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1일 (월)
벌써 이 피시방이 10번째다. 이제 마지막 엔터를 치면 18억 정도가 이체된다. 이 돈은 슈킹 금액 35억 중 이작업을 하려고 남겼다. 다행히 돈은 그대로 있었다. 현우는 수십 개의 통장에 수천만 원씩을 분산했었다. 그 이유는 한 개의 통장에 거액을 입금해 놓았다가 지급 정지를 당하면 이 계획은 실패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잘못하면 18억이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고 사고가 발생할 수 있기에 심사숙고했다.
다음에 그는 송금 문제로 고민을 거듭했다. 돈을 전부 현금으로 찾아 그들을 만나서 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이 방법을 세웠다.
현우가 피시방을 옮겨 다니면서 이체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그것은 뜻밖의 돈이 입금되어 있으면 그들 중 겁이 나서 경찰에 자진 신고를 할 수 있다. 당장 궁핍한 형편에 견물생심이라 그럴 확률은 적겠지만.
그러면 경찰은 순식간에 현우 자리의 IP 위치를 추적하여 피시방을 급습할 것이다.
먼저 명의대여자인 5명에게 천만 원씩을 이체했다. 그녀들은 이 사건으로 몇백만 원의 벌금이 나온다. 수고비에서 이 벌금을 부담시켜 배신감을 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들이 대출 손님들보다 훨씬 힘든 상황일 수도 있다. 오죽하면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일을 했겠는가!
현우는 개개인의 사정을 모른다. 아니 일부러 물어 보지 않았다. 그때는 냉정해야 한다고 결심한 것이 이제와 보니 후회가 되었다.
자판기 옆의 A4 용지에는 이름과 입금 은행, 계좌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대출 광고가 게재된 후 보름이 넘는 기간 하루에 세 명 이상을 상담했다. 거의 사정이 딱했지만 그중에서도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40여 명을 선별하여 12억 정도를 입금했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현실의 거센 파도를 헤쳐 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조금만 도와주면 고비를 넘겨 평범한 삶을, 재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더욱이 자신보다 가족과 위해서 희생하려는 마음을 지녔다. 이어 사무실에 설치한 유선전화 명의인에게 전화 요금을 이체시켰다. 한결 기분이 좋아졌다. 아마도 죄책감에 얼마라도 보상했다는 반대급부의 심정이 작용했으리라.
그는 담배를 물고 라이터를 켰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 성당의 붉은 종탑이 보였다. 수혜를 세 번째 만난 날 커피숍에서 그녀의 과거사를 들은 후, 두 사람은 청평역으로 향했다.
언뜻 시골의 아담한 성당이 눈에 띄었다. 성탄절이라 마당에 트리를 감싼 꼬마 전구들이 반짝였다.
“실장님, 신앙이 있으세요?”
그녀의 의도를 간파한 현우가 능글맞게 말했다.
“수혜 씨가 믿는 하나님을 저도 한번 믿어 볼까 합니다.”
지금까지 대화로 그녀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것을 눈치챘기에 점수를 따려는 립 서비스였다. 현우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다.
“초등학교 때 친구가 성당에 가면 달걀을 준다고 해서 사심으로 따라간 적이 있어요. 아마 부활절인 거 같아요. 저는 몰래 두 개를 받아 왔지요.”
“저도 그랬어요. 두 개는 기본이에요.”
수혜는 그의 기분을 맞추려 호응했다. 현우는 내심 고마웠다.
미사 시간이 되었는지 성경책을 손에 든 사람들이 성당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생글거리며 말했다.
“저와 함께 미사를 드린다면 다음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일게요. 선택은 실장님 자유예요.”
현우는 눈 한번 질끈 감으면 밑지지 않은 장사라는 계산이 나왔다. 성당 안은 엄숙하면서도 따뜻했다. 특히 창문마다 다양한 동심의 그림들이 새겨진 스테인드글라스가 차가운 마음을 녹일 듯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수혜는 핸드백에서 하얀 미사보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러자 그녀에게서 수녀처럼 순결과 거룩함이 묻어났다. 곧 찬양과 기도가 이어졌다. 수혜는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옹알거렸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현우는 어색한 분위기에 몸이 근질근질했다. 그러다 불현듯 단상 위 십자가로 눈이 갔다. 그 십자가에는 고개가 축 처진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님이 양 손바닥과 발등에 대못이 박힌 채 최후를 맞이하는 형상이 있었다.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다.
그 순간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 솟구쳤다. 그것은 명의대여자와 대출 손님들의 눈물이 예수님의 피눈물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간암 말기 아들의 수술비가 없어 비탄하던 중년 여자.
대기업의 진출로 터전에서 밀려나 손 세차장을 해서라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는 카센터 부부.
조명으로 특허 등록까지 받았지만 기계 살 돈이 없어 재기를 못하여 낙담하던 신용불량자 아저씨.
거래처의 부도로 평생 마련한 집까지 팔아 빚잔치를 했지만 그래도 건강함에 감사하며 청소업을 하려는 중년 부부.
당뇨병으로 실명된 한쪽 눈의 통증을 치료할 겨를도 없이 자식들의 뒷바라지가 급하다는 트럭 아저씨.
베트남에서 한국 남자의 사랑만을 믿고 타국으로 와 온갖 멸시를 당하다 뇌종양을 앓는 이국 여성.
자전거 대리점을 해서 하루 빨리 가정으로 돌아가 처자식에게 속죄하고 싶다는 노숙자 아저씨.
자식에게만은 가난의 대물림을 물려줄 수 없다며 울부짖던 택시 기사.
교도소에서 10여년을 살고 나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중학생인 딸에게 꼭 함께 살자고 손가락을 걸었다는 전과자 아저씨.
장애로 인한 차별로 소외받는 장애인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남은 생을 바치려는 파랑새 집 할아버지.
만성 신부전증의 딸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신장을 떼어 주려는 검사에서 1,000분의 1의 기적 같은 조직 적합성 판정을 받았으나 돈이 없어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려는 아주머니.
이들의 절규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의 고통의 신음은 같았다. 그는 갈등이 일었다. 머릿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결렬이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가 끊임없이 속닥였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도 마. 어떻게 움켜쥔 건데, 절대 포기하면 안 돼!”
이 결정은 현우가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을 선택했을 때보다도 훨씬 어려웠다. 자기 소유를 내려놓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는 줄은 몰랐다. 그것은 당연했다. 지금껏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십자가를 보며 난생처음으로 기도라는 걸 했다. 천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현우야, 너도 얼마 전까지 그들과 똑같은 처지였잖아? 나는 네가 선한 사람이란 걸 알아.”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음이 평안해졌다.
‘난 신을 안 믿어. 왜? 한 번도 내 기도를 들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이제까지의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