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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Sep 27. 2020

[원서 서평] 『피라네시』, 수잔나 클라크

미궁에서 홀로 살아가며 미치(지 않)는 방법에 대하여

"나"는 저택에 살고 있다. 저택은 끝없는 홀과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벽은 다양한 크기와 모양새의 대리석상이 장식하고 있다. 거대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끝이 보이지 않는 크기의 저택은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하층의 방은 어디선가 흘러들어오는 해수로 침식되어 있고,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 상부층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구름이 뭉쳐 비를 내린다. 해수는 주기적으로 지하와 중간층을 잇는 계단을 넘어 올라와 거대한 파도가 되어 중간층을 침범한다. 하늘의 새들은 중간층의 대리석상 사이에 둥지를 짓고 살아간다.


"나"는 지하의 해수가 제공하는 물고기를 낚시해 먹고, 빗물을 받아 마시며 저택에서 일어나는 일을 꼼꼼히 일기에 기록한다. 벌써 10권이 넘어가는 일기장은 어느새 목차까지 완성되어 일기이자 저택에 대한 사전의 역할도 겸하고 있다. 일기의 내용에는 언제 지하의 어떤 방에서 파도가 중간층으로 범람할지, 상부층에서 보이는 하늘의 별자리가 어떠한 모양새인지, 알바트로스 부부가 언제 나타나 둥지를 지었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作, 《Carceri d'Invenzione》(1750) [출처: Wikimedia Commons]


그리고 매주 화요일, 목요일마다 "나"는 "타인(Other)"과 모여 한 시간 정도 회의를 한다. "타인"은 "나"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저택에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저택의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데, "나"에게 어떤 방에 가서 사진을 촬영하거나, 별자리의 모양새를 기록해 달라는 등의 자잘한 부탁을 한다. "타인"은 몹시 친절해, 내게 일기를 쓰기 위한 공책과 연필을 사다 주거나, 내 신발이 낡아 구멍이 나면 새로운 신 구해다 준다.


"타인"은 "나"를 피라네시라고 부르지만, 왠지 "나"는 피라네시가 "나"의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저택에는, 적어도 "내"가 탐험할 수 있었던 범위 안에는, 총 15명의 인물이 존재한다. 둘은 당연히 "나"와 "타인"이며, 그 외에 13개의 시체가 존재한다. "나"는 16번째 인물을 찾아다니고 있다…


『피라네시』의 작가 수잔나 클라크는 2004년, 800페이지에 가까운 환상소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을 출간하며, 단순히 장르문학을 넘어 영미 문학계에 엄청난 충격을 주며 등단하였다. 지금도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독자의 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소설은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이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의 세계에는 항상 마법이 존재했고, 영국에는 특히 마법의 기운이 강했는데, 어느 순간 세계에서 마법이 사라져 버렸다. 19세기, 나폴레옹이 유럽을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영국을 향해 눈을 돌렸을 때, 문득 마법이 다시 깨어난다. 2015년 BBC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인기를 끈 이 소설은 신인 작가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완숙한 필력과 너무나도 매혹적인 설정으로 출간과 동시에 그 작품성이 환상 문학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순위권에 들어갈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클라크는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을 약 10년 동안 집필하였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작품 하나하나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경향을 보여준다. 또한 개인적인 건강문제까지 겹쳐, 그녀의 열성 독자들은 늦어지기만 하는 차기작에 대한 소식만을 오매불망 기다려왔다. 15년이 지난 2019년 9월, 그녀의 출판사 블룸즈버리는 클라크의 차기작 『피라네시』를 발표하였다.


