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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Dec 12. 2021

대서사극, 로망스 패러독스

〈호수의 랑슬로〉 × 〈그린 나이트〉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사가 변화하는 동력

2019년, 디즈니가 클래식 애니메이션 〈인어공주〉(1989) 실사 영화 리메이크의 아리엘 역으로 흑인 배우인 할리 베일리를 캐스팅하였음을 공개하자, 전 세계 원작 팬들 사이에서 큰 논란이 일었다. 기실 이 논쟁은 팬덤이 주로 모여있는 SNS와 커뮤니티에서 이루어졌으며, 대형 미디어나 언론에서 진지하게 다루어지지는 않았으나, 많은 팬들은 이 캐스팅 결정에는 21세기에 와서 할리우드를 지배하고 있(다고 믿어지고 있)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 즉 PC가 작용했다고 비난했다. 아리엘의 흑인 배우 캐스팅이 논란을 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첫 번째는 당연히 시각의 이유로, 원작과 다르게 생겼다, 라는 반응이다. 원작의 아리엘은 적발의 백인이고, 할리 베일리는 흑발의 흑인이다. 아리엘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하나의 정형화된 시각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었던 팬들에게는 이질적인 캐스팅이 반가울 리가 없다. 이 논란에 있어서는 굳이 출처를 인용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되며, 이는 호불호의 영역으로 체계적인 분석이 필요한 지점도 아니다.


두 번째는 굳이 분류를 하자면 정치적 올바름, 즉 정치-사회의 이유인데, 영미권에서 '대표성(representation)'이라 표현되는 개념에 관한 논란이다. 흑인 배우를 인어공주로 캐스팅한 이유가 만약 그동안 대중문화의 주인공으로 대표되지 않았던 흑인들의 참여를 늘리기 위한 목적이라면, 또 다른 차별받는 그룹인 적발(진저)의 대표성이 희생된다는 주장이다. '진저 지우기 (ginger erasure)'라는 개념으로 소개되는 이 주장은 (아쉽게도?) 학계나 비평계에서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지는 않으며, 트위터나 레딧과 같은 커뮤니티 포스팅으로 표현되고 있다.


다만, 해당 개념에 대한 적발인들의 반응은 미디어의 오피니언 칼럼에서 찾아볼 수 있다.


2018년, 『요즘 아이들: 밀레니얼 형성기 (Kids These Days: The Making of Millennials』라는 제목의 책으로 작가로 등단한 말콤 해리스는 2014년, 아리엘과 할리 베일리, 진저 지우기가 이슈가 되기 훨씬 이전 『알자지라 아메리카』에 「나를 진저라고 부르지 마 (Don't Call me a Ginger)」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통해 선견지명에 가까운 의견을 표명했다. 해리스는 적발인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과 희화화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끌게 된 계기로 2005년 방송된 〈사우스 파크〉에서 인종 차별과 역차별에 대한 선동에 휘둘리는 대중들을 풍자하기 위해 특정 인종("race")이란 개념 대신 진저("hair color")로 대체했던 〈진저 키즈〉 에피소드를 꼽는다. 에피소드 자체는 〈사우스 파크〉가 항상 그래 왔듯이 굉장히 영리하게 구성되었고 풍자 또한 훌륭했지만, 의아하게도 대중적으로는 카트맨이 에피소드 내에서 '선동'을 위해서 만들어낸 개념인 '진저 놀리기'가 부각되고, 밈으로 남게 된다. 2008년에는 실제 에피소드에 등장했던 '진저 차기 날(National Kick a Ginger Day)'이라는 밈이 만들어졌는데, 이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들에 의해 실제로 적발 학생들에 대한 폭력 사건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 본인도 적발인 해리스는 이러한 형태로 적발도 아니고 소수인종도 아닌 이들이 '적발'을 인종으로 분류한 후, 그들이 〈사우스 파크〉 내에서 겪은 희화적 고통과 멸시를 실제 소수인종이 겪고 있는 고통과 멸시에 동일시하고 있다 주장한다.


〈진저 키즈〉, 〈사우스 파크〉 [출처: Twitter @SouthPark]


해리스의 주장은 적발인들이 역사적으로 차별을 받아왔고, 현대에도 차별의 대상이라는 현실을 무시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소수집단의 희화화가 너무나도 쉽게 다른 소수집단의 희화화로 이어지는 행태를 경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진저 놀리기'는 그 기원 때문에, 놀리는 주체들이 '〈사우스 파크〉 안 봤어? 그냥 장난치는 거야!'라고 자신들의 행동을 변호할 기회를 준다. 그리고 이들은 같은 논리를 다른 소수집단을 차별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한다. '진저들 봐! 저들은 우리가 장난치고 있다는 유머를 이해하잖아!' 이 와중에 〈사우스 파크〉의 〈진저 키즈〉 에피소드가 선동에 휩쓸리면서 다른 소수집단을 차별하는 이들을 희화화했다는 미묘함은 잊히고 만다.


다시 정리하자면, 〈사우스 파크〉의 〈진저 키즈〉는 인종, 외모의 특징을 가지고 타인을 차별하고, 역차별하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논리를 기반으로 전개되는지, 그렇지만 차별 자체가 실제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폭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경고한 우화였다. 쉽게 이야기하면 '진저를 놀리는 이들'을 풍자하는 에피소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우화적 묘사에 집중한 이들에 의해 실제로 진저를 '장난'이라는 구실로 괴롭혀 '진저 놀리기'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이야기는 창작자의 의도와 관계없이 그를 받아들이고 소화해 재창조하는 이들에 의해 변화한다.


물론 해리스의 글 자체는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아리엘 캐스팅 발표 5년 전에 공개된 에세이지만, 흑인 인어공주가 적발 인어공주를 '대체'했기 때문에 '진저 지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주체들이 누구일지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오히려 흑인 배우들이 적발 캐릭터 역할에 캐스팅된 사례만 체리피킹 해서 대표성을 제로섬 게임으로 보이게 만든 의도가 미심쩍다. 물론, 이들이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흑인 아리엘 캐스팅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과정 또한 이야기의 변화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는 적발인들이 역사적,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지 않았다는 주장이 아니다. 적발인은 실제로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현대의 영국까지 핍박의 대상이었다는 기록이 존재하고 있다. 의문이 가는 지점은 가공의 적발 인물들이 계획적으로 흑인 배우로 대체되고 있다는 어젠다가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또는 이를 양보해서 받아들여보자. 할리우드의 창작인들 사이에서 흑인 인물의 가시성을 높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적발인들이 타게팅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는 분석도 가능하다. 문제는 이를 뒷받침하는 거의 유일한 근거가 대부분의 라이트 팬은 이름조차 댈 수도 없는 적발의 코믹스 캐릭터들과 그를 대체한 흑인 캐스팅으로, 캐릭터와 배우의 이름, 자료 출처도 없이 단순히 사진만을 가져다 붙인 선동적 이미지 조합이라는 점이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등지에서 해당 이미지가 결정 증거로 논의되는 모습에서 보이는 확증 편향의 양상이다.


