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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선정 - 1

by 이인철

연우가 법원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9시 30분이었다. 로비 정면에는 정의의 여신상이 오른손에는 수평 저울을, 왼손에는 법전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저울은 공정한 재판을, 법전은 법에 따라 판결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연우는 이전에 본 서양의 정의의 여신상과는 다른 점을 발견했다. 서양의 여신상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었지만 반면에 우리나라의 동상은 눈을 뜨고 있었다.

연우는 서양의 여신상이 눈가리개를 하고 있는 이유를 선입견과 주관이 개입되면, 정의를 해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손으로 동상의 눈을 가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하면 기울어짐 없이 공평한 재판이 이루어질 거야.”

대법정 게시판에는 ‘국민참여재판 개정’ 공고가 붙어 있었다.

검색대에서 가방 검사가 진행되었고, 한 아가씨의 가방에서 음료병이 나왔다. 직원이 그 병을 압수하는 것을 보아하니, 병류는 반입이 금지된 것 같았다. 후보자 명부와 신분증 대조를 통해 본인 확인을 마친 사람들은 법정으로 들어갔다. 벽과 집기들은 어두운 원목으로 권위와 무게감이 느껴졌다. 특히 법대는 매우 높아 보였다.

오른편에는 검사석이, 그 옆에는 배심원석이, 왼편에는 변호인석이 있었다. 변호인석 위에는 대형 모니터가 설치되어 있었다.

연우는 12번 배심원 후보자 명찰을 받았다. 직원의 호명에 따라 순서대로 방청석에 앉았다. 자리에는 ‘배심원 선정 절차 안내서’가 놓여 있었다. 후보자들은 배심원 역할을 설명하는 비디오를 시청했다. 시청이 끝나자, 재판장과 두 명의 배석 판사가 들어왔다. 재판장은 후보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피고인과 아는 관계인 후보자는 불공정한 판단을 할 우려가 있으므로 제척 사유가 됩니다. 이에 해당하는 후보자는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연우는 압박감이 가슴을 조여오는 것을 느꼈다. 방청석은 조용했다.

“그럼 없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저는 심재평 판사입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시간을 내어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배심원 선정을 시작하겠습니다. 1번 후보님, 유죄라는 심증이 있지만 물증이 없을 때 유죄로 해야 할까요? 무죄로 해야 할까요?”

“저는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2번 후보님의 의견은 어떻게 되나요?”

“저는 유죄라고 봅니다.”

“3번 후보님은요?”

“결정을 내리기가 정말 어렵네요.”

“사건의 사안에 따라 다를 수 있으니, 정답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4번 후보님은…”

후보자들의 자질을 평가하기 위한 질문이 이어졌다.

“오늘 후보자들은 배심원으로서 손색이 없네요.”

직원은 작은 통에서 10장의 번호표를 꺼내 재판장에게 전달했다. 번호가 호명되었다. 12번은 없었다. 호명된 사람들은 배심원석으로 이동했다. 실망한 연우는 지상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에 뽑히지 않아도 괜찮아. 기회는 계속 있으니까. 그리고 기어이 내가 만들어낼 거야.”

“검사와 변호인은 배심원 선정을 하세요.”

“30번과 42번을 기피 합니다.”

“저는 9번을 제외하겠습니다.”

지명된 사람은 방청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직원은 다시 3장을 꺼내 재판장에게 건넸다. 이번에도 12번은 없다. 연우는 초조해졌다. 심 판사가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시다시피, 무이유 기피 신청은 5명까지만 가능합니다. 신중하게 선정해 주세요.”

배심원이 9명인 국민참여재판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이유를 불문하고 최대 5명까지 선정을 거부할 수 있다. 그런데 지상은 훨씬 더 불리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석낙은 TF팀의 정보를 바탕으로 부적합 후보자를 제외할 수 있었지만, 그는 선택에 깊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찰과 변호인의 질문 순서가 돌아왔다. 먼저 석낙이 포문을 열었다.

“27번 후보님, 아기가 배고파 울고 있는데 엄마가 돈이 없어 분유를 훔쳤다면 처벌해야 할까요?”

“그래도 법은 지켜야죠.”

“5번 후보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처음이라면 용서해야죠. 아기가 불쌍하잖아요.”

젊은 남자의 냉정함에 중년 여자가 안쓰럽게 말했다. 후보자들의 의견은 처벌과 관용으로 나뉘었다.

“검찰은 5번과 35번을 제외합니다.”

“변호인은 27번을 기피하겠습니다.”

직원은 3장을 꺼냈다. 또다시 12번은 없었다. 연우는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속내를 숨긴 지상도 마찬가지였다.

“7번 후보님, 혹시 가족이나 친척, 지인 중에 교통사고 피해자가 있나요?”

“네, 작년에 외삼촌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갑자기 지상은 말을 재촉했다.

“22번 후보님은요?”

“저는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15번 후보님은요?”

“얼마 전 친구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어요.”

“잠깐만요. 변호인,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석낙이 즉시 제동을 걸었다.

“재판장님, 변호인은 유도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재판은 교통사고 사건입니다. 따라서 교통사고 피해자가 없는 후보는 피고인 측에 유리하고, 검찰 측에는 불리합니다. 변호인은 이를 교묘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정합니다. 변호인은 후보님의 사생활에 관한 질문을 삼가세요.”

“네.”

‘저놈 빠꼼이네. 벌써 낌새를 챘군.’

심 판사의 경고에 멋쩍은 지상은 나름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했다.

“더 기피 신청이 있나요?”

“검찰 측은 없습니다.”

석낙은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반면 지상은 남은 기피를 모두 써서라도 연우를 선정해야만 했다. 신중을 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나고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변호인도 없나요?”

“7번과 15번을 제외합니다.”

교통사고 피해자가 있는 후보자들이다. 직원은 2장의 꺼내 재판장에게 주었다. 이때 연우는 두 손을 모으고 자신이 아는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님, 제우스님. 제발, 제발요….”

심 판사가 번호를 호명했다. 역시나 12번은 없었다. 연우는 모든 신을 원망하며 절대 신앙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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