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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Mar 13. 2022

대서사극, 채움과 넘침

〈벤허〉(1959) × 〈로마 제국의 멸망〉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울트라 파나비전 70

쿠엔틴 타라티노 감독, 〈헤이트풀 8〉(2015) [출처: FILMGRAB]


2014년 1월,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8번째 작품 〈헤이트풀 8〉(2015)의 대본 초고가 온라인에 유출되었다. 타란티노 감독은 믿을만한 동료 여섯 명에게만 대본을 공유했고, 그중 배우 브루스 던, 팀 로스, 마이클 매드슨이 포함되어 있었다. 타란티노는 이들 중 한 명이 대본을 에이전트에게 전달했고, 그를 통해 할리우드 업계 전체에 유출이 되었다고 추측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타란티노는, 영화의 내용과 무척 흡사하기에 심지어 이 사태 전체가 기획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의심스러울 정도의 분위기에서, 세 명의 배우를 모아놓고 누가 유출을 했는지 심문을 했다고 한다. 온라인에 유출된 대본에 따르면 영화의 첫 씬은 다음과 같은 지문과 함께 시작된다.


(영화 전체를 포함) 숨이 멎을듯한 70MM 필름에 담긴 설산.
A breathtaking 70MM filmed (as is the whole movie) snow covered mountain range.


"숨이 멎을듯한 (breathtaking) 70MM 필름"이라니, 그리고 영화 전체를 70MM로 찍겠다니. 촬영 기술 명시가 영화의 첫 지문이라니. 유출된 대본의 첫 장에 기재되어있는 2013년 12월 12일이라는 날짜를 보아서, 타란티노 감독이 최근에 보았을 영화 중 이렇게 촬영된 영화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마스터〉(2012)가 유일했다. 왜냐면 〈마스터〉 이전 65mm 필름으로 촬영되어 70mm로 상영된 영화는 케네스 브래너 감독의 〈햄릿〉(1996)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필름의 역사에 대한 짧은 부연설명이 필요하다 생각된다.


19세기 말에 촬영장치와 영사 장치를 발명한 토머스 에디슨은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에서 영화 매체와 산업의 성장 가능성을 점치고, 1909년 여러 영화 제작사들을 규합한 신탁 체제의 영화특허회사(MPPC)를 만든다. MPPC의 설립 목적은 영화 제작의 다양한 기술을 (에디슨의 특허에 기반한 특정 기술들로) 규범화시켜 모든 영화 제작사가 MPPC에게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에디슨의 기술을 사용하게 만들려는 산업 독점이었다. 여기서 표준화된 기술 중 하나가 바로 1.33:1(4:3) 비율의 필름이다. 필름의 표준화는 영화 산업의 고속 성장을 위해 필요했는데, 이는 영화를 제작하기만 하면, 세계 어디에서든 영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촬영기와 영사기를 개발한 에디슨은 35mm 필름에 일정 간격으로 구멍(퍼포레이션)을 뚫어 두 기계에 표준화된 스프로킷(구멍을 걸고 돌리는 톱니바퀴)을 사용 가능하도록 제안했고, 이 필름은 조지 이스트먼의 코닥에서 독점으로 생산했다.


에디슨과 코닥의 산업 독점 시도는 불과 6년 후인 1915년, 미국 법무부가 MPPC를 상대로 펜실베이니아 동부지역 연방법원에서 독점금지 민사소송(United States v. Motion Picture Patents Co.)을 걸어 승소함으로 무산되었다. 하지만 이들이 영화 산업을 표준화하고 독점화한 20세기의 초반은 영화 제작과 유통을 포함한 시장 전반이 고속 성장을 이루고 있던 사회상과 맞물려 35mm 필름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영화 필름에는 이미지 정보뿐만이 아니라 사운드 스트립이 함께 추가되었고, 미국 영화인 연합 아카데미에서 이를 위해 필름의 이미지 비율을 재정의하면서 아카데미 비율(Academy ratio)라고 불리는 1.375:1 화면비가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아 1930년대와 40년대를 넘어 약 20년간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기존 35mm 필름 안에서 이미지 비율의 조정일뿐이었다. 실제로 20년대 말, 20세기 폭스 사에서 폭스 그랜저(Fox Grandeur)라는 70mm 필름 개발을 하기도 했지만 이미 촬영과 영사를 일원화시킬 수 있는 업계 표준으로 자리 잡은 35mm 필름을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 영화 산업은 새로운 라이벌을 마주해야 했다. 1941년 7월, 미국연방통신위원회(FCC)는 상업용 민간 방송국을 승인했고, 같은 달에 NBC와 CBS가 방송 송출을 시작했다. 불과 10년이 조금 넘은 1952년, 미국에는 1,530만 개의 텔레비전 세트가 유통되었다. 당시 미국 인구의 10%가 가정 텔레비전을 구비하면서, 영화 산업은 텔레비전과의 차별점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영화인들이 주목한 기술은 바로 화면비였다. 영화관에서는 TV의 몇 배나 되는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구상이었다.


