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암, 유방암, 대장암은 들어봤어도 육종암은 뭐람. 평범한 걸 싫어하는 나를 위해 병도 알아서 희귀병이 찾아왔구나. 남들은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인데 나만의 새로운 글감이 생겨서 좋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웃겨 피식 실소가 나왔다.
종양내과 교수님은 아직 국내에 육종암 치료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니라면서, 일단 일반 항암제로 치료를 해보고 효과가 없으면 다른 항암제로 바꿀 거라고 말씀하셨다. 또, 나의 경우 종양이 머리, 턱, 허리, 엉덩이 등 여러 곳에 전이된 상태라 항암치료를 해도 완치는 쉽지 않을 거라고 덧붙이셨다.
교수님의 설명을 듣고 나서 육종암의 발병 원인은 무엇인지, 생존율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증이 생겼지만 굳이 알아보려고 노력하지는 않았다. 괜한 정보에 휩쓸려 마음만 심란해질 것 같으니 그저 단순하게 ‘교수님이 하라는 대로 꾸준히 치료를 받으면 차도가 보이겠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항암치료를 위한 입원 날짜가 정해진 후 나는 동네 미용실로 향했다. 항암제 부작용으로 탈모 현상이 나타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애초에 머리를 짧게 자르고 병원에 가기로 한 것이다. 늘 중단발을 유지하다 처음으로 까까머리를 한 내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덕분에 두상이 예쁘다는 나의 몰랐던 장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짧아진 머리 말고도 크게 달라진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먹는 즐거움이 고통으로 바뀌었다는 것. 이전의 나에게 ‘사는 낙’은 곧 ‘먹는 낙’과도 같았다. 일이 끝나면 배달 앱을 켠 뒤 무엇을 먹을까 행복한 고민에 빠졌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스트레스를 훨훨 날려보냈다. 어느 날 사는 게 무의미하다고 털어놓은 나에게 친구가 “그래도 세상엔 맛있는 게 참 많잖아? 곱창도 먹고 불닭도 먹으려면 계속 살아야지!”라고 말했는데, 그 말이 납득이 가고 위로가 될 만큼 먹는 즐거움은 나의 삶에 있어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항암치료 후, 입안이 헐어 음식을 씹고 삼키기 어려워지면서 즐거웠던 식사 시간은 고단한 노동 시간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입이 크게 벌어지지 않아서 윗니와 아랫니 사이로 음식을 쑤셔 넣는 것부터가 힘겨운작업이었다. 밥 한 끼를 먹는 데 2~3시간이 걸렸고 아침, 점심, 저녁을 먹으면 하루가 다 지나갔다. 저작 운동에 온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나에게 식사 시간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시도 때도 없이 TV에 나오는 먹는 장면은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고기가 부드러워서 먹기 덜 불편했던 수육
사실 죽만 계속 먹으면 식사 시간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는다. 씹을 것이 없어서 먹기에도 편하고, 금방 식사를 마칠 수 있어 쉴 수 있는 시간도 많아진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했다. 죽말고 다른 음식도 먹어야 좀 더 다양한 영양소(특히 단백질)를 섭취할 수 있고 그게 몸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에, 많이 씹어야 하는 음식도 기꺼이 먹으려고 노력했다. 음식을 먹을 때는 잘게 잘라 먹어야 해서 가위가 필수품이었는데, 휴대용 식가위를 사서 들고 다닐까 진지하게 고민을 하기도 했다. 몇 시간이 걸리든 그야말로 살기 위해 처절하게 먹었다.
비록 먹는 일이 고되기는 했지만 그 안에서 나름대로 즐거움도 찾았다. 먹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음식에 도전해 성공했을 때,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을 새로 발견했을 때 큰 기쁨을 느꼈다. 세 번째 항암치료가 끝나고 의료진의 판단에 따라 항암제를 바꿨는데, 이후에는 다행히 입안이 허는 부작용이 없어져서 먹는 즐거움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다. TV에 나오는 ‘먹방’에 대한 거부감 또한 사라진 덕에 넷플릭스의 요리 예능 <흑백요리사>도 남들처럼 흥미진진하게 시청할 수 있었다. 눈과 입으로 미식의 세계를 탐험하는 요즘,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 편히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