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지상은 심 판사를 찾아갔다. 만약 여기서 포기한다면 자신과 딸의 운명이 비참해질 것이라는 생각에 승부수를 던졌다.
“재판 중에 피고인 변호인이 판사실에 오는 것이 금지된 거 몰라요? 그리고 보안 카드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스크린 도어를 열고 들어온 거요?”
그의 방문이 탐탁지 않았던 심 판사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 판사실 층은 소송 관계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복도 입구에 스크린 도어가 설치되어 있었다.
지상은 이 문제로 고민하다가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보안 카드를 찾는 척하며 직원이 들어갈 때 바짝 뒤따르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제대로 통했다.
“저에게 투명 망토가 있거든요. 하나 선물해 드릴까요?”
“강 변, 지금 농담이 나와요? 사고를 크게 쳐서 자기 일 수습하기도 바쁜 상황인데.”
“제 사고는 판사님의 대형 사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게 무슨 뜻이요?”
“일단 이걸 보세요.”
‘정당하게 신청한 국민참여재판을 기각한 심재평 판사와 악덕 변호사 강지상을 고발합니다.’
“진정인은 2015년 8월 3일 속초 신풍리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사건의 피고인 동생입니다. 심재평 판사와 강지상 변호사는 공모하여 피고인에게 형량을 감형해 주는 조건으로 거짓 자백을 유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법률상 권리인 국민참여재판을 방해했습니다. 이에 진정인은….”
“이 진정서를 국민 청원에 올리겠다는 거예요.”
“그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야!”
심 판사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자네도 그 자리에 있었잖아. 피고인이 자의적으로 진술한 것을.”
“재판장님, 법정에서는 그 진술이 녹취되지만, 판사실에는 그런 장치가 없잖아요. 피고인이 자백을 번복하면 반증할 방법이 없다는 거죠.”
“그야 그렇지만….”
“이 아가씨는 옹고집에 허무맹랑해요. 당장 청원하겠다는 걸 극구 만류하고 달려왔어요. 이 진정서가 공개되면 저와 판사님은 큰일나요. 그제 매스컴에 터진 제 보도로 단골 식당 주인도 저에게 밥을 안 팔더라고요.”
“대체 이 여자가 원하는 게 뭐요?”
“국민참여재판을 열어달라는 요청입니다.”
“다시 국민참여재판을요?”
“네. 요즘 인터넷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우리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면서 악성 댓글이 쏟아질 거예요. 게다가 가족의 신상까지 털려서 사회생활이 힘들어질 겁니다. 더 큰 문제는, 이미지가 한순간에 무너진 후 진실이 밝혀져도 회복이 어렵다는 거죠.”
“그럼 어떻게 하지?”
“휴, 저도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
지상은 오만상을 지었다. 지금은 한배를 탔다는 동료애를 심어 줄 필요가 있어서였다. 처음에는 심 판사만을 겨냥했지만, 작전을 변경했다. 상아와 짜고 겁박한다는 의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함께 피해자임을 강조해야 자기의 말발이 통하지 않겠는가!
“강 변, 어떤 대안이 없겠나?”
‘드디어 약발이 먹혔어!’
“무조건 진정인의 요구를 수용해야 우리가 살 수 있어요.”
“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시간이 없어요. 빨리 결단하셔야 해요. 이 진정서를 올리는 순간 모든 게 끝나니까요.”
심 판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의사 표시였다.
“그런데 그쪽에서 한 가지 조건을 더 제시했어요.”
“또 뭐요?”
“변호인으로 저를 재선임하겠다는 거예요. 도원그룹 변호사는 더욱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장난해요? 강 변에서 도원 변호사로, 다시 강 변으로요?”
“그래서 제가 거절했더니 이 진정서로 협박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또 판사님을 생각해서 결국 수락했어요.”
“나까지 염려해 줘서 고맙네. 암, 강 변이 해야지.”
지상은 번개처럼 판사실을 빠져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심 판사는 중얼거렸다.
“하긴 국민참여재판을 해도 변호인을 바꿔도 결과는 똑같잖아.”
‘오늘은 진땀승을 했지만, 내일은 KO승을 예약해 놨다.’
지상은 들어올 때와는 달리 당당하게 스크린 도어 스위치를 눌렀다.
이 시각, 상태는 김도수 검사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다.
“당신이 운전했고 강지상 변호사가 거짓 진술을 시켰다면, 조사에 협조한 점을 고려해 재판부에 선처를 구할게요. 그러면 집행유예로 나올 가능성이 있죠.”
“정, 정말인가요?”
“아무렴 대한민국 검사가 공수표를 남발하겠어요?”
도수가 던진 당근의 효과가 나타나기 직전이었다.
그 순간, 동생의 손바닥에 적힌 글귀가 번뜩 떠올랐다.
‘검찰 조사, 묵비권’
“피고인은 공판 준비 기일에 자신이 운전했다고 시인했죠?”
“...”
“그렇다면, 왜 이전에 범행을 부인했나요? 강 변호사가 시킨 거죠?”
“...”
“자, 상태 씨. 처음부터 다시 시작합시다. 피고인이 운전한 사실을 인정하나요?”
“….”
“야, 인마. 너 벙어리이냐? 지금 나랑 기 싸움 하자는 거냐?”
“….”
“이 새끼야. 네가 운전했고 강지상이 교사했잖아!”
상태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도수는 지쳐서 소리쳤다.
“교도관님, 이 자식 유치장에 처넣으세요!”
그는 며칠 동안 검찰청에 출두했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형사는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지고, 교도관은 세어 조지고, 재소자는 먹어 조진다’는 말이 있다.