마이크 토드 감독, 〈This is Cinerama〉(1952) [출처: Wikimedia Commons]


때문에 1952년에는 35mm 프로젝터를 3개 동시에 영사하는 시네라마(Cinerama) 기술이 등장하기도 했고, 시네라마 개발에 참여했던 제작자 마이크 토드는 자체로 개발한 70mm 필름을 사용한 토드-AO(Todd-AO)라는 촬영과 영사 기술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촬영, 혹은 영사에 부가 인프라 구축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널리 도입되는데 실패했다. 이듬해인 1953년, 20세기 폭스의 사장 스피로스 스쿠라스는 폭스의 기술개발부와 함께 발상의 전환에 성공한다. 시네라마처럼 한 장면을 찍는데 카메라를 3개를 쓰거나, Todd-AO처럼 아예 필름 자체를 바꿔서 새로운 카메라와 영사기 도입을 필요로 하기보다는, 폭스 개발진은 어떻게든 35mm 필름을 사용할 방법을 고안해냈다. 이들은 촬영 시 이미지를 수평으로 압축해서 필름에는 의도적으로 화면비가 좌우로 좁아진 정보를 기록하고, 영사시 이미지를 넓게 펴서 보여주는, 이른바 애너모픽(anamorphic)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렌즈 개발에 성공해 이를 시네마스코프(CinemaScope)라고 부른다. 시네마스코프는 35mm 필름과 영사기를 바꿀 필요 없이 렌즈만 교체한다면 바로 도입이 가능한 기술이었다. 같은 해, 시네마스코프 기술을 처음으로 접목한 2.55:1 화면비의 영화 〈성의〉(1953)가 개봉하면서, 와이드스크린 시대가 도래했다.


하지만 더욱 커다란 70mm 필름에 대한 갈망은 분명히 존재했다. 더욱 선명하고 디테일한 이미지 정보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70mm 필름을 65mm 필름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같은 필름을 의미한다. 70mm 필름에서 5mm의 분량이 음향 정보를 담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실제 촬영은 65mm 필름으로 하고, 영사는 음향 스트립을 붙인 70mm 필름으로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영화장비 제작사인 파나비전에서는 50년대 말 들어서 70mm 필름을 사용한 장비를 개발했고, 65mm 필름에 이미지를 온전히 담는 스피리컬 렌즈를 사용한 '슈퍼 파나비전 70', 그리고 65mm 필름에 압축된 이미지를 담는 애너모픽 렌즈를 사용한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를 개발해냈다. 슈퍼 파나비전 70의 경우 이미지 압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비가 시네마스코프보다는 조금 줄어들어 2.20:1의 화면비를 사용했지만 35mm 필름보다 훨씬 정밀하고 선명한 이미지 정보 기록이 가능했다. 울트라 파나비전 70은 안 그래도 넓은 70mm 필름에 애너모픽 렌즈를 사용함으로 2.76:1이라는 엄청나게 넓은 화면비를 자랑했다.


화면비의 비교 [출처: DVDBeaver, FILMGRAB, FanCaps]


파나비전의 70mm 포맷은 새로운 장비와 필름, 그리고 전용 영사기를 필요로 했지만, 이 모든 설비 투자가 용서가 될 만큼이나 아름다운 영상으로 영화계에 큰 파동을 일으켰다. 슈퍼 파나비전 70으로 촬영된 초기 유명 작품은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1961)와 70mm 필름의 미학을 확실하게 보여준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등이 있으며, 울트라 파나비전 70의 경우는 〈벤허〉(1959), 〈서부 개척사〉(1962)가 연달아 개봉하고 흥행에 성공하면서, 아이맥스 포맷의 등장 이전, 확실한 프리미엄 영화 관람 경험을 제공했다. 하지만 초기 아이맥스 포맷의 도입 시기와 동일하게, 이 두 포맷은 거대한 장비와 비용, 필요한 전문기술 등으로 영화 제작 비용이 불어났고, 때문에 스튜디오의 텐트폴 작품들 중에서도, 화면에 자연의 장관을 담는 연출이 포함된 '대서사극(Historical Epic)'을 위한 포맷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슈퍼 파나비전 70은 1960년대를 넘어 90년대에 한 번의 카메라 장비 업그레이드를 거쳐 2000년대에도 계속 사용되었지만, 울트라 파나비전 70의 경우는 1957년부터 1966년까지 10년 동안 10개의 영화에만 사용된 후, 파나비전의 장비 보관소에 잠들어 있었다.


이제, 다시 〈헤이트풀 8〉로 돌아가 보자. 아마 대본의 첫 줄을 읽은 촬영감독 로버트 리처드슨은 무척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타란티노 감독과는 〈킬 빌 - 1부〉부터 계속 협업을 해온 리처드슨 촬영감독은 마음을 추스른 후, 먼저 가장 최근에 개봉했던 70mm 필름 작품인 〈마스터〉를 떠올렸다. 그는 해당 작품이 슈퍼 파나비전 70, 정확히 말하면 90년대에 업그레이드된 파나비전 시스템 65/슈퍼 70으로 촬영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70mm 필름에 관한 장비 실사와 테스트를 위해 파나비전 본사를 방문했다. 파나비전 장비실 투어 도중, 리처드슨 촬영감독은 커튼으로 가려져 있는 장비실로 들어갔고,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렌즈를 발견한다. 〈하르툼 공방전〉(1966) 이후, 5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장비실에 숨어있던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였다. 리처드슨 감독은 그 자리에서 상영 테스트 영상을 관람한 후, 파나비전의 전폭 지원으로 렌즈를 재정비해 콜로라도에서 테스트 영상을 촬영, 푸티지를 타란티노 감독에게 보낸다. 영화계에서도 알아주는 시네필인 타란티노 감독이 엄청나게 흥분했음은 당연하다. 결국 〈헤이트풀 8〉은 50년 만에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로 촬영되고, 실제 70mm 필름으로 영사를 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남게 된다. 이후, 70mm 필름 영사기의 제약을 벗어나고자,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를 디지털카메라에 조합해 촬영한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 〈더 킹: 헨리 5세〉(2019) 등의 다양한 블록버스터 영화가 공개되면서 울트라 파나비전 70 렌즈는 다시 한번 (미래나 가상의 역사를 포함한) '대서사극' 장르를 상징하는 촬영 기술로 자리매김한다.