『피라네시』는 800페이지에 가까웠던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을 즐겼던 독자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작품일 수도 있다. 작가 본인이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의 후속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종종 인터뷰를 해왔는데, 전혀 다른 세계관을 다루고 있으며, 내용 또한 300페이지를 넘어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라네시』는 완벽에 가까운 환상소설이며, 이제 막 두 번째 작품을 출간한 클라크가 작가로 어떠한 주제를 파고드는지,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지오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 作, 《Carceri d'Invenzione》(1750) [출처: Wikimedia Commons]


『피라네시』의 배경과 설정은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에서도 어느 정도 보여주었던 고딕 스릴러(Gothic Thriller)적인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한다. 고딕 스릴러 장르에서는 그 이름에서도 보이듯이 건축물과 디자인 등이 서사와 작품의 분위기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데, 『피라네시』에서는 아예 저택 자체가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작품 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클라크는 전작에서 의도적으로 작품의 배경인 빅토리아 시대의 영어를 패스티(pastiche)하여 문체를 구성하였는데, 전혀 시대와 배경이 다른 본 작품에서는 비교적 몹시 담하고 직관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장 사이에 살아있는 힘과 흐름은 책을 한번 잡으면 내려놓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며, 이는 클라크가 패스티시 같은 기믹만을 사용하는 작가가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제목과 설정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실이지만 클라크는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이자 판화가인 조반니 바티스타 피라네시의 판화에서 영감을 받아 『피라네시』를 집필하였다. 또한 책을 읽어가면서 피라네시의 작품만큼 조르조 데 키리코의 작품들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소설의 환상적인 배경이 바로 눈 앞에 그려지는 시인성 넘치는 필력이 몹시 인상적이었다.


조르조 데 키리코 作, (左) 〈The Red Tower〉(1913), (右)〈Le mauvais génie d’un roi〉(1914) [출처: Wikimedia Commons]


서사적으로 직접적인 관계는 없지만 (다만 어느 순간 두 작품이 같은 세계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라크는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과 『피라네시』에서 몇 가지 공통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장 직관적으로 다가오는 주제는 이성(sanity)과 광기(insanity) 사이의 경계선이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에서 마법을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스승인 노렐에 반발한 주인공은 더 큰 마법적인 이해를 얻기 위하여 일부러 본인을 광기로 몰고 가는 등의 행동을 보여준다. 마법은 불가해한 개념이며, 그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기가 필요하다는 서사는 참신한 설정은 아니지만, 클라크 이전에 그녀처럼 매혹적이고 세련된 수준으로 풀어낸 작가는 없었다고 자신 있게 평할 수 있다. 『피라네시』 또한 기본적으로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에서 나오는 '다름(Otherness)', '다른 세계(Other Worlds)'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에서 느슨하게 전작과 이어지는 설정을 보여준다.


클라크가 파고드는 또 따른 주제는 메타텍스트(metatext)의 존재이다.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은 각주의 형태로 약 200개의 허구의 서적을 인용한다. 어떤 각주는 아예 하나의 단편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 내용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각주는 허구 서적의 제목과 작가명만을 인용한다. 이러한 각주는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독특한 특징인데, 작품 내적으로는 서사에 깊이와 개연성을 더하기도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독자가 읽고 있는 내용이 과연 허구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다.


물론 독자는 이성적으로는 세상에 마법이 존재하지 않으며, 소설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당연히 인지하고 있지만, 소설의 세계 안에서는 허구의 서적의 제목과 페이지 번호, 해당 서적에 대한 작품 내 서평을 존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구조 및 서사 형태를 통해 독자는 마치 논문을 읽는 마음가짐으로 소설을 읽어가게 되며, 이는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 독서 경험을 대단히 특이하게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피라네시』 또한 조나단 스트레인지와 마법사 노렐만큼은 아니지만 메타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마치 알고서도 최면에 빠지는 듯한 효과를 불러온다.


물론, 분량이 짧은 편이기도 하지만, 『피라네시』는 책을 편 순간 끝까지 멈출 수 없을 정도의 흡입력을 자랑한다. 300페이지에 가까운 소설을 단 한번도 멈추지 않고 끝낼 수 있었는데, 심지어 중간 중간에 휴대폰 화면을 보는 것도 아쉬울 정도로 완전히 텍스트에 사로잡힌 독서 경험은 정말 오랫만이었다. 단 두 개의 장편 소설만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잔나 클라크가 환상 문학계의 살아있는 거장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작품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자명하게 다가온다. 이제 독자들은 수잔나 클라크 여사가 오랫동안 장수하여 책을 한권이라도 더 발표해주기를 기다릴 뿐이다.


(끝)


『Piranesi』(2020), Susanna Clarke

https://www.goodreads.com/book/show/50202953-pirane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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