물론 죄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그만큼 불안하고 괴롭다는 의미이다.
“피고인의 자백을 받지 못했으니, 유죄의 증거가 없고… 강 지상의 혐의 입증에 실패했으니 변호사법 위반으로 기소할 수도 없고… 부장님께 뭐라고 보고하나. 큰소리친 성과가 하나도 없으니.”
부장검사실 문 앞에서 도수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거렸다.
심 판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윤철의 전화였다.
“도로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다니, 어떻게 된 거야?”
“말도 마세요. 지금 내 코가 석 자에요.”
그는 상황을 설명한 후 자신감 있게 말했다.
“선배님,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요.”
“나는 전적으로 자네를 믿겠네.”
상태의 자백으로 잔칫집 분위기였던 태양과 도원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전환되자 비상이 걸렸다.
다음 날, 서울중앙지검 포토 라인에 지상이 서 있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이 재판이 다시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리고 강 변호사님이 재선임되었다는데 맞습니까?”
“재판장님의 현명한 결정에 감사드립니다.”
“강 변호사님이 피고인에게 거짓 진술을 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그런 일은 없었으며, 그것은 가짜 뉴스입니다.”
“피고인이 지금까지 무죄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범행을 인정한 이유는 뭡니까?”
“그 배경에는 누군가의 개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누군가는 누구를 지칭하는 거죠?”
지상은 차마 상태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재판에서 변호인의 능력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어제 검찰 조사에서 피고인은 줄곧 묵비권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강 변호사님이 시킨 건가요?”
“확실히 말씀드리지만, 묵비권이 아니라 진술거부권입니다. 이는 피고인의 권리로, 헌법 제12조 2항에 ‘모든 국민은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않는다’고 명시된 자기 방어권입니다.”
“오늘 강 변호사님이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될 수도 있는데요?”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할 수 있는 이유가 있나요?”
“네, 우리 의뢰인이 제가 교사했다고 진술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변호사법 위반을 인정하지 않는 건가요?”
“이 사실을 증명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제가 재판에서 우리 의뢰인이 무죄임을 입증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혐의를 벗게 되겠죠.”
“맞습니다. 그럼 저는 잠시 검찰에 소풍을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진실은 법정에서 반드시 드러날 것입니다.”
그와 김 검사는 마주 앉았다. 지상은 과거에는 푹신한 회전의자에 앉았던 자신이 지금은 주객전도가 되어 접이식 철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으려던 계획이 무산된 도수는 이번 조사에 사활을 걸었다.
“오랜만에 검찰청의 공기를 마시니 새롭네요.”
“선배님의 검사 시절 무용담은 잘 알고 있습니다.”
“내 전설이 후배님의 귀에도 전해졌나 보군요.”
“그런데 이게 무슨 꼴입니까? 아무리 승소가 중요하다고 해도 법을 어겨서는 안 되죠. 오늘 집에 못 갈 수도 있습니다. 아시죠?”
김 검사는 기선을 제압하려 위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어? 이 녀석, 바로 협박으로 나오네.’
“저, 후배님. 차 한 잔 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드려야죠.”
도수는 커피를 타서 그의 앞에 놓았다.
“저는 커피에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둥굴레차로 주시면 좋겠네요.”
“이게 뭐야? 내가 저 인간의 비서냐, 시다바리냐.”
도수는 구시렁거리며 두 번이나 서비스를 해야 했다.
“그래도 한때 검찰 선배였으니 살살 조서를 받죠.”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소환한 거요? 참고인으로 왔다가 피의자가 되는 거요?”
“에이, 선수끼리 왜 그러세요? 피고발인이니 당연히 피의자죠.”
“그럼, 난생처음 전과 기록이 생기겠군요. 우리나라 사법 체계는 이게 문제요. 세계에서 고소, 고발장이 가장 많은 나라에서 거기에 사건 번호가 찍히면 무혐의가 되어도 빨간 줄이 남잖아요. 또 그 처분 결과를 모르는 사람들은 무조건 색안경을 끼고 보니 말이요.”
“그만하시죠. 지금 선배님은 검찰청에 강사로 초빙된 게 아니라 피의자 신문 조서를 받으러 온 겁니다.”
“아, 미안해요. 주홍 글씨가 새겨진다니 울컥해서요.”
“피고인이 모두 이실직고했어요. 강 변호사님이 거짓 진술을 시켰다고요. 그러니 깔끔하게 시인하시죠? 그러면 불구속 구공판으로 넘길게요.”
‘불구속 구공판’이란 구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재판에 회부되는 것을 의미한다.
“후배님의 배려는 눈물 나게 고맙지만, 그걸 인정하는 순간 저는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되거든요. 그래서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네요. 피고인의 자백 진술로 영장을 청구할 수밖에요.”
“아, 그래요? 그럼, 그 진술조서를 보여주거나 피고인과 대질 신문을 할 수 있겠죠?”
“...”
“이만 저는 집에 가도 될까요? 가스레인지 불을 끄지 않고 나와서 빨리 가야 해요.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화재보험이라도 들어둘 걸 그랬네요.”
냉큼 나가는 지상을 김 검사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국 사생결단의 시도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이번에 두 사람을 꽁꽁 엮겠다고 부장님께 장담했는데… 이제 요직인 특수부로 가는 건 물 건너갔네.”
‘꽝! 꽝! 꽝!’
책상이 부서지는 소리가 복도까지 퍼졌다. 이로써 상아에서 상태와 지상으로 이어진 이틀 간의 전술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