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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공 Dec 26. 2022

인연

인연도 진화한다

그녀는 옷걸이가 좋아, 어느 옷이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한 복이라도 입을라치면, 활짝 편 잠자리 같고, 연분홍 진달래처럼 근사했다.

걸음걸음마다 사뿐사뿐 속적삼에 비치는 우윳빛 살결은 눈이 부셨다.

살랑살랑 젓고 가면,  한들한들 청초한 코스모스가 바람에 흔들리는 듯했다.

첫 그때, 만남 그날 첫눈에 반했던 설렘은 마음을 다 퍼주어서 핑크빛 순정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어느덧 30여 년 세월이 흘러온 지금 생각해보니 세월이 너무 빨라 아쉽기만 하다.

아이들 키우랴, 직장 다니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 아이들은 훌륭히 컸고 집도 마련하고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요즘은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 퇴직하고 쉬지 않고 또 일하러 나가는데 아내는 늘 바가지를 끍고, 심지어는 툭하면 이혼하자고 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별로 이혼당할 짓을 하지 않았는데 불구하고 그럴 때이면, 애당초 무엇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고 싶다.

예전에 그렇게 아름답고 고우며, 부드러운 이미지와는 전혀 딴 판이다.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다.

매일같이 긴장의 연속이다.

계속 아내의 기분이나 감정 등 눈치를 봐야 하니, 일동은 혹시 눈이 가자미나 도다리 같이 옆으로 보는 곁눈이 되지 않았나, 거울을 유심히 보는 버릇까지 생겼다.

한편으로는 어떻게 하면 마주치지 않을까 하는 방편도 생각해 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서로 마주치지 않는 게 급선무다. 그러면 싸울 일도, 감정 상한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맞는 가?

무언가 몰라도 잘못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내 인생을 내 의도대로 사는 게 아니고, 타의에 끌려 다니는 나 자신을 보는 것 같다.



"갱년기가 뭐냐?"

"하하하! 갱년기도 모른다는 말이야? 대체, 여태까지 어찌 살았니?"

"어찌 살긴, 가족을 위해 충성을 다해왔지."

"누구나 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그럼, 뭐야?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거야!"

"부인에게 잘리지 않는 게, 신기하네..."

일동은 잠자코 듣기만 했다.

"남자들은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만, 여자들은 민감하고 심각한 거야."

"......."

"심하면 우울증까지 와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대."

"......."

"책도 좋고, 스님도 좋지만 무엇보다 부인에게 더욱더 잘해줘야지..."

일동은 절친과 동네 소주방에서 술 한 잔 하며, 속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사실이지, 여태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

그런데 진작 정년퇴직하니 찬밥 신세에다 눈칫밥까지 먹고 사니, 이건 아니다 싶다.

도대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진정 잘 사는가 회의적이기까지 했다.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게, 죄라면 죄다.

어떻게 보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아내가 어떨 때면 서운하고, 요즘 더욱더 그렇다.

그렇다 보니 원인이 뭔지도 알아야겠고, 뭔가 돌파구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운 절친을 만나, 속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했지만 그리 시원하지는 않았다.

절친은 내가 문제라고 하며, 아내에게 잘하라고 말했다.

오히려 위로를 받으려 했던 나 자신이 잘못 생각을 했다.

한 숨을 쉬며 집으로 들어오다, 다시 한때 잘 가는 잔술집에 가서 한잔 더했다.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왠지 집에 들어오기가 싫었다.



"어머나! 자기~  자기가  웬일이야? "

"......."

"1년 만이네, 그동안 소식도 없이....."

"소주나  한병!"

"오케이~"

일동은 머릿속이 복잡해서 시원하게 술 한잔 들이켜고 다시 생각을 해봤다.

그리고 앞서 퇴직해서 나간 선배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선배는 정년 이후의 삶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애당초, 선배의 꿈은 퇴직하고 노후생활을 부인과 함께 시골에서 전원생활 하며 살아가는 것이었다.

자식들 결혼 다 시켜 놓고, 정년 이후 생활은 부부간 주말농장에 가는 일상으로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런데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지금은 부인과 이혼하고 혼자서 고독하게 살고 있다.

문제의 발단은 노후생활을 위한 퇴직 일시금을 아들 사업자금으로 주겠다고 부인이 뜬금없이 말했었다.

그러나 선배는 남은 것이라고는 퇴직금인데, 그것을 주면 부부는 어떻게 살아가냐고 반대를 했다.