(左) 헨리 5세(티모시 샬라메), 〈더 킹: 헨리 5세〉(2019), (右) 가렛 에드워즈 감독,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2016) [출처: FILMGRAB]


흥미롭게도 울트라 파나비전 70이 소개된 후 촬영된 영화 작품록 10개의 작품 중 3개나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는 영화사에 남을 정도로 유명하지만, 이후에도 앤서니 만 감독의 〈로마 제국의 멸망〉(1964),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최고의 이야기〉(1965) 또한 울트라 파나비전으로 촬영되었다. 이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3시간이 넘어가는 상영시간을 자랑하며, 서곡(overture), 인터미션을 포함한 로드쇼 포맷으로 제작됐고, 연출에서는 스펙터클이라는 단어가 확실하게 어울리는, 소위 '대서사극'을 목표로 하는 창작자의 욕구를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역사 시대의 범위를 넓힌다면, 10개의 작품 중, '역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비-시대극은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의 블록버스터 코미디 〈매드 매드 대소동〉(1963) 뿐이다.


여기서 문득 미심쩍은 부분은, '대서사극을 만들겠다'라는 야심과 아득히 넓어진 화면비의 상관관계다. 물론, 세 감독 모두 자신들이 원하는 이야기가 고대 로마라는 확신을 공고히 하고, 그에 어울리는 최신 촬영 기술을 선택했으리라. 다만, 같은 시기에 이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슈퍼 파나비전 70의 경우 오히려 시네마스코프(2.55:1) 보다 좁은 화면비(2.20:1)로 제작 및 영사되었고, 실제로 슈퍼 파나비전 70을 사용해 촬영된 작품 중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이들은 고대 로마를 담기 위해서는 울트라 파나비전 70이 어울린다고 작가적인 (혹은 스튜디오적인) 결정을 내렸다. 대서사극 연출을 위해 가장 넓은 화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벤허〉와 〈로마 제국의 멸망〉을 논하기에 가장 흥미로운 시작점이라 생각된다.


[주. 굳이 〈최고의 이야기〉를 제외하는 이유는, 장르적으로 액션과 스펙터클 사극에 가까운 포지션을 취하는 앞의 두 작품에 비해, 해당 작품은 예수의 일생을 다룬 종교 영화에 가까운 특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벤허〉 또한 종교색이 짙은 편이지만, 〈최고의 이야기〉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와 유사하게, 온전히 역사영화로만 판단되기를 거부한다는 감상이 든다.]


윌리엄 와일러, "실패작을 만들 줄 모르는 남자"

(左→右) 스티븐 보이드, 찰턴 헤스턴, 하야 하라릿, 라몬 노바로, 윌리엄 와일러 감독, 〈벤허〉(1959) 프리미어 [출처: Wikimedia Commons]


1970년대 말, 〈죠스〉(1975)와 〈미지와의 조우〉(1977)로 할리우드의 초신성으로 떠오른 젊은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한 저택을 찾아 말리부 해변을 거닐고 있었다. 그가 찾고 있던 저택의 주인은 젊은 감독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지도 않았고, 별개의 친분이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스필버그 감독이 저택의 정문을 두드렸을 때, 그는 무척이나 긴장한 상태였다. 문을 열고 나온 노인은 윌리엄 와일러 감독이었다. 두 감독은 초면이었지만,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신문이나 잡지를 수놓았던 스필버그 감독의 얼굴을 바로 알아봤다. "들어오시오, 영화 얘기를 합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왜 하필이면 윌리엄 와일러 감독을 찾아갔는지 질문을 받자, 스필버그 감독은 "해변(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이니까요. 제가 궁금했던 모든 질문을 다 물어봤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위 일화를 기록한 잰 허먼의 와일러 감독 평전 『말썽을 위한 재능: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 윌리엄 와일러의 생애』(1996)은 그를 "약간의 과장을 섞어서, 실패작을 만들 줄 모르는 남자"라고 평한다.


1902년 당시 독일령에 속했던 알자스 지역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와일러 감독은 20대 초반에 친척이자 당시 할리우드에서 유니버설 픽처스를 설립한 칼 라밀리의 도움으로 할리우드로 이주해 유니버설 전속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무성영화 작품들은 대부분 공장에 가까운 시스템으로 제작되는 단편 서부극이었지만,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장편 영화를 맡기 시작한다. 그는 연극·영화계의 명가 배리모어 가문 출신의 존 배리모어를 주연으로 기용한 법정 드라마 〈카운셀러 엣 로〉(1933)를 연출해 흥행 성공을 맛보게 되고, 이후에는 유니버설을 떠나 새뮤얼 골드윈이 이끄는 새뮤얼 골드윈 프로덕션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30년대 대부분을 함께 한 골드윈과의 협업 중, 와일러 감독은 할리우드의 드라마 감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작품들을 공개하는데, 월터 휴스턴과 루스 채터튼을 주연으로 파국에 이른 결혼생활을 그린 〈도즈워스〉(1936)으로 7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고, 에밀리 브론테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메르 오베론과 로런스 올리비에가 주연한 〈폭풍의 언덕〉(1939)은 8개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면서 작품성을 인정받는다. 또한 이 기간에 협업을 시작한 촬영감독 그레그 톨런드와 함께 카메라 내 모든 사물이 거리(전경, 중경, 후경)와 관계없이 선명하게 필름에 담기는 딥 포커스 기술을 고안해 사용하기도 했다. 톨런드 촬영감독은 추후 오슨 웰스의 충격스런 데뷔작 〈시민 케인〉(1941)에서 이 딥 포커스 기술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와일러 감독은 그의 드라마 연출과 촬영 기술 외에도 배우의 연기력을 최대로 끌어내는 '배우의 감독'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는 와일러 감독과 협업한 〈제저벨〉(1938)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와일러 감독의 배우 연출에 찬사를 보냈고, 영국의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으로 이미 무대 위에서는 완성된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로런스 올리비에 또한 와일러 감독과의 협업으로 영화 연기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1940년대에 들어,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유대인 출신인 와일러 감독은 미국 육군 항공대에 자원입대해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종전 후에는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와 작품 활동을 재개했다. 그리고 와일러 감독의 작품록 중, 현대에도 가장 사랑받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제작되었다. 50년대 중, 그는 오드리 헵번을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얼굴로 올려놓은 〈로마의 휴일〉(1953), 그의 첫 테크니컬러 필름으로 그레고리 펙, 진 시몬스, 찰턴 헤스턴을 기용한 올스타 서부극 대작 〈빅 컨츄리〉(1958), 그리고 할리우드 역사에 남을만한 대서사극 〈벤허〉(1959)를 연출해냈다.


