁니다.”     

수혜는 급한 불을 껐다는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실장님, 진심으로 감사해요.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 게요.”     

어느새 그녀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진한 감동에 흐느끼는 소리가 잔잔한 파도처럼 퍼졌다. 현우는 슬쩍 수건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의 감정이 가라앉자 밑자락을 깔았다.     

“수혜 씨, 혹시 피아노 교습소에 운전기사가 필요하지 않나요? 저 이래봬도 1종 면허에 무사고예요. 이제부터 우리는 동업자잖아요. 또 수혜 씨가 바쁘면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병원에 가고 동생과 놀아 줄 수도 있거든요.”     

그녀의 답변을 기다리는 현우는 조마조마했다. 수혜는 볼에 홍조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커피숍을 나왔다.     

“저기 잠깐만 앉았다 갈래요?”     

현우가 공원 벤치를 가리켰다.     

“처음 당신을 봤을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아세요?”     

“네?”     

“그 순간 제 마음은 골절이 되었지요.”     

“전치 몇 주가 나왔는데요?”     

“바로 중환자실에 입원했죠.”     

서로의 위트에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수혜 씨, 제 좌우명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버나드 쇼의 묘비명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렇게 될 줄 알았다’에요.”     

그녀는 풋 웃었다.     

“사막은 오아시스가 있어서 아름답다고 하잖아요. 마침내 저는 오아시스를 찾았습니다.”     

“어떻게요?”     

“제 곁에 오아시스가 있으니까요.”     

수혜는 부끄러운 듯 그의 옆구리를 가볍게 쳤다.     

“저는 당신이 좋아요.”     

“왜 저예요?”     

“사람을 좋아하는 데 무슨 이유와 시간이 필요한가요?”     

“그래도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나는 마음이 끌리는 데 3초밖에 안 걸렸어요. 당신에게요.”     

현우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솜사탕처럼 부드러운 따스함이 전해져 왔다. 사랑의 맥박이 뛰기 시작했다. 공원 등불 빛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 담겼다.     

“우리 그냥 사랑할까요? 재치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하잖아요.”     

“….”     

“해야 할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거짓말이래요.”     

“좋아요.”     

그의 입술이 수혜의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나뭇가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현우는 집을 향해 총총 뛰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성탄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날 그는 수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에게 차 한 잔 빚진 거 잊지 않으셨지요?”     

“네.”     

이래서 두 사람은 데이트를 했다. 어쩌면 그녀의 입장에서는 거절하면 대출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응했는지도 모른다. 경춘선을 타고 청평역에서 내려 한적한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이 세 번째 만남에서 수혜는 자신의 형편을 고백했다.     

“그중 한 곳은 힘들 거예요. 전에 그 은행에 대출 보증을 선 적이 있었는데 다 갚지를 못했거든요.”     

대출 상담을 하면서 이렇게 말한 연유를 알 수 있었다.     

“저희 아버지는 대기업의 기계를 생산하는 재하청 회사였어요. 근데 아버지 회사에 제품을 발주했던 사장이 공금을 가지고 잠적했어요.”     

그녀의 안타까운 과거사가 펼쳐졌다.     

대기업인 원청에서는 수주처에 결재를 했으므로 책임이 없다고 했단다. 그런데 수혜 아버지가 하청 준 업체들이 아버지에게 미수금을 독촉했다. 그때 아버지의 은행 대출에 그녀가 보증을 섰다. 그래도 돈이 턱없이 부족해 재산은 압류되었고 살던 집마저 경매로 넘어갔다. 그동안 남부럽지 않게 살던 수혜네는 거리에 나앉을 정도로 비참하게 바뀌었다. 당시 그녀는 대학교 피아노과 3학년이었다고.     

그해 겨울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추락사로 숨졌다. 그 일로 아버지는 상심한 마음을 달래려 술을 과하게 마셨다. 그러다 취중에 자동차 전용 고가도로를 걷다가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라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사건은 종결되었다.     

“목격자들의 진술이 혼자 비틀거리다 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거예요. 아버지 사고가 일어난 날은 눈이 엄청 내렸지요. 그 이후로 저는 눈이 싫어졌어요.”     

졸지에 그녀는 신장 투석을 받는 어머니와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래서 1년 남은 학기를 마치지 못해 졸업을 못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피아노 학원에 취업하여 지금껏 가족을 돌보고 있다고.     

현우는 그녀의 얘기를 듣는 내내 누나를 떠올리며 가슴이 저렸다.     

‘두 사람은 어쩌다 비슷한 아픔을 겪었을까?’     

언제부턴가 그는 수혜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와 향기가 누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선지 사랑의 감정이 더욱 샘솟았다.     

그녀는 해바라기처럼 활짝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엄마의 병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고 동생도 건강하게 잘 자라니까요. 또 피아노 교습소를 하면 지금보다 환경이 나아지잖아요.”     

커피숍을 나왔을 때 밤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사무실을 방문했던 날도 적게나마 눈이 날렸다.      

'이제 당신은 눈을 좋아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만난 날에는 늘 눈이 내렸으니까요.'     

눈송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12월 30일 (일)                    


현우와 누나는 요양병원을 향해 걸었다.     

“정말 1등에 당첨이 되었단 말이야?”     

“그렇다니까.”     

그는 지갑에서 로또 용지를 꺼내 누나의 눈앞에 펼쳤다. 거기 여섯 자리 숫자에 빨간색으로 동그라미가 표시되어 있었다.      

“봐! 봐! 진짜지? 전에 내가 길몽을 꾸었다고 했잖아.”     

혹시 누나가 숫자를 암기할 지 몰라 현우는 빠르게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눈이 휘둥그레졌다.       

“1등 수령금이 12억이라고 그랬니?”     

어제 저녁에 로또 추첨이 끝나자마자 전화로 알렸다. 그 회차의 1등 당첨금이 18억으로 33%를 공제하면 약 12억이다. 얼추 이 금액에 맞춰야 의심을 피할 수 있다. 그는 거액이 생겼다는 명분을 아무리 생각해도 적당한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무모하지만 이 방법을 사용했고 꿈 이야기로 완성도를 높였다.     

“누나에게 10억을 줄 테니 집을 사고 반찬 가게도 해.”     

“아니야. 누나는 괜찮으니 그 돈으로 얼른 결혼해서 단란한 가정을 꾸려. 그게 엄마도 바라는 소망일 거야.”  

현우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벌써 누나 통장으로 입금했어.”     

그는 성큼성큼 앞장서 걷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나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울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누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여러 사람이 행복해질 수 없는 진실은 숨기는 게 좋은 거야.”     

“치매 증상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으니 이 정도만 유지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요양비를 밀리지 않고 누나가 자주 문병을 와선지 의사는 친절했다.     

“엄마, 복 사장과 돼지 엄마를 기억해?”     

“그럼 알지.”     

“얼마 전에 그 사람들을 만났는데 옛날에 엄마에게 돈을 꾼 적이 있다며 전부 갚았어. 그것도 이자까지 포함해서.”     

“그래?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네.”     

다행히 엄마의 머릿속에는 그들이 악인으로 각인되어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엄마, 나는 그 돈으로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전원주택을 살 거야. 좋지?”     

“나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     

세 사람의 어깨에 포근한 눈송이가 쌓였다.     

이전 12화 바지의 판정승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