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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Oct 26. 2020

[원서 서평] 『골렘과 지니』, 헬렌 웨커

흙으로 만든 골렘, 불꽃에서 태어난 지니의 19세기 말 맨해튼 탐방기

19세기 말, 폴란드. 한 젊은 유대인 가구상이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를 탄다. 대서양 한가운데, 고열에 시달리던 가구상은 소스라치듯 한밤 중에 깨어난다. 그는 짐칸으로 달려가 자신의 짐 중 가장 커다란 상자를 연다. 안에는 키가 몹시 크고, 아름답게 생긴 여인이 숨도 쉬지 않고 누워 있다. 가구상은 여인, 아니, 흙으로 골렘을 만들어 준 카발라 수도승, 예후다 샬만이 건네준 쪽지를 펼쳐 "골렘을 깨우는 법"을 소리 내어 읽는다.


골렘이 눈을 뜨자마자 본 것은 고열에 시달리는 자신의 주인이었다. 주인이 입을 열지 않아도 골렘은 자신이 깨어난데 대한 놀라움, 카발라 수도승에게 속지 않았다는 안도감, 배 속을 찌르는 듯한 고통 모두를 알아챌 수 있다. 골렘은 주인을 지키고, 모시기 위한 목적 하나만을 위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골렘을 깨운 주인은 곧 고열로 실신하고,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린다. 태어나자마자 주인을 잃은 골렘은 부지불식간에 배 전체에 있는 사람들의 염원과 두려움이 자신에게 몰려오는 것을 알아차린다. 삶의 목적이었던 단 한 명이 사라졌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모두의 바람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인 없는 골렘 여인을 태운 배는 뉴욕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한 상냥한 유대인 랍비의 도움으로 골렘은 사람처럼 변장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배운다. 랍비는 골렘에게 "아바(Chava)"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맨해튼 남부, 시리아와 레바논 등 레반트 지역 출신의 정교회 이민자들이 모여 살고 있는 리틀 시리아. 작은 주석 공방을 운영하고 있는 부트로스 아빌리는 리틀 시리아의 간판 카페의 주인 마리암 파둘이 수리를 위해 맡기고 간 작은 플라스크를 고치다가 마치 번개에 맞은 듯한 충격과 함께 날아간다. 정신을 차린 아빌리의 눈에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미남이 나체로 공방 바닥에 뻗어 있는 모습이 들어온다.


사막 한가운데의 아름다운 유리성에 살고 있던 지니는 본인이 어째서 몇 세기 동안 플라스크에 봉인되었는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그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철로 만든 팔찌가 다른 모습으로 마음대로 변신할 수 있는 지니의 능력을 억제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지니의 정수는 불꽃이기에, 그는 열을 조종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주석 세공에 사용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부트로스 아빌리는 지니에게 파트너십을 제안하고, 그에게 "아마드(Ahmad)"라는 이름을 선물한다.


각각 다른 전설에서 태어나 19세기 말 뉴욕에 도착한 골렘과 지니는 모두가 잠든 밤, 잠을 자지 못해 산책하던 중 서로와 마주친다. 골렘의 눈에 지니의 얼굴은 타오르는 불처럼 보이고, 지니의 눈에 골렘은 흙으로 정교하게 빚어진 인형으로 보인다. 지니는 골렘에게 "너 도대체 뭐야?"라고 묻고, 자신의 정체가 간파당했다고 느낀 골렘은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간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2013년 출시된 『골렘과 지니 (The Golem and the Jinni)』는 작가 헬렌 웨커(Helene Wecker)의 등단작이다. 근현대의 뉴욕을 살아가는 전설 속의 존재라는 설정은 웨커의 서정적인 문체 및 철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1800년대 말 뉴욕의 생활상 고증과 더불어, 500페이지가 되는 짧지 않은 이 소설에 매혹적인 분위기와 흡인력을 부여한다.


출판과 동시에 사변 소설계를 대표하는 문학상인 네뷸라와 월드 판타지의 소설 분야에 최종 후보로 오르고, 미쏘피익(Mythopoeic) 상을 수상하면서 환상 문학계의 슈퍼 루키가 된 작가 헬렌 웨커는 이 소설을 쓰는데 총 8년이 걸렸고, 그중 2년은 도서관에 틀어박혀 자료조사에만 집중했다고 밝힌다. 이러한 준비를 통해 작가는 두 신화 속 존재가 살아가고 있는 지저분하고, 위험하면서도, 강한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지닌 뉴욕의 모습을 페이지 속에 가두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의 성공의 반은 믿을 수 없는 주인공들이 믿을 수밖에 없는 19세기 말 뉴욕의 낮과 밤을 살아가는 모습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타인의 생각을 읽고 도울 수 있도록 설계된 순종적인 골렘과, 한 곳에 묶여 있지 못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지니의 성격의 대비 또한 서사를 끌고 가는 하나의 주제로, 모든 면에서 달라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하는 둘의 관계 또한 독자를 미소 짓게 만든다. 다만 이러한 인물적 관계가 서사 장치로만 사용이 되고, 조금 더 집요하게 탐구되지 못해 시대를 관통하는 통찰력이 결여된 부분은 아쉽게 느껴진다. 웨커는 현재 『골렘과 지니』의 후속작인 『철의 계절 (The Iron Season)』을 집필하고 있는데, 제목을 보면 제1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진행되리라 예상되는 이 소설을 통해 이러한 부분을 해결해주지 않을까 기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골렘과 지니』는 마치 HBO TV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매력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소설이다. 세기가 전환되는 시대상(turn of the century)을 초월적인 존재, 인간이 아닌 이방인의 눈을 통해 바라본다는 기발한 기획을 신화적 서사, 인간적 서사 모두를 만족시키는 마무리까지 끌고 가는 글솜씨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끝)


『The Golem and the Jinni』(2013), Helene Wecker

https://www.goodreads.com/book/show/15819028-the-golem-and-the-jin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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