(左) 〈로마의 휴일〉(1953), (中) 〈빅 컨츄리〉(1958), (右) 〈벤허〉(1959) [출처: IMP Awards]


〈벤허〉의 제작사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 (MGM) 스튜디오는 1950년대 초반부터 19세기 작가인 루 월리스의 소설 『벤허』(1880)를 기반으로 한 무성영화 〈벤허〉(1925)의 리메이크를 만들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 샘 짐벌리스트가 제작자로 내정이 된 후, 칼 턴버그가 집필한 각본까지 완성이 되었지만, 영화는 촬영 돌입 전에 무산되었다. 하지만, 파라마운트에서 제작한 〈십계〉(1956)가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MGM은 다시 한번 〈벤허〉 리메이크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짐벌리스트는 1957년, 와일러 감독과 접촉해 그를 설득했고, 와일러 감독은 고심 끝에 당시 할리우드 역사상 최고로 높은 계약금을 받고 연출을 하기로 수락한다. 가브리엘 밀러가 쓴 와일러 감독의 평전에 따르면 와일러는 단 한 번도 "대서사극" 영화를 만들어 본 경험이 없었고, 〈십계〉를 비롯해 할리우드 최고의 "대서사극" 장인으로 유명했던 "세실 B. 드밀 스타일의 영화"를 본인도 만들 수 있다는 일종의 장르 도전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하지만 칼 턴버그의 각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와일러 감독은 짐벌리스트가 제작한 〈쿠오바디스〉(1951)를 집필한 S. N. 베어만, 그리고 빅터 플레밍 감독이 연출한 대서사극 〈잔다르크〉(1948)의 초고를 맡았던 맥스웰 앤더슨을 고용해 추가로 수정을 했으나 만족할만한 완성본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결국 당시에 젊은 소설 작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고어 비달과 연극 작가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프라이가 수정에 착수했고, 이 복잡한 집필 과정은 추후 영화가 개봉하면서 턴버그가 유일한 크레딧을 받자 기여도에 관한 설전을 야기하게 된다. 와일러 감독은 주연인 벤허 역으로 버트 랭카스터와 폴 뉴먼 등 다양한 리딩맨과 접촉했지만, 결국 최종 영화가 제작된 계기 중 하나인 〈십계〉에서 주연을 맡고, 와일러 감독의 전작인 〈빅 컨츄리〉에서 조연으로 호흡을 맞춰보았던 찰턴 헤스턴이 내정된다.


짐벌리스트와 MGM은 와일러 감독 내정 전, 〈벤허〉가 처음 기획되었던 1950년대 초반부터 영화를 와이드스크린 포맷으로 기획하고 있었는데 와일러 감독은 개인적으로 와이드스크린을 선호하지 않았다.  허먼의 평전에 따르면 와일러 감독은 와이드스크린에 대해 "너무 넓기에 카메라 밖에 아무것도 둘 수 없으며, 채우기 어렵다. 여백, 혹은 두 사람의 대화 중 그들을 둘러싼 수많은 엑스트라들이 아무런 할 일 없이 숏안에 존재할 뿐이다. 관객의 시선은 호기심 때문에 화면을 돌아다닌다."라고 평했다. 때문에 짐벌리스트가 제작한 〈쿠오바디스〉와, 울트라 파나비전으로 촬영된 첫 번째 작품인 〈애정이 꽃피는 나무〉(1957)을 촬영한 로버트 서티스가 촬영감독으로 합류하면서 와일러 감독의 주특기인 딥 포커스를 와이드스크린 포맷에 적용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하게 된다.


〈벤허〉를 두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무궁무진하지만, 와일러 감독이 와이드스크린을 두고 느낀 위화감에 집중해보자. 무성영화 시대부터 시네마스코프의 등장 이전까지 그는 아카데미 비율을 가지고 딥 포커스라는 촬영 기술을 개발하면서 정사각형에 가까운 카메라 내 세계의 깊이를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연출력을 키워왔다. 그런 그에게 어느 순간 수평으로 두 배 이상 넓어진 화면은 영화 세계의 급진 팽창으로 다가왔다. "카메라 밖에 아무것도 없으며, 채우기가 어렵다"라는 감상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와일러 감독은 1.375:1의 비율만으로 바라보던 시야가 순식간에 두배 이상 넓어진 상황으로 와이드스크린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1.375:1 비율 작품들에서 카메라의 바깥쪽에 위치해 있던 사물들은, 씬에 들어오기 위해 준비하던 배우들, 카메라와 조명을 포함한 제작 스태프, 그리고 어차피 화면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잘려나간 사운드 스테이지의 절단면, 혹은 카메라가 움직이면서 비춰지기를 대기하는 영화 세계의 다른 배경 등이었다. 와이드스크린 포맷은 디제시스 외부의 요소를 더욱 바깥으로 밀어내고, 영화 세계를 넓혀놓았고, 와일러 감독은 이를 추가로 채워야 할 캔버스로 해석했다. 이는 〈벤허〉의 울트라 파나비전 70 카메라가 담아낸 세계에 총체적인 징후를 드리운다.