선배는 부모로서 자식들에게 결혼비용, 집 마련 등 해줄 것은 다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인은 이혼하고 위자료라도 받아, 그 돈이라도 아들에게 줄 생각이었다.

선배는 그때가 가장 슬프고 서러웠다고 했다.

부인에 대한 예전의 정도 없어지고, 오로지 자식만을 위해 살고 있는 부인이 원망스러웠다.

도대체 아내와의 사랑은 어디까지이고, 진실한 사랑이었나 반문하고 싶었다.

요즈음은 두문불출하기에, 일동과도 만나지 못하고 자신의 건강까지 악화일로 치닫고 있었다.

그 선배 생각을 하니 한 숨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자신도 지금 처지가 그 선배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꼈다.

일동은 또 소주 한 병을 더 시켜, 맥주잔에 가득 붓고는 쭉 들이마셨다.



"스님! 부처님께서 부부간에 법도를 따로 설하신 적이 있습니까?"

"꼭 그런 것은 없지만, 부부간에는 서로 존중하고 예의 바르게 표현해야 한다고 봐요."

"어떻게요?"

"부부의 인연이 된다는 게 보통일이 아니에요. 전생의 인연이 되었는데, 또 이렇게 만난 거예요."

"전생의 인연?"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인연이에요.

이러한 인연은 몇 억겁 년의 세월이 지나도 이루어지기가 정말 어렵고, 특별한 인연이라 할 수 있어요.

부부로 만나고, 자식을 낳고 자식과의 인연, 후손까지 이어지는 인연이 된다면 그야말로 대단한 거죠."

"그렇다면 현생은 최상의 인연으로 만났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고, 부처님이 맺어 주었고, 조상님, 부모님 모두가 맺어 주었지요."

스님은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일동 거사님! 석가모니가 설하셨습니다. 가족에게 감사의 절을 하세요.

가족들 중에서도 아내, 즉 어머니는 더욱더 존중받아야 합니다.

자식을 한 번 낳을 때까지 서말 닷되의 피를 흘리고 그 자식을 기를 때는 7 섬의 젖을 먹여 키운다고 했어요.

이 얼마나 거룩하고 숭고한 일이며, 위대한 희생정신이 아니고 뭐겠어요. 그래서 석가모니는 그랬죠.

부모은중경을 외우면 부처님을 보는 것이니, 나를 친견하는 거와 다를 바 없다고 했어요.

매장문화가 한창일 때 사람이 죽고, 매장 남자를 확인해보면 남자는 뼈가 있지만, 여자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지요. 그만큼 자식에게 골수를 다 뺏겨 버렸으, 뼈가 있을 리가 없지요."

일동은 갑자기 숙연해졌다.

"일동 거사님! 처음에는 부부의 인연으로 만났지만, 지금은 부모의 인연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부모는 하늘이요, 해와 달이고, 자식은 땅이요, 산천초목이지요.

각자의 인연대로, 아버지는 아버지 도리, 어머니는 어머니 도리, 자식은 자식 도리를 다해야겠죠.

요즘은 부모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불확실하고 혼돈의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아버지의 자리는 하늘같이 보여야 합니다.

하늘이 청명하면 높게 보이고 우러러 보이는 이치와 같은 거지요."

스님이 잠깐 말을 멈추고, 부처님이 설하신 '부모은중경'을 들려주었다.


"아기를 열 달 동안 품어주신 은혜(회태수호은)

낳으실 때 모든 고통 참아내신 은혜(임산수고은)

아기 낳고 모든 시름 잊어버린 은혜(생자망우은)

맛난 음식 가려주셔 먹여주신 은혜(인고토감은)

마른자리 젖은 자리 가려주신 은혜(회건취습은)

젖 먹이며 다독거려 키워주신 은혜(유포양육은)

더러운 것 마다하지 않고 씻어주신 은혜(세탁부정은)

집을 떠나 먼길 가면 염려하신 은혜(원행억념은)

자식 위해 무릅쓰고 악업 지은 은혜(위조악업은)

칠십 노인 자식까지 걱정하는 은혜(구경연민은)"


스님은 부모은중경을 마치고, 조용히 자리에 일어나 법당으로 갔다.

일동은 스님의 말씀을 듣고, 아내와의 인연에 다시 한번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이렇게 주문을 외며 빌었다.

아내에서 동반자로, 영원한 친구로, 지극한 사랑으로 피고, 또 피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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