〈인어공주〉 실사 영화의 캐스팅 결정이 작품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실제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PC, 반-PC를 떠나서 이러한 논의 자체는 서사 자체가 변화하는 과정과 제반 상황을 색다른 시선에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인어공주』 원작 작가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은 해당 작품이 프리드리히 드 라 모테 푸케의 『운디네』에서 다룬 물의 정령과 인간의 사랑이라는 주제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밝혔다. 하지만 그는 푸케의 서사에 부족함을 느꼈는지,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나는 푸케의 『운디네』와는 달리, 인어가 영생을 얻는 과정이 환상의 생명체나, 인간의 사랑에 기반하지 않도록 썼네. … 그러한 과정은 너무 우연의 일치가 아닌가? 나는 내가 만든 세상에 그런 기연을 넣고 싶지 않네"라고 설명했다. 즉, 안데르센은 이야기의 원형이 된 『운디네』에서 남편 훌트브란트와의 관계로 인하여 상실을 경험한 결말을 변형해, 인어공주가 자의로 사랑을 포기하면서 왕자와 공주를 축복하고 자신은 승천하는 결말로 바꾸었다.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作, 에드먼드 뒬락 畵 『인어공주』 삽화 [출처: Wikimedia Commons]


물론 이러한 변형의 이유로 안데르센의 양성애 성향과 그가 짝사랑했던 남성 에드워드 콜린의 결혼 등이 연구의 결과로 제시되기는 한다. 관련 서적을 읽다 보면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주장이라 생각되며, 여러 정황상 증거가 제시되고는 있지만, 추측이 아니라 적어도 안데르센 본인이 쓴 글에서 확신할 수 있는 감상은, 그가 『인어공주』의 결말로 외적 기연, 사랑의 힘이 아니라, 내적 성장을 통한 불멸을 희망했다는 점이다. 안데르센은 그가 재창조한 결말을 비극을 이겨내고 초월적인 깨달음을 얻어낸, 어찌 보자면 니체가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포착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에 가까운 결론으로 여겼다.


1985년, 이 작품의 구상을 시작하던 작가 론 클레멘츠는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면서, 다양한 변화를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표면적으로는 비극으로 받아들여지는 결말이었다. 클레멘츠는 개봉 25년을 기념하여 성사된 『허핑턴 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영화에서는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연출을 표현했는데, 어찌 보면 논란이 있을 수도 있다. … 이는 동화라는 매체의 뿌리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화스러운 특징을 표현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두 사람이, 서로 함께할 운명인 설정이다. 잠깐의 교류만으로도 그들은 운명을 깨닫는다"라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안데르센이 『운디네』에서 발전시켰다고 생각하며 자랑스러워했던 원작 『인어공주』의 결말의 모양새와, 이야기의 주제의식 자체가 변화했다.


실사영화 〈인어공주〉에 대한 정보가 아직 부족하지만, 만약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원작의 동화와 애니메이션만큼의 거리가 있다면 캐스팅의 인종에 관한 논의 또한 해당 각색의 방향에 따라 새로운 모양새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리고 만약 실사영화가 그만큼 변화한다면, 『인어공주』라는 전설은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2021) 또한 〈인어공주〉와 유사하게 원작과 실사영화의 주연의 인종이 바뀐 예로 들 수 있다. 원작의 주인공 가웨인 경은, 만약 그가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이라고 가정한다면, 로만 브리튼 계통의 웨일스 인이었겠지만, 영화에서는 인도 구자라트 혈통의 영국인 데브 파텔이 연기한다. 다만, 원작이 되는 작품의 팬덤 크기 때문일지, 아니면 작품에서 지향하는 바가 완전히 달라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인어공주〉와 비교하면 캐스팅에 대한 인종 언급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린 나이트〉의 원작이 되는 14세기 문학 『가웨인 경과 녹기사』가 속해 있는 아서 왕 전설 작품군 전체가 중세 및 근대를 거치면서 내용과 주제의 변화를 거쳐왔고, 지금도 문학과 영화에서 다양하게 재해석되고 있다. 데이빗 로워리 감독은 인터뷰 중에서 아서 왕 전설을 기반으로 한 영상 작품 중 볼만한 작품은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호수의 랑슬로〉(1974) 정도가 있다고 대답했는데, 흥미롭게도 브레송과 로워리 감독이 아서 왕 전설 신화를 각색하는 작품의 방향성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정반대를 향하고 있다. 브레송 감독의 〈호수의 랑슬로〉는 신화라는 휘장을 들추고 그곳을 살아간 인간들을 조명하는데, 로워리 감독의 〈그린 나이트〉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에 신화라는 휘장을 드리우면서 신비감을 조성한다.


브레송과 로워리 감독의 각색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아서 왕 전설은 수세기를 지나도 계속되는 인기 덕분에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어떠한 연유와 모양새로 변화하고 재창조되는지 연구하고 고민하기 적합한 신화이자, 서사의 원형이다.


서사의 원형

아서 래컴 畵, 〈아서 왕과 원탁의 기사〉 [출처: Wikimedia Commons]


문학비평 영역에서 역사의 위대한 '문호'의 목록에 오르내리지 않는 작가의 작품 중 토마스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 (Le Morte d'Arthur)』 만큼 문화사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이 또 있을까. 카멜롯, 아서 왕, 엑스칼리버, 랜슬롯, 가웨인, 호수의 여인, 성배와 같은 키워드가 당장 21세기, 2021년에 얼마나 많은 대중문화와 서브컬처에서 재사용되고 있는지에 대해 열거하는 시도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될 만큼 아서 왕 전설은 종교의 아이코노그라피와 대등한 수준에서 서양문화사 깊은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소년 아서가 바위에서 엑스칼리버를 뽑고, 12명의 위대한 전사를 모아 원탁의 기사를 창설하게 된 계기, 유년기의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든 랜슬롯과 귀네비어 왕비의 불륜, 그리고 가장 순수한 기사 퍼시벌과 완벽한 기사 갤러해드의 성배 탐색까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인물 하나하나를 나만의 캐스팅으로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아서 왕 전설은 내게 역사와 모험, 전설과 변주에 대한 재미를 일깨워준 첫 번째 불꽃이었고, 타오른 불길은 지금도 꺼지지 않았다.


토마스 말로리는 다양한 언어와 판본으로 전해져오고 있던 아서 왕 전설을 취합하였는데, 말로리 이전 가장 유명한 작가는 12세기 프랑스 작가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였다. 왜 프랑스 작가가 영국의 역사에 대해서 썼는지를 이해하려면 역사 배경에 대한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아서 왕 전설은 지금은 영국 전체를 대표하는 문화로 소개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조금 복잡한 사정이 존재한다. 실제로 해당 작품의 배경인 5-6세기의 영국 역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로마 제국과 함께 영국을 차지하고 있었던 주류 민족인 켈트족(브리튼족)은 독일계인 앵글로색슨의 침략으로 점점 브리튼 섬 남부에서 밀려나게 되는데, 아서왕은 바로 웨일스를 거점으로 이 앵글로색슨계 군대와 맞서 싸운 켈트계의 마지막 대왕의 포지션을 취하고 있다. 흔히들 영국 문화라 하면 떠올리는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심지어는) 아일랜드보다도 비주류 지역인 웨일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한편 앵글로색슨에게 밀려난 켈트족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그리고 프랑스 남부로 이동하였는데, 이 때문에 아서 왕 전설의 무대는 웨일스와 잉글랜드를 넘어서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까지를 아우른다. 때문에 아더 왕 전설에는 켈트족이 건너간 프랑스 지역의 전설이 함께 편입되는 경우가 많았고, 바로 최고의 기사인 랜슬롯(불어 '랑슬로')이 이러한 프랑스 작가들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左) 5세기 경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이동, (右) 6세기 경 켈트-브리튼족의 유럽 재이동 [출처: Wikimedia Commons]


크레티앵 드 트루아의 『죄수 마차를 탄 기사』가 바로 랜슬롯이 처음으로 아서 왕 전설에 등장하는 문헌으로, 이러한 편입 과정에 소위 말하는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와 같은 사상 기획이 존재하였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유명한 기사도 전설이 성문화 되기 이전, 이야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두 문화권이 충돌한 흔적이 존재한다는 해석은 몹시 흥미롭다.