〈벤허〉의 세계

〈벤허〉(1959) [출처: FanCaps]


〈벤허〉의 원작이 되는 소설의 제목은 〈벤허: 그리스도의 이야기〉로, 영화 또한 원제에 걸맞게 서곡(overture) 이후, 약 4분간 예수의 탄생을 먼저 묘사한다. 성경에 묘사된 대로 동방박사 3명이 마구간 안의 아기 예수와 그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에게 선물을 바친 후, 예수의 탄생을 알리는 목동의 뿔피리 소리가 베들레헴을 울리면서 마구간을 비추던 별이 사라지면서 오프닝 크레딧으로 넘어간다.


서기 26년,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는 모친 미리암(마사 스콧)과 누이 티르자(캐시 오도넬)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의 가문 중 가장 부귀한 허(Hur) 가문의 수장으로 사업을 성공으로 이끌고 있다. 그의 앞에 예루살렘에서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던 친우, 로마인 메살라(스티븐 보이드)가 돌아오지만, 군단장 메살라는 순수했던 어린 시절과는 달리 황제 "카이사르"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의 제국주의에 경도되어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복속시키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다. 두 친구는 잠시간 재회의 기쁨을 누리지만, 메살라는 벤허에게 로마 제국에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의 목록을 요구하고, 벤허는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친구 관계에 금이 가고 만다.


벤허와 메살라가 처음으로 재회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그를 담아내는 카메라 렌즈는, 묘한 끈적임에 젖어있다. 직전 씬에서는 로마 제국의 위대함을 논파하며 유대인의 의지를 꺾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메살라가 유대인의 왕자, 유다 벤허가 접견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를 왕자처럼 대접하라고 호통을 친다. 두 사람이 재회하는 씬은 긴 복도의 맞은편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천천히 다가서다가 발걸음이 빨라지며 격정에 찬 포옹으로 이어진다. 이후 서로를 바라보다가, 메살라가 처음으로 입을 연다. "내가 돌아온다고 했잖아." 이 장면은 만약 메살라의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로맨스 영화의 클라이맥스로 사용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드라마틱한 기운으로 전개된다.


각본 수정을 맡았던 작가 중 한 명이자, 20세기 초반에도 양성연애자로 커밍아웃을 했던 고어 비달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담긴 LGBT 캐릭터들의 묘사를 탐구한 다큐멘터리 〈셀룰로이드 클로지트〉(1995)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 씬에 관한 뒷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비달은 원작이든, 턴버그의 각본이든, 오랜 친구 관계가 너무 순식간에 망가지는 급전개가 어색하다고 생각했고, 와일러 감독에게 "만약 이 둘이 15, 16세에 연인이었고, 로마인인 메살라가 오랜만에 만나 다시 시작하기를 원한다고 가정해보자"라고 제안했다 한다. 와일러 감독은 처음에 이 아이디어를 듣자 "이 원작 제목은 『벤허』고 부제목은 '그리스도의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런 각색을 하냐"라고 당황했지만, 곧 "지금 각본보다는 낫다"라고 수긍한다. 와일러 감독은 비달에게 메살라를 연기하는 스티븐 보이드에게 각색 변경을 전달하라 지시하고, 추후 전미총기협회(NRA)의 회장을 지내게 되는 할리우드 최고의 보수주의자 찰턴 헤스턴에게는 절대 비밀로 하라고 당부한다. 와일러 감독은 고어 비달이 털어놓은 이 일화에 대해 기억을 못 한다며 잡아떼었지만, 영화에 참여한 여타 제작진들의 기록에는 이 장면에서 느껴지는 동성애가 의도적이었음이 암시되고 있다.


유다 벤허(찰턴 헤스턴), 메살라(스티븐 보이드), 〈벤허〉 [출처: FanCaps]


위 일화가 아니더라도, 두 인물이 처음으로 재회하고, 메살라가 벤허를 바라보며 "내가 돌아온다고 했잖아"라고 말하는 어조와 눈길에는 우정 이상의 감정이 느껴진다. 만약 벤허가 그를 연기한 배우인 찰턴 헤스턴처럼 메살라를 친구만으로 대했다면, 메살라의 감정은 유년시절부터 지속되어온 짝사랑이다. 또한 동성애가 취미 수준으로 빈번했던 로마인 메살라와, 동성애를 죄악시했던 유대인 벤허의 관점 대립으로도 읽힐 수 있다. 비달의 일화가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배경 설정이 메살라가 이후 영화에서 내리는 결정의 동기를 이해하기 쉽다는 점은 수긍이 간다.


벤허의 사업은 그의 심복 시모니데스(샘 자페)의 훌륭한 사업수완으로 나날이 번창해간다. 허 가문에 종속되어 있는 시모니데스는 자신의 딸 에스더(하야 헤러릿)가 결혼할 수 있도록 벤허에게 허락을 구한다. 에스더를 어린 시절 이후 보지 못했던 벤허는 어느덧 청년으로 자라난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하지만, 이미 에스더는 단 한 번밖에 얼굴을 보지 못했던 안디옥의 상인과 혼약을 맺어버렸다. 그날 밤, 잠들지 못한 채 발코니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입맞춤을 나눈다. 벤허는 에스더의 노예 징표 반지를 받아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고 아쉬운 마음과 함께 그녀를 보낸다.


이후, 예루살렘의 총독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부임식을 자택의 옥상에서 구경하던 티르자는 실수로 지붕의 기와를 밀어서 떨어뜨리고, 총독이 타고 있던 말이 놀라면서 그는 낙마 사고를 당한다. 순식간에 벤허의 집에 들이닥친 로마 병사들은 암살 미수죄로 벤허를 체포한다. 직접 옥상에 올라가서 기와를 밀어본 메살라는 사고임을 깨닫지만, 자신의 제안을 무시한 벤허를 벌주기 위해 그를 갤리선의 노예로 보내고, 미리암과 티르자, 심지어 그들의 행방을 찾아온 시모니데스까지 투옥시킨다. 잠깐 탈출을 모색해 메살라를 위협한 벤허는 만약 자신을 죽인다면 모친과 누이가 모두 사형 당하리라는 메살라의 협박에 갤리선으로 끌려간다. 벤허를 포함한 죄수 일행은 수갑에 결박되어 이송되고, 나사렛이라는 작은 마을에 잠시 들리게 된다. 다른 죄수들에게는 입술과 목을 적실만한 물이 허용되지만, 반역죄인 벤허에게는 조금의 물도 허락되지 않는다.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앞에 한 청년이 나타나 물을 떠주고, 그를 막으려던 죄수 이송대의 대장은 청년, 젊은 예수(클로드 히터)의 얼굴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다. 장성한 예수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장면부터, 영화의 마지막까지 예수는 직접 얼굴을 드러내는 장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원작의 작가인 루 월리스는 생전 본인의 작품의 연극화를 반대하다가, 연극 제작자 에이브러햄 에를랭거가 예수의 역할을 배우가 아닌, 조명을 통한 간접 등장으로만 연출하겠다고 설득해서 허락을 했는데, 와일러 감독 또한 배우의 얼굴을 철저하게 가림으로, 원작자의 의도를 최대한 반영했다.


예수(클로드 히터), 〈벤허〉 [출처: FanCaps]


갤리선의 노예로 3년 동안 노를 젓던 벤허는 로마의 집정관이자, 마케도니아 해적 토벌을 위해 파견된 퀸투스 아리우스(잭 호킨스)의 모선에 배치된다. 아리우스는 벤허의 눈길에서 비범함을 알아채고, 자신의 검투사가 되기를 제안하지만 벤허는 노예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다며 거절한다. 마케도니아 해적과의 조우에서 아리우스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벤허의 수갑을 풀라고 명령한다. 혼란한 전투 중, 모선이 파괴되면서 벤허는 아리우스를 구해 배의 파편을 붙들고 탈출한다. 전투의 패배에 치욕을 느낀 아리우스는 자결하려고 하지만 벤허는 그를 계속 막는다. 다행히 로마 전함에 구출된 둘은 아리우스의 모선은 파괴되었지만 전투 자체는 로마군의 대승리였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아리우스는 자신을 구해주고 자결을 막은 벤허에 대한 고마움으로 그를 로마로 데려가 황제 티베리우스에게 접견시키고, 직접 그에게 자유 신분을 부여하기를 부탁하기도 한다. 이후 아리우스 가문의 전차수가 되어 로마 챔피언이 된 벤허는 아리우스의 양자가 되지만, 양부에게 자신의 모친과 누이를 구출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아리우스는 그의 결정을 이해하며 보내준다.


〈벤허〉의 전반부만 보아도 본 작품이 알렉상드르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연상시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쉽다. 누명을 쓰고 나락으로 떨어진 주인공이 복수에 대한 집착으로 기어올라와 사회의 정상까지 올라와 새로운 신분으로 금의환향하는 서사는 관객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그랬듯이, 이러한 형태의 복수극은 성공적인 귀향 이후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관심을 모을 수 있다는 특징에서, 한없이 긴 서사에 텐션을 유지하는 장치로 사용될 수 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던 길에 벤허는 동방박사 중 한 명인 발타사르(핀레이 커리)와 아랍인 부호 일데림(휴 그리피스)과 조우한다. 전차 경주의 스폰서인 일데림은 벤허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채면서 자신의 전차수가 되어주기를 요청하지만 벤허는 가족을 찾기 위해 거절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벤허는 폐허가 된 집에서 숨어 살고 있는 에스더와 재회한다. 그녀는 벤허가 추방당하던 날, 주인의 무고를 웅변하기 위해 메살라에게 찾아간 시모니데스가 고문을 받고 불구가 되자 부친을 간호하기 위해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분노에 가득 찬 벤허는 메살라를 찾아가 로마인 집정관의 양자가 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자신의 친모와 누이를 찾아 내일까지 해방시키라고 통지한다. 메살라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두 여인을 감옥의 구석에서 찾아내지만 그들은 나병에 걸려 살이 썩어 문드러진 상태. 로마 간수들은 그들을 도시 외부로 추방시키고, 미리암과 티르자는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몰래 저택을 방문했다가 에스더와 만난다. 둘은 자신들의 상태를 아들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 당부하고 떠나고, 에스더는 저택으로 돌아온 벤허에게 사실 두 사람은 벤허가 투옥된 날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벤허는 로마인 메살라에게 정당하게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어떤 규칙도 없는 전차 경주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일데림에게 돌아가 그의 전차수 제안을 받아들인다.


전차 경주, 〈벤허〉[출처: FanCaps]


전차 경주가 시작되고, 메살라는 바퀴 양쪽에 날을 장착한 "그리스 전차"를 타고 등장해 벤허를 위협하지만, 결국 벤허의 우월한 전차 조종 실력에 밀려 오히려 자신의 전차가 부서지면서 낙마해 큰 부상을 입는다. 경주를 우승한 벤허에게 죽어가는 메살라는 미리암과 티르자가 나병에 걸려 추방당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나병환자의 계곡을 방문한 벤허는 그곳에서 자신의 가족에게 식사와 물품을 전달하러 온 에스더를 만나고, 에스더는 벤허에게 가족을 만나지 말라고 간청한다. 벤허는 마지못해 발길을 돌리지만, 예루살렘 총독으로 부임한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서 자신의 양부인 아리우스가 전달한 로마 시민권에 대해 듣게 되고, 유대인으로의 자아를 선택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다시 나병환자 계곡으로 돌아가 미리암을 만나고 죽어가는 티르자를 데리고 나온 벤허와 에스더는 모든 이들을 치유할 수 있다는 랍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서지만, 이미 그는 역모 혐의를 쓰고 재판을 받아 십자가형을 받은 상태였다.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의 거리를 걷는 예수의 얼굴을 확인한 벤허는 자신이 노예로 끌려가던 시절, 물을 떠준 청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물을 떠서 먹여준다.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면서 예루살렘에 폭풍우가 내린다. 미리암과 티르자는 기적처럼 나병에서 회복되고, 가족이 결합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를 맺는다.