20세기에 와서 아서 왕 전설은 어느 정도 '영국'의 이야기로 정립이 되었고, 실제로 50년대-60년대 영국의 '역사' 또는 '기사도'를 다룬 영화에서 가장 선호하는 주제 또한 아서 왕 전설이었다. 리처드 소프 감독이 연출한 〈원탁의 기사〉(1953)가 이 시대에 제작된 가장 대표적인 아서 왕 전설 영화로 남아있다.


한편 70년대에 와서, 누벨바그로 꽃핀 프랑스 영화계에서도 아서 왕 전설을 다루기 시작하는데, 바로 프랑스 영화의 거장, 로베르 브레송 감독이 연출한 〈호수의 랑슬로 (Lancelot du Lac)〉와 누벨바그 계열 감독 중 가장 대중적이라 평가받는 에릭 로메르 감독이 연출한 〈갈루아인 페르스발 (Perceval le Gallois)〉(1978)이 유명하다.


이 두 작품은 프랑스 영화계의 작품답게, 말로리의 『아서 왕의 죽음』보다는, 트루아의 작품군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트루아가 랜슬롯과 프랑스 전설을 아서 왕 전설에 편입시킨 과정이 (심지어 프랑스 기사인 랜슬롯이 영국의 왕비 기네비어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른다는 점이 심히 의심스러울지라도) 어떠한 목적성을 가지고 진행되었다는 주장이 확대해석이듯이, 브레송, 로메르 감독이 20세기에 와서 영국의 전설을 프랑스 시네마의 관점에서 탈환하려는 시도였다는 감상 또한 너무 나아간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두 감독의 각자 다른 영화 세계와 작품군에서도 독특하게 튀는 형태, 아서 왕 전설과 기사도를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서 바라본 접근법, 심지어 영화라는 매체 자체의 방법론적인 해석 또한 상극에 위치해 있다는 점은 이 두 작품을 기존의 전설, 기존의 서사, 기존의 인물 해석, 기존의 영화관에 대한 안티테제로 해석할 때 비평적 활력을 가지게 된다.


닐 게이먼은 장르 문학에 대해 가즈오 이시구로와 대담하면서 장르 문학을 포르노그라피와 대비시켜 설명하였는데, 장르 문학의 독자는 해당 작품에서 기대하는 개념(트로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만약 서부극을 예로 들면, 주점에서 일어나는 총싸움, 말을 타고 마을로 들어오는 악당, 마지막 대결 등. 이러한 개념 사이를 이어가는 서사는 오히려 부수적인 내용일 수도 있다. 때문에 해당 장르를 부르는 명명법과는 달리, '서부(Old West)'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라고 모두 '서부극'이 아니다.


그렇다면 로망스라고도 불리는 기사도 장르의 작품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장면은 무엇일까? 갑옷을 입은 고결한 기사의 모험, 자신이 연모를 바친 귀족 여인에게 바치는 순정, 악당과의 숨 가쁜 전투, 창이 부러지고, 말에서 내려 서로의 목을 향해 오가는 칼날, 그리고 정의의 승리. 이는 어떻게 보면 크레티앵 드 트루아와 토마스 말로리가 문학에 남긴 거대한 흔적과도 같다.


한없이 비좁아 보이는 기사도 서사 흐름 안에는 봉건주의 계층 사회의 존속을 위한 지배층의 기대, 성에 따른 남녀에게 기대되는 역할론, 그리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일리아스, 베오울프 등에 내재된 생존을 위한 육체 폭력에서 기인하는 원초적 서스펜스가 담겨있다. 오죽하면 해럴드 블룸이 로망스적 관습과 중세적 문법을 완벽히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첫 번째 모더니즘 소설이라 불렀을까. 이는 적어도 블룸에게는 『돈키호테』가 안티테제로 작용한, 세르반테스가 타파하는 데 성공한 문학, 사회 관념이 '현대'에 대비되는, '중세'를 정의하고 있었다는 해석으로 볼 여지도 있다.


물론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문학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하여 기사도, 로망스 장르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로망스에서 '연애와 사랑'이 차지하고 있던 지점은 제인 오스틴에 의해 거의 완성되다시피 하였고, 로망스에서 '전사와 폭력'이 차지하고 있던 지점은 J. R. R. 톨킨과 C. S. 루이스에 의해 21세기에도 대중문화의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환상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고루하고 진부한 가치로 변해버린 기사도, 로망스의 개념은 연출에 따라 현대의 관객과도 공명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 피터 잭슨 감독이 영상화한 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이나, HBO에서 영상화한 조지 R. R. 마틴의 〈왕좌의 게임〉의 흥행과 성공은 이러한 기사도와 로망스의 개념들이 얼마나 관객을 원초적으로 충만하게 만드는지, 이러한 가치가 얼마나 보편적인지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브레송 감독은 〈호수의 랑슬로〉를 통해 장르의 팬들이 요구하는 관습과 트로프를 아낌없이 제시하지만, 그가 트로프를 다루는 손길에는 브레송의 작품이 언제나 그래왔듯이 과장과 감정과잉 연출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장르들에 비해 삶보다 더 큰 인물들을 요구하게 되는 로망스 장르이기에 간극은 더욱 넓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브레송은 이 기묘함을 통해 관객에게 신화와 장르라는 미사여구를 벗겨내고 그곳에 살아간 인간을 바라봐달라고 주문한다.


브레송의 로망스

로베르 브레송 감독, 〈호수의 랑슬로〉(1974) [출처: The Movie Title Stills Collection]


〈호수의 랑슬로〉는 '기사도', 또는 아서 왕 전설을 다룬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이 기대하는 개념을 첫 5분 남짓한 시퀀스에 대부분 제시한다. 고풍스러운 필사본 서적을 떠올리게 만드는 글꼴을 사용하여 성배 탐색을 위해 아서 왕의 지시를 받고 떠난 100명의 기사와 모험에서 70명의 기사가 죽고 실패로 끝났다는 전설의 설명, 말을 타고 숲을 가쁘게 누비는 기사들의 행보, 피칠갑한 기사들이 목을 베고 투구가 찌그러지는 폭력적인 전투. 그런데 묘하게 액션에는 활력이 빠져 있으며, 기사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시선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곧이어 등장하는 아름답고 젊은 기사, 고방(가웨인)과 베테랑 기사 랑슬로(랜슬롯)의 대화, 랑슬로와 아름다운 여왕 그니에브르(기네비어)의 대화는 브레송의 모든 영화의 배우들이 그렇듯이 감정이 결여되어 있고, 배우들은 대사를 전달하는 마리오네트와 같다. 대사를 통한 서사가 진행되며, 우리가 익히 알고 기대하고 있는 대화를 하고 있지만, 무심한 대사는 심지어 상호작용이 아니라, 일종의 독백과도 같이 연출된다.