'대서사극' 영화 장르의 교과서처럼 여겨지는 〈벤허〉지만 본 작품을 와일러 감독의 다른 작품들과 연계해 독해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다. 와일러 감독은 1940년대만 하더라도 『카예 뒤 시네마』의 앙드레 바쟁에게 "얀센주의자 감독"이라고 불리며, "아마 〈제저벨〉(1938), 〈작은 여우들〉(1941), 〈우리 생애 최고의 해〉(1946)에서 순수한 시네마에 도달하지 않은 숏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는 찬사를 듣는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내에서 활동하는 작가주의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잰 허먼의 평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 와일러 감독은 "『카예』는 내가 〈벤허〉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끝까지 용서하지 않았다"라는 증언을 남겼을 정도로, 본 작품은 그의 작품록 내에서도 아웃라이어에 가까운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전작인 〈빅 컨츄리〉의 와이드스크린이 담아낸 시대의 기운과 그레고리 펙이 연기한 발톱을 숨긴 평화주의자 주인공의 궤적이, 해당 작품에서는 조연이자 악역 카우보이 스티브 리치를 맡았던 찰턴 헤스턴에게 넘어가, 유다 벤허의 삶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서사 구조적으로 〈벤허〉는 기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이미 완성된 '폭력과 복수의 사슬을 끊는 사랑과 용서의 힘'에서 크게 발전한 부분이 없다. 연재소설인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복수 과정과 쾌감에 집중하고, 통속적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 결말을 맺었다면, 기독교 소설을 기반으로 한 〈벤허〉는 복수의 성공에 대한 쾌감이 비교적 짧고 허무하며, 용서의 계기를 현실을 초월하는 종교적 체험으로 승화시켰다는 자잘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벤허〉의 종교적 체험은 묘하게 성인 열전(hagiography)으로 도식화된 의무적인 감성에 젖어있다. 허먼의 평전에는 와일러가 말년에 가서 "예수에 관한 훌륭한 영화를 만들기 위해는 유대인이 필요했다"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는 일화가 포함되어 있으며, 와일러 본인은 딱히 유대교, 기독교에 관계없이 딱히 종교에 진지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어쩌면 『카예』가 〈벤허〉를 용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영화의 스케일보다는 서사에서 커다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기독교적 체험에 있어 와일러 감독이 견지하는 외부자적 시선 때문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가 본 영화를 제작한 계기가 세실 B. 드밀 형식의 대서사극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상기해보자. 본 작품은 영화작가의 개인적인 신에 대한 탐구와 사색보다는, 해당 주제에 대한 영화적 표현에 기원을 두고 있다.


〈벤허〉는 기본적으로 아카데미 비율 시대의 종식을 알렸던 〈쿠오바디스〉와, 와이드스크린 시대를 연 〈성의〉, 그리고 그 기운을 이어 영화의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주요 레퍼런스였다고 평할 수 있는 데밀 감독의 야심작이자 감독 생활을 상징하는 〈십계〉로 이어지는 할리우드의 기독교 대서사극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이 작품들은 당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지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산과 관심을 투자하는 텐트폴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작품의 제작과 배급은 진지한 대형 스튜디오의 사명에 가까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코엔 형제의 〈헤일, 시저!〉(2016)에서는 스튜디오 임원 에디 매닉스(조시 브롤린)가 영화의 제목을 따온 동명의 극중극, 〈헤일, 시저!〉의 주인공 베어드 휘트록의 안전에 집착하고, 영화의 고증을 위해 각계의 종교인들을 소집해 자문을 받는 노력을 묘사하는데, 제작사의 입장에서 이런 작품들을 얼마나 특별히 취급했는지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코엔 형제 감독, 〈헤일, 시저!〉(2016) [출처: FILMGRAB]


〈벤허〉는 이러한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제작된 기독교 대서사극 계보의 총아이자, 가장 큰 흥행과 기록에 남은 11개의 아카데미상으로 미국 영화를 대표하는 레퍼런스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2년 후, 니콜라스 레이 감독이 연출한 〈왕중왕〉(1961), 〈벤허〉와 동일하게 울트라 파나비전 70으로 촬영된 〈최고의 이야기〉는 예수의 삶을 직접적으로 그려냈지만, 예수의 얼굴이 비치지 않은 〈벤허〉에 비해 오히려 흥행성적은 초라했으며, 이후 1960년대 말 도래한 뉴 할리우드 세대 감독들의 냉소적인 시선과, 스필버그를 필두로 제임스 카메론, 조지 루카스 등의 감독이 연출한 SF 블록버스터 장르에 밀려 기독교 대서사극은 스튜디오 텐트폴의 위치를 내어준다.