관객은 깨닫는다. 브레송은 아서 왕 전설을 다룬 영화를 만들었으며, 장르 영화의 문법에 따라 내용 또한 충실히 연출하고 있지만, 관객이 기대했던 영화와는 몹시 다르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작품이 브레송이 해석한 장르 영화라는 감상이 뚜렷해진다.


영화의 음향은 대부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걸어 다니며 내는 찰그닥 거리는 소리와, 말이 달리는 소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메라는 집요하게 활동성을 위하여 갑옷이 가리지 않고 있는 다리의 뒷부분을 쫓아간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되면서, 감정을 비추지 않는 배우들이 "기사"라는 관념의 아바타로 변모한다. 기사는 말을 타고 움직이는 양철 인형이며, 기사의 인간성은 갑옷이 미처 가리지 못한 부위에 존재한다. 이는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투구를 쓴 익명의 기사들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브레송은 과연 관객이 "기사도 영화"에 보낸 기대가 무엇인지를 반대로 질문하고 있다.


로베르 브레송 감독, 〈호수의 랑슬로〉 [출처: The Idle Woman]


장르 영화, 아서 왕 전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갑옷을 입은 기사를 보고 싶었을까, 갑옷 안의 인간을 보고 싶었을까. 갑옷을 입고 격돌하는 기사들을 보고 싶었을까, 갑옷을 벗고 살결이 부딪히는 남녀를 보고 싶었을까. 사이에서 피어나는 격한 감정을 보고 싶었을까. 관객이 요구해온 모든 트로프의 즐거움을 형식적으로만 충족시켰을 때, 작품이 가진 의미는 무엇인가. 비어있는 껍데기인가, 아니면 가장 순수한 의미의 기사도 영화인가.


물론 이러한 질문은 브레송 감독이 다른 모든 영화를 통해서 던지고 있는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가 그의 작품에서 특히 주머니 속 송곳처럼 돌출하는 이유는 어쩌면 이 작품이 그의 작품 중에서도 특별하게 기사도의 관습, 원전의 서사에 충실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호수의 랑슬로〉의 서사는 무척 간결하다. 빈 손으로 성배 탐색에서 귀환한 최고의 기사 랑슬로(뤽 시몬)는 실패에 대한 죄책감에 망연자실해 있다. 그는 죄인의 심정으로, 신이 자신에게 성배를 허락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라고 생각한 자신의 원죄, 부덕의 소치, 불륜의 상대인 그니에브르(로라 듀크 콘도미나스)를 밀어낸다. 그러나 마상시합을 통해 다시 한번 기사의 자아를 되찾고, 결국은 그니에브르를 납치해 아르투스 왕(블라디미르 안톨렉-오레섹)에게 반기를 든다. 하지만 이 와중 기사도의 상징과도 같았던 친우, 고방(움베르트 발산)이 전투에서 부상당해 죽자, 낙심한 랑슬로는 그니에브르를 아르투스 왕에게 돌려보낸다. 삶을 포기한 순간, 자신과 반목해 왔던 모르드르(패트릭 버나드)가 아르투스 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하지 않고 아르투스 왕을 도우러 말에 박차를 가한다. 그리고 모든 기사는 죽는다.


고방(움베르트 발산), 랑슬로(뤽 시몬), 아르투스 왕(블라디미르 아톨렉-오레섹), 〈호수의 랑슬로〉 [출처: The Idle Woman]


건조하게 사건과 인과관계만을 나열하더라도, 사이에서는 진한 장르적 재미가 묻어져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충실히 영상화 한 영화 〈호수의 랑슬로〉는 장르의 팬이 요구하는 말초적 재미를 완전히 전복시키는 데 성공한다. 마치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 기사도 문학의 모든 개념을 충실히 따랐지만,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작품을 만드는 데 성공한 과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브레송 감독이 평생 동안 던져온 질문인,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관한 대답과도 같다. 원전이 되는 문학 작품이 있고, 문학 작품에서 발생한 문학 사조가 있으며, 문학 사조가 만들어낸 장르가 존재하는데, 이를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은 세부적인 예시를 굳이 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영화 제작 과정, 나아가서는 영화 산업 전체를 지탱하는 공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각색'이라고 표현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원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재현해내는지를 해당 영상화의 작품성을 판단하는 척도로 가져온다.


브레송은 〈어느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를 통해 이미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상화 한 경험이 있다. 앙드레 바쟁은 〈… 신부의 일기〉의 미학을 평하면서, 브레송이 이 원작을 가장 충실하게("word-for-word") 영상화하려 한다는 의도를 비춘 일화를 소개한다. 그런데 이 "충실함"은 사전적 의미에서는 정확할지 몰라도, 바쟁의 말을 빌려오자면 몹시 "음험한 충실함"이었으며, 가장 "만연한 형태의 창작적 허용"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음험한 충실함"은 〈호수의 랑슬로〉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브레송 감독에게는 원작에 영화적 재미를 더해, 관객이 기대하는 원작의 영상화는 큰 의미가 없다. 같은 서사에 기반하더라도,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아냄이 더욱 중요하다. 소설에서는 들리지 않는 갑옷의 쨍그랑거림, 마상시합에서 반복적으로 부서져 나가는 방패, 낙마하는 기사들의 무력감이 바로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원작을 이렇게 충실하게 영상화했음에도, 브레송 감독의 기사도 영화가 어떠한 기사도 영화와도 달라 보이는 이유가 바로 브레송 감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서사, 형태, 장르, 오브제의 극단적인 분리와 간극에 존재한다.


브레송 본인은 영화와 함께 발행된 프레스북에 게재된 인터뷰에서 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우리의 신화를 (잊힌 과거에서) 끌어내기 위해. 신화에서 일련의 상황을 도출하기 위해, 아르투스의 성으로 귀환하는 기사들의 모습과,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성배를 연출하기 위해. 성배, 즉, 완전체인 신(의 결여)"라고 짧게 설명했다. 이어지는 질문에서 인터뷰어는 브레송이 "자신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는 행위를 혐오함을 알지만" 그래도 영화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달라 부탁을 하는데, 브레송은 침묵으로 답한다. 결국 계속된 질문에 그는 "랑슬로와 그니에브르는 트리스탄과 이졸드에서 사랑의 묘약이 없는 모양새다. 운명의 사랑, 격정적인 사랑이 넘을 수 없는 장애물과 부딪히고 있다. 이 사랑과 움직임이 영화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 자, 이제 영화에 관해 모두 이야기했다"라고 (문자로 옮겨진 인터뷰만 보아도 문맥에서 느껴지는 질색한 표정으로) 설명을 마친다.


브레송 감독이 그의 유일한 장르 영화를 통해 모색한 서사는 신화 속의 인간, 더욱 자세하게 말하자면 신의 가호를 잃은 인간들이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을 통해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였다.


아서 왕 전설에서 성배 탐색은 서사의 정점이자, 동시에 '안티-클라이맥스'라고 부를 수 있다. 토마스 말로리가 취합한 〈아서 왕의 죽음〉에서 3명의 기사 갤러해드, 퍼시벌, 보어스는 성배 탐색에 성공하지만, 독자가 작품 내 응원하던 아서 왕, 가웨인, 란슬롯 등 가장 인기가 많은 기사들은 실패 후 귀환하고, 이들은 모드레드의 반란에서 모두 죽는다. 브레송은 전설 내 신성과 인간성이 중첩된 신화의 세계에 있었던 영웅들이 신성의 획득에 실패하고 결여를 통해 인간성이 극대화된 기사들을 그리고 있다.


굳이 갑옷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기사들의 모습은, 갑옷이 보호하지 못하는 인간의 뒷모습을 비추는 숏들에 대비되어, 신성, 다시 말하면 육체적, 정신적 피해로부터 완전무결한 보호를 획책했던 기사들의 자만심을 부각한다.


갑옷과 방패로 중무장했음에도 마상시합에서 낙마하는 기사들을 담은 숏의 반복에서는 이 자만심이 얼마나 어리석은 목표였는지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 폭력을 바라보는 기사들의 리액션 숏의 반복에서 이들의 표정은 몹시 상기되어 있다. 기사들은 이미 폭력에 중독되어 있다.


고방(움베르토 발산), 〈호수의 랑슬로〉 [출처: Institut français]


이 폭력에 대한 중독은 영화의 결말로 이어진다. 그니에브르를 보호하기 위해 주군인 아르투스에게 반기를 들 정도로 그녀를 격정적으로 사랑하고 숭배했던 랑슬로는, 아르투스의 아들인 모르드르가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자 주저하지 않고 주군을 돕기 위해 무장을 한다. 여기서 랑슬로와 그의 동조자들이 투구 가리개를 내리는 숏이 반복되면서, 랑슬로를 포함하여, 이름과 얼굴이 있던 기사들은 갑옷의 기사로 익명화한다. 결국 원탁 최고의 기사라는 랑슬로 또한 사랑과 폭력에서는 망설임 없이 폭력을 택하는 기사일 뿐이다. 심지어 폭력이 자신의 죽음으로 연결된다는 미래가 자명해진 순간에도, 그는 기사가 되기를 소망한다.


랑슬로와 함께 했던 모든 기사가 죽으면서 암전 되는 화면을 응시하는 관객은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다. 자만과 폭력에 대한 중독에 빠져 신성한 성배 탐색에 실패한 기사, 긴장감이 결여된 전투, 사랑하는 여인을 포기한 연인으로 이루어진 로망스를 선보인 브레송이 관객에게 이런 형태라도 기사도와 아서 왕 전설을 즐겼는지를 질문한다면 관객은 수백 번이라도 다시 보겠다고 대답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이는 브레송의 시네마토그래프 철학을 통해 재창조된 〈호수의 랑슬로〉가 간직한 순수한 영상적 아름다움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객은 (바쟁의 말에 따르면) 브레송 감독의 "음험"한 의도를 기반으로 만연한 형태로 창작되었더라도, 브레송 감독이 아서 왕 전설과 기사도 로망스가 가진 장르적 유희의 완전한 전복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어 진다. 그리고, 어쩌면 브레송 감독 또한, 영화를 만들면서 로망스의 원형에는 파괴가 불가능한 원초적 희열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보이기에, 이는 모순적이게도 유난히 성공적인 실패다. 모든 기사가 죽음을 맞이한 그곳에, 이야기의 원형이 살아남아있다.


서사의 기원

J. R. R. 톨킨이 번역한 중세 영어 서사시, 『가웨인 경과 녹기사』, 『베오울프』 [출처: HarperCollins]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의 작가 외에는 별다른 수식어가 필요 없는 톨킨이지만, 그가 고대부터 중세를 다루는 영문학계에서 학문적 성취를 인정받고 있는 석학이라는 개인사는 톨킨의 팬이 아니라면 생소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군 하여, 손꼽힐 만큼 잔혹했던 솜 전투에서 기적과도 같이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종전 후 30대 초반의 나이로 리즈 대학에서 교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리즈 대학 근무 당시 작자 미상의 14세기 영문학 작품인 『가웨인 경과 녹기사』 번역에 착수한다. 젊은 톨킨은 해당 작품을 영국 국립 도서관의 전신인 코튼 도서관에 보관된 필사본 형태로 접했는데, 해당 사본에는 「펄」, 청결, 인내라는 다른 세 개의 시 또한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학자들은 이 네 작품은 단순히 하나의 필사본에 함께 기록되어 전해 내려온다는 정황적 근거 외에도 문체 및 주제의 유사성 때문에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창작되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14세기 말에 활동한 이 작가는 현대에 와서는 영문학의 기원이라고 여겨지는 제프리 초서와 동시대의 인물이지만, 초서와는 다르게 생애에 대해 일절 알려진 부분이 없다.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대표작의 이름으로 '가웨인 시인', 또는 '펄 시인'이라고 부를 뿐이다.


『가웨인 경과 녹기사』 원서 삽화 [출처: The British Library]


톨킨은 『가웨인 경과 녹기사』를 소개하면서 '가웨인 시인'은 14세기 영문학계에 불었던 '두운법 부흥 (Alliterative Revival)' 사조의 일원이었다 이야기한다. 물론 이 문학운동 자체는 후대의 영문학자들이 분류학적인 측면에서 붙인 명명법이지만, 『가웨인 경과 녹기사』가 톨킨에게 미친 영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운(頭韻)법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흔히 압운법이라고 번역되는 라임(rhyme)은 시문학 외적으로도 우리의 삶에 밀접하게 관련이 되어 있는데, 21세기의 팝과 힙합 음악의 가사 작법에서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당연하게 지켜지고는 한다. 간단한 예시로 2021년에 공개된 아델의 "30" 앨범의 'Can I Get It'의 도입부 가사를 보자.


Pave me a path to follow
And I'll tread any dangerous road
I will beg and I'll steal, I will borrow
If I can make, if I can make your heart my home

Throw me to the water
I don't care how deep or shallow
Because my heart can pound like thunder
And your love, and your love can set me free


여기서 4행을 하나의 단으로 구분한다면, 1단의 1행과 3행은 "follow"와 "borrow"로 동일한 "-o -ow" 발음으로 끝이 나며, 2단의 1행과 3행 또한 "water"와 "thunder"로 "er" 발음으로 끝이 난다. 이렇게 시나 가사의 운율에서 단어의 끝 부분의 발음을 맞추는 방법을 "각운(脚韻)", 즉 다리의 운율을 맞춘다고 분류한다. 각운을 맞춘 행을 반복으로 분류하면, 아델의 'Can I Get It'의 도입부는 현대 가요에서 널리 쓰이는 ABAC 각운 구조를 사용하고 있다고 분류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잘 짜인 각운은 가사에 "말맛"을 더하여, 심지어 의미를 모르고 듣더라도 청자에게 말초적 쾌감을 제공한다.


두운법은 반대로 단어의 첫 부분의 발음을 맞추는 작법인데, 시문학과 대중가요에서는 어느 정도 사장된 면이 있다. 오히려 광고 카피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는데, 예를 들자면 ㅇ 발음을 3번 반복한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프리마 커피), ㅋ 발음을 2번 반복한 "클린 앤드 클리어" (존슨&존슨) 등 짧은 캐치프레이즈에서 강렬한 느낌을 심기 위해 사용되고는 한다.


광고 외에도 이러한 두운법이 사용되는 분야는 (영문학에서는)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있다. 루이스 캐럴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재버워키」에서 "gyre and gimble", "Tumtum tree", "snicker-snack", "Callooh! Callay!" 등, 영문학에 있지도 않거나 사장된 단어들을 재창조해 두운을 맞추었다.


여기까지 따라왔다면 알 수 있겠지만, 두운법은 말장난에 가까워, 짧게 쓰이면 강렬한 이미지를 남길 수 있지만, 오히려 많이 사용되면 금방 질려서, 소위 '아재개그'와 궤를 같이 한다 (예: "대구가서 우럭매운탕 먹으면 안대구 대구매운탕 먹으면 안우럭").


[사족. "대구가서 우럭매운탕 먹으면 안대구 대구매운탕 먹으면 안우럭"은 글쓴이가 직접 만들어낸 아재개그로 몹시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언젠가 꼭 글에 사용하고 싶었다.]


14세기 이전의 영문학 시인들이 두운법을 보면서 21세기의 우리가 아재개그에 질린 듯한 느낌을 받았을지는 (진심으로) 궁금하지만, 적어도 톨킨이 영문학을 연구하던 20세기 중반의 학자들은 13-14세기 사이 두운법 작시가 사장된 경향을 보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경향이 과연 당시 작가들이 의도한 문학적 사조였는지, 아니면 우연에 가까운 유행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사장된 적이 있는지 모두가 연구의 대상이다. 하지만 적어도 '가웨인 시인'은 작품 내에서 마치 두운법 부흥운동의 불꽃에 기름을 붓고자 하는 다짐이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가웨인 경과 녹기사』 1막의 4단(stanza) 도입부 4행을 살펴보자.


While New Year was yet young that yestereve had arrived,
that day double dainties on the dais were served,
when the king was there come with his courtiers to the hall,
and the chanting of the choir in the chapel had ended.

새해가 밝아오기도 전, 심지어 새해 전야가 어둑해지기도 전,
연단 위에 연약하고 아름다운 공물이 바리바리 바쳐지는 그날,
성왕이 그의 성실한 신하들과 함께 연회장으로 도착하던 때,
성당의 성가대가 부르는 성가가 막 끝났을 그때.


1행에서는 yet, young, yestereve 3개의 단어가 (ㅈ으로 번역), 2행에서는 day, double, dainties, dais 4개의 단어 (ㅇ으로 번역), 그리고 3, 4행에서는 king, come, courtiers, chanting, choir, chapel 6개의 단어(ㅅ으로 번역)가 같은 발음으로 시작하는 두운법이 사용된다. 이러한 두운법은 2530행에 달하는 이 소설의 전체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며, 톨킨은 본 작을 중세 영어에서 현대 영어로 번역하면서 이 두운을 살리는데 지고의 노력을 들였다.


현대의 우리는 '가웨인 시인'이 어떠한 이유로 약 1세기 정도 사장된 (혹은, 사장되었다고 후대의 학자들에 의해 주장되는) 두운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톨킨이 번역한 영어 원문으로 읽다 보면 시인의 두운법 사용이 루이스 캐럴이나 닥터 수스의 동화에서 보이는 말장난과는 뿌리부터 다르다는 감상을 받게 된다. 마치 고대 켈트 족의 드루이드, 또는 바이킹 족의 방랑 시인(skald)이 읊는 룬 주문, 주술적 저력을 가진 성가를 읽는 듯한, 어떤 무아지경(trance)에 돌입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톨킨은 자신의 독자적 세계관인 '레젠다리움'과 세계관을 위한 언어인 퀘냐를 개발하면서, 중세 영어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8세기 말의 시인 키네울프(Cynewulf)의 작품 「크리스트(Crist I)」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한다.


Ēala ēarendel, engla beorhtast
Ofer middangeard monnum sended

오, 에아렌델, 가장 밝게 빛나는 천사여
인간을 위해 가운데 땅으로 보내졌네


톨킨은 1차 대전에 종군하기 전, 레젠다리움이 모양새를 잡기 훨씬 전인 1914년에도 이미 크리스트에서 영감을 받은 「저녁별 에아렌델의 항해」라는 시를 썼는데, 에아렌델이라는 단어와 가운데 땅이라는 개념이 젊은 시절의 그의 창작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추측할 수 있다. 톨킨은 1967년, 랭(Mr. Rang)이라는 수신자의 질문에 답하며 에아렌델이라는 단어에서 "앵글로색슨 언어의 체계 안에 온전히 위치해 있으면서도, 듣기 좋을 수는 있지만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언어 내에서, 특별하게 아름다운 음조를 지니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에아렌델은 결국 그가 만들어낸 언어인 퀘냐의 기원이 되고, 이름에서 따온 에아렌딜은 레젠다리움의 가장 위대한 영웅이자, 이후에는 승천해 새벽별로 여행자들을 인도하는 반신의 존재가 된다.


반지의 제왕』에서 골룸의 음모로 쉘롭의 굴에 들어가게 된 프로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갈라드리엘이 선물한 유리병을 기억해 내고, 유리병의 퀘냐 시동 구호를 외친다.


Aiya Eärendil elenion ancalima!
(아이야 에아렌딜 엘레니온 앙칼리마!)

오 에아렌딜, 가장 밝게 빛나는 빛이여!


앨런 리의 삽화, (左) 새벽별 에아렌딜, (右) 쉘롭 굴의 프로도 [출처: Tolkien Gateway, The Art of Alan Lee and John Howe]


이 짧은 네 단어의 퀘냐 주문은 톨킨의 창작적 기원을 압축한 정수라고 추측할 수 있다. 만약 에아렌델이라는 중세 영어 단어가 레젠다리움의 기원이 된 하나의 원천이었다면, 레젠다리움의 언어인 퀘냐의 원천은 바로 그가 『가웨인 경과 녹기사』를 번역하면서 매료된 두운법이며, "아이야 에아렌딜 엘레니온 앙칼리마"라는 주문에서 두 가지 원천에서 흘러나온 물줄기가 융합된다.


『가웨인 경과 녹기사』를 영화화 한 〈그린 나이트〉의 감독이자 각본가인 데이빗 로워리는 이야기가 변해가는 일련의 과정에서 죽음과 부활, 창조라는 키워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그린 나이트〉의 뿌리에는 '가웨인 시인'이 두운법으로 부활시킨 중세 영어의 주술적 기원, 영감의 씨앗을 심어 레젠다리움과 『실마릴리온』, 호빗, 반지의 제왕이라는 거대한 세계관으로 꽃 피운 톨킨의 창조적 기획, 그리고 죽음과 재생을 통해 변형되어가는 이야기의 모양새가 자리 잡고 있다.


로워리의 로망스

데이빗 로워리 감독, 〈그린 나이트〉(2021) [출처: YouTube@A24]


〈그린 나이트〉의 이야기는 세부적인 연출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를 볼 때는 원전의 이야기를 착실히 따라가는 편이다.


위대한 기사 아서 왕(숀 해리스)의 여동생, 위대한 마녀 모건 르 페이(사리타 초우드리)의 아들인 가웨인(데브 파텔)은 신화에 어울리는 고귀한 혈통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아직 어린 나이로 인한 경험의 부족과 방탕하게 보내는 나날로 인해, 본인이 기사가 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현황에 고뇌하며 젊음을 낭비하고 있다. 어느 크리스마스 아침, 왕이 주관하는 연회에 초대받은 그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해 달라는 왕의 요구에 할 이야기가 없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한다.


기사들이 호기롭게 떠들던 연회장에 나무로 된 피부를 가진 거대한 녹기사(랄프 이네슨)가 입장하고, 그는 아서 왕의 궁정에 하나의 놀이를 제안한다. 자신의 목을 베는 데 성공하는 기사는 도끼를 선물로 받고, 대신 1년 후에 똑같이 목을 내놓아야 한다는 내기다. 원탁의 기사들은 전설에서 깨어난 듯한 녹기사의 모습과 그의 마법적 능력을 두려워해 앞으로 나서지 못하는데, 가장 어린 가웨인이 호기롭게 나서 목을 벤다. 녹기사는 베어진 목을 들고서는 기이한 웃음소리와 함께 1년 후를 기약하며 떠난다.


녹기사(랄프 이네슨), 〈그린 나이트〉 [출처: YouTube@A24]


녹기사의 내기를 받아낸 위대한 젊은 영웅이라는 칭송과, 1년 후 다가올 그의 죽음을 확신하는 주위의 시선 사이에서 술독에 빠져 1년을 허비한 가웨인은 아서왕의 권유에 녹기사가 남기고 간 도끼를 집어 들고 그가 기다리고 있는 녹회당(Green Chapel)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여행이 시작되자마자 어이없게도 강도들에게 도끼와 무장, 말을 모두 강탈당하고, 죽음을 맞을 위기에 빠지지만 탈출을 후 숲 한가운데의 버려진 저택에 도착해 잠을 청한다. 한 밤중에 위니프레드(에린 켈리먼)라는 젊은 여성의 부름에 깬 가웨인은 저택 앞의 웅덩이에서 자신의 머리를 되찾아 달라는 그녀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웅덩이에서 해골 머리를 가져와 침대 위에 놓여있는 해골과 함께 뉘어준다. 임무를 완수한 그의 곁에는 잃어버린 녹기사의 도끼가 마술처럼 되돌아와 있다.


저택을 나선 가웨인은 자신을 따라오는 여우와 함께 거인을 만나는 등 환상에 가까운 모험을 거쳐 한 영주(조엘 에저튼)의 성에 도착한다. 영주는 젊고 아름다운 부인(알리샤 비칸데르)과 부인의 시종처럼 보이는 장님 노파와 함께 거대한 성에 살고 있는데, 가웨인에게 녹회당으로 가는 방향을 일러주지만, 아직 새해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성에서 회복을 하고 떠나라고 권유한다. 영주는 자신은 매일 사냥을 나갈 테니, 가웨인이 성에서 회복하면서 얻는 물건과 자신의 사냥의 전리품을 교환하자 제안한다. 성을 탐색하는 가웨인은 영주의 아름다운 부인에게 정욕을 품고, 그녀가 선물하는 무적의 허리띠를 얻기 위해 그녀의 유혹에 함락당하고 만다. 부끄러움에 성에서 도망치듯 뛰어나온 가웨인은 귀환하는 영주와 조우하고, 영주는 마치 가웨인과 부인의 관계를 안다는 듯이 가웨인에게 키스를 하지만, 가웨인은 그에게 허리띠를 돌려주지 않는다. 영주는 가웨인이 떠나기 전 그를 따라다니던 여우를 잡았다며 돌려준다.


여우는 녹회당에 도착한 가웨인을 막아서며, 인간의 목소리로 녹회당에 가지 말라고 회유한다. 여우를 뿌리치고 녹회당에 도착한 가웨인은 잠들어 있는 녹기사가 깨어나기를 기다린다. 아침이 오자 깨어난 녹기사는 그의 목을 치려고 하지만, 가웨인은 순간적으로 움츠러든다. 그는 순간 자신이 도망가서 카멜롯으로 돌아가 아서 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는 환상을 경험한다. 기사다움을 포기하고 얻어낸 영광스러운 미래의 끝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모든 이들의 죽음을 경험하고, 노년이 되어 무적의 허리띠를 포기하면서 목이 떨어지는, 시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환상이 끝나고 녹회당으로 돌아온 가웨인은 녹기사에게 기다리라고 말하고, 무적의 허리띠를 푸르고, 마술이 없는 인간의 몸으로 그의 도끼를 기다린다. 녹기사는 도끼를 드는 대신, 가웨인의 목을 나뭇가지와 같은 손가락으로 살짝 그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다.


Well done, my brave knight. Now, off with your head.


로워리가 액션과 장엄함, 신화적 기사들로 이루어진 로망스를 연출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감상은 영화의 초반부터 암시되며, 이는 원작과의 세세한 차이점을 보면 더욱 자명해진다.


원작에서 크리스마스 게임을 받아들이는 가웨인의 이유는 호기가 아니다. 내기의 끝에는 자신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미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주군을 지키기 위한 기사의 사명감이다. 원작에서 1년 후, 가웨인이 떠나는 모험은 자세히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신화에 어울리는 전투와 영웅담에 가깝다. 원작에서 가웨인은 영주의 부인의 유혹을 이겨내지만, 그녀가 선물하는 무적의 허리띠를 얻기 위해 세 번 키스한다. 그리고 영주에게 세 번의 키스를 돌려주지만, 허리띠는 감춘다. 녹회당에 도착한 가웨인은 마지막까지 무적의 허리띠를 풀지 않고 녹기사의 도끼를 받아내, 목에 작은 상처만을 입는다. 녹기사는 내기의 끝에 자신이 성의 영주였다는 정체를 드러내면서 가웨인을 가장 순수한 기사로 칭한다.


'가웨인 시인'의 가웨인이 인간성을 간직한 청년 기사라면, 로워리의 가웨인은 기사가 되기에는 너무 인간적인 청년이다.


가웨인(데브 파텔), 〈그린 나이트〉 [출처: YouTube@A24]


〈그린 나이트〉를 관람한 많은 이들이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로, 강도를 당해 손 발이 묶여 무력하게 누워 있는 가웨인의 모습을 꼽는다. 카메라는 몸부림치는 가웨인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해 360도 패닝을 해 계절이 지나고 어느새 백골 시체로 죽어있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잠시 무심하게 시체를 비추던 카메라는 다시 역 360도 패닝을 해 시간을 돌려, 몸부림치고 있는 가웨인을 보여준다. 작품 내 360도 회전하는 배경을 사용한 인형극과 더불어 해석되기도 하는 이 숏을 만약 철저히 선형적으로 해석한다면 가웨인의 죽음과 재생으로 볼 수 있다.


 〈그린 나이트〉 [출처: YouTube @A24]


'가웨인 시인'이 14세기에 와서는 죽은 상태와 다름없던 두운법과, 프랑스 작가인 크레티앵 드 트루아가 성공적으로 전설에 밀어 넣은 란슬로트의 존재로 제1 기사의 자리에서 밀려나 잊힌 가웨인을 재생시켰던 『가웨인 경과 녹기사』 기획을 상기해보자. '가웨인 시인'을 번역하면서 자신만의 세계, 레젠다리움을 창조해낸 톨킨 또한 기억해보자.


로워리 감독이 모험의 초반부터 가웨인을 죽인 이유는, 그를 다시 창조해 데이빗 로워리의 가웨인을 조형하기 위함이다. 초반의 설정이 세세하게 다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유사한 모양새로 시작한 이 모험은 강도 사건 이후로 원작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가웨인 시인'의 가웨인이 죽었기 때문에, 새로운 가웨인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죽음과 삶의 기묘한 동거는 영화 내 펼쳐지는 가웨인의 모험을 지배한다. 머리를 잃었기 때문에 죽지도 살지도 못한 위니프레드에게 머리를 되돌려 줌으로 선물한 죽음. 녹기사에게 목을 베여 죽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는 자연, 독버섯, 가혹한 날씨에 맞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모험 길.


불친절하다는 평이 많은 〈그린 나이트〉이지만, 영화의 중간에 로워리 감독은 영주 부인의 입을 빌려, 녹색의 의미를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저녁을 먹고 휴식을 취하던 부인은 가웨인에게 문득 기사가 "왜 초록색이라고 생각하"는지 질문한다. 가웨인은 그가 외계의 존재라고 대답하지만, 부인은 녹색은 자연의 색이라고 대답한다. 가웨인은 문득, 확신에 가까운 죽음을 기억하고는, 녹색이 부패, 즉 죽음의 색이라 대답한다. 부인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렇다"라고 대답하며, 녹색의 패러독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붉은색은 정욕의 색이지만, 녹색은 정욕이 남기고 간 흔적입니다- 심장과 자궁에요. 녹색은 정열이 사그라든 자리에 남아있는 색이지요. 열정이 죽으면 우리도 죽습니다. 당신이 죽고 나면, 당신의 발자국은 풀로 뒤덮입니다. 이끼가 당신의 비석을 뒤덮겠지요. 그리고 해가 뜨면서, 녹색은 가능한 모든 음영과 색조를 사용해 만물을 덮어나갑니다. 이 녹(verdigris)은 당신의 검과 동전, 성벽을 뒤덮고, 당신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당신이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은 녹슬게 됩니다. 당신의 피부, 뼈. 당신의 기사도까지도.


〈그린 나이트〉라는 제목을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해석한다면, '푸르른 기사', 즉 아직 경험이 없고 젊은 기사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현대의 영어에서도 '녹색 뿔(greenhorn)'이라는 단어는 경험이 없는 신입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로워리의 〈그린 나이트〉는 젊은 가웨인과 아서 왕의 궁정에 새롭게 나타난 녹기사 두 사람 모두를 의미한다. 또한, 명예로운 죽음을 위해 삶을 부지해가는 가웨인과,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는 녹기사 모두, 부인이 말하는 삶과 죽음이 중첩되어 있는 녹색을 간직하고 있다.


모험의 마지막, 녹회당에 도착한 가웨인은 그의 도끼를 기다리던 중, 목숨을 부지해 카멜롯으로 돌아가는 미래를 경험한다. 이 환상은, 마치 부인이 말하듯이, 명예, 기사도, 위대함이라는 몽상이 결국은 그의 검과 동전, 성벽 모두를 녹슬게 만들고, 죽지 못해 부지해가다 허망하게 포기하는 삶을 그려낸다. 가웨인은 자신이 꿈꾸어 왔던 명예와 영광이 결여된 미래와 마주하고는, 무적의 허리띠를 풀고 진심으로 죽음을 기다린다. 그런 가웨인의 목을 손가락으로 그으며 녹기사는 말한다.


Now, off with your head.


"네 머리와 함께 이곳을 떠나라"(삶), 또는 "이제 네 머리를 치겠다"(죽음)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한 이 대사에서, 문득, 실제로 존재했을 켈트 기사 가웨인의 실제 삶과 죽음, 그의 이야기를 남긴 이름 없는 작가들, '가웨인 시인', 그리고 톨킨을 통해 죽음에서 다시 되살려져 새로운(변형된) 삶과 이야기를 살고, 다시 죽음을 맞이한 신화의 가웨인을 떠올린다. 로워리의 〈그린 나이트〉, 가웨인의 삶은 영화와 함께 끝이 나지만, 끝에는 삶과 죽음이 공존하고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의 씨앗이 된다. 〈그린 나이트〉의 엔딩 크레딧 이후, 어린아이가 아서 왕과 환상 속 가웨인이 쓴 왕관을 쓰는 연출은 이 이야기는 또 누군가에 의해 새롭게 바뀌기를 기대하는 로워리의 희망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린 나이트〉라는 영화의 짜임새 자체가 마치 아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갈 기회를 선물하기 위해 그에게 죽음을 약속하는 녹기사를 소환해낸 모건 르 페이의 모순적 주술과 닮아보인다.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보고 있어도 이해를 거부하는 중의적이고 모호한 상징과 기표들은 현대의 영화가 분명함에도 화면에 고대 신화에서 느껴지는, 서사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지 않는데서 오는 불안함을 드리운다. 자신의 전설에서 주인공의 자리를 빼앗겨가는 가웨인을 살려낸 '가웨인 시인'의 주술적 두운시와, 행간에서 가운데땅이라는 세계를 소환해낸 톨킨과 마찬가지로, 로워리 감독은 가웨인을 부활시켜, 화면 위 새로운 전설이 태어나기를 꿈꾸고 있다.


마침

〈그린 나이트〉의 중반, 영주의 성의 도서관을 방문한 가웨인은 부인에게 이 많은 책을 모두 읽었는지를 질문한다. 부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네, 모두 읽었지요. 어떤 이야기는 제가 직접 쓰고, 어떤 이야기는 필사했습니다. 이 책들은 제가 들은 이야기나, 누군가 불러준 노래들입니다. 저는 이야기들을 적고 어떨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야기하지 마세요. 어떨 때 이야기에 개선의 여지가 보인다면, 제가 이야기를 바꾸지요.


브레송과 로워리 감독은 〈호스의 랑슬로〉와 〈그린 나이트〉에서 각각 전통적 로망스의 기사도와 명예라는 허상을 지우고, 전설 속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과 죽음을 재창조해냈다.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연출된 두 작품들이기에 이들의 기획을 받아들이는 소화와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서사의 끝 부분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두 명제가 우로보로스와 같은 모양새로 동시에 성립한다.


서사는 변화하며 생명을 연장한다. 서사는 죽음을 통해 변화한다.


(끝)


참고자료

Bazin, A., Gray, H., Renoir, J., & Andrew, D. (2004). What Is Cinema? Vol. 1 (Second ed.).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Bresson, R. Official Pressbook: Lancelot du Lac. (1974). Robert-Bresson.Com. http://www.robert-bresson.com/Words/LancelotDuLac_pressbook.html

Duca, L. (2017, December 7). How Disney’s “Little Mermaid” Turned A Disturbing Fairy Tale Into A Children’s Movie. HuffPost. https://www.huffpost.com/entry/the-little-mermaid-fairy-tale_n_6096200

Gaiman, N., & Ishiguro, K. (2015, June 4). “Let’s talk about genre”: Neil Gaiman and Kazuo Ishiguro in conversation. The New Statesman. https://www.newstatesman.com/culture/2015/06/neil-gaiman-kazuo-ishiguro-interview-literature-genre-machines-can-toil-they-can-t-imagine

Harris, M. (2014, July 13). OPINION: Don’t call me ginger. Al Jazeera America. http://america.aljazeera.com/opinions/2014/7/don-t-call-me-ginger.html

Rosenbaum, J. (1974). The Rattle of Armor, the Softness of Flesh: Bresson’s LANCELOT DU LAC | Jonathan Rosenbaum. Sight and Sound. https://jonathanrosenbaum.net/2018/12/21315/

Tolkien, J. R. R., & Tolkien, C. (2021). Sir Gawain and the Green Knight, Pearl, and Sir Orfeo. Mariner Books.

Tolkien, J. R. R., Tolkien, C., & Carpenter, H. (2000). The Letters of J.R.R. Tolkien (1st ed.). Mariner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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