실제로 성경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 다시 대중의 인구에 회자될 정도로 흥행에 성공한 기록은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기념비적인 첫 번째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1998),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 그리고 2014년 연달아 개봉한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노아〉(2014),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2014)이 유일하다. 이 중, 멜 깁슨을 제외한 나머지 세 작품의 경우는 성경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지만, 기독교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일단 세 작품 모두, 성경의 구약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며, 〈벤허〉가 견지했던 미국을 대표하는 종교에 대한 서사라기보다는, 개별 작품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펙터클과 엔터테인먼트를 담은 신화의 감상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벤허〉가 지닌 총체적 영화라는 특수한 포지셔닝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벤허〉는 앞서 이야기했듯이 일련의 계보를 잇고 있는 작품이며, 그에 기반해 지극히 영화가 제작된 조형의 시대에 속하는 작품이다. '역사 영화'라는 장르 분류에서, '역사' 뿐만이 아니라, '영화'로도 과거의 조류를 흡수해 화면에 모두 담아내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 시대를 다룬 역사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총체를 필름에 담는 데 성공했다'라는 감상으로 수렴한다. 이는 미시사에 대한 천착으로 독특한 사유에 이르거나, 시대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해 현대의 관객에게 말을 걸고 있는 역사 영화와는 다르게, 맥시멀리즘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는 특징이다.


작품의 배경을 살펴보자. 먼저, 예수의 탄생을 담은 오프닝 시퀀스부터,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예루살렘, 로마군의 유명한 갤리선이 전투에 돌입하는 지중해, 세계의 수도 로마의 옥좌에 앉아있는 티베리우스 황제와 화려함의 극치인 퀸투스 아리우스의 빌라, 일데림의 천막을 둘러싼 사막, 광야 한가운데 나병환자의 계곡, 예루살렘의 전차 경주장, 그리고 골고타 언덕까지, 영화는 만약 예수의 삶만을 따라갔다면 등장하기 어려운 다양한 배경을 벤허라는 인물의 인생을 통해 등장시킨다. 하지만 다양한 배경은 와일러 감독이 와이드스크린 포맷에 대해 느꼈던 취약점 중 하나인 주변 인물(엑스트라)의 기능에 대한 본질적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물론, 그 유명한 전차 경주 시퀀스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경탄스러울 정도의 현장감과 박진감 넘치는 미장센, 스턴트,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만약 아카데미를 열광시키고, 『카예』가 기겁하고 물러서게 만들었던 씬이 바로 이 전차 경주 시퀀스라면, 와일러 감독 연출의 정수는 승리 직후에 이어지는 메살라의 죽음 묘사라고 주장하고 싶다. 예루살렘 전체의 인구가 한 곳에 모였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의 군중과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밝게 비친 경기장, 세계를 발아래 두려는 로마 제국의 위용을 보여주는 각지의 복식, 고속 질주하는 전차들. 하지만 직후에 이어지는 어두운 선수대기실, 잊힌 채로 널브러진 짓밟힌 전차수들의 넝마 같은 주검들은 롤러코스터 드롭에 가까운 편집 리듬을 통해 와일러가 관객의 감정을 얼마나 자유자재로 조율하는지 증명해내고 있다.


(左) 전차 경주, (右) 경주 이후 죽어가는 메살라(스티븐 보이드), 〈벤허〉 [출처: FanCaps]


엄청난 스펙터클과 승리에 대한 도취감으로 인해 차오른 아드레날린은 순식간에 갈 곳을 잃고 방황한다. 전차에 짓밟혀 온 몸이 부서진 메살라의 고통과 독기, 메살라와 벤허 간 복잡다단한 관계의 청산은 단순한 분위기 반전 이상으로 기능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여겨졌던 전차 경주 시퀀스가 사실은 연막이었으며, 잠시 잊고 있었던 오프닝의 주인공, 예수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종장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명료하게 전달하는 다면 서사 구성의 마스터클래스다.


〈벤허〉의 울트라 파나비전 70은 그 광활한 화면비를 시대상으로 채워가고 있으며, 화면에는 지금껏 필름에 담겼던 시대의 전체를 아우른다는 야심이 흐르고 있다. 이는 와일러 감독이 선호하는 딥 포커스 촬영 방법과 연계를 일으켜, 카메라 내의 시대가 모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달리 말하면, 이 세계 내에는 흐릿한 구석과 그림자가 없고, 카메라 세계의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카메라가 가리키고 있는 대상이 세계 전체를 의미하고 있기에, 종교와 신화에 도취된 서사와는 달리, 영화 자체에는 신비감이 결여되어 있다. 와일러 감독 본인은 "유대인이 만든 예수 영화"라고 농을 쳤지만, 본 작품은 '영적 체험을 이론적으로만 경험한 작가의 종교 영화'라는 묘사가 더욱 어울리지 않을까.


앤서니 만, 서부에서 대서사극으로


앤서니 만 감독, 자넷 리, 〈운명의 박차〉(1953) 촬영 중 [출처: Wikimedia Commons]


〈벤허〉의 성공으로 할리우드 대표 흥행배우 위치를 공고히 다진 찰턴 헤스턴은 2년 후, 앤서니 만 감독의 〈엘 시드〉(1961)에서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극의 주인공, 로드리고 디아스 데 비바르의 역할을 맡는다. 〈엘 시드〉는 만 감독에게 있어서는 특이한 작품이었는데, 40년대 초 〈닥터 브로드웨이〉(1942)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40년대 후반 필름 누아르 장르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고, 50년대에 들어와서는 서부극의 장인으로 변신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엘 시드〉는 만 감독에게 있어서는 경력 중 처음으로 도전해보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그가 미국의 국민배우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한 서부극 〈윈체스터 78〉(1950)은 큰 흥행에 성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스튜어트의 영화 인생 후기를 여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스튜어트는 만 감독과의 궁합이 좋다고 느꼈던지, 둘은 5년 내 4개의 서부극, 〈분노의 강〉(1952), 〈운명의 박차〉(1953), 〈머나먼 서부〉(1954), 〈라라미에서 온 총잡이〉(1955)까지 협업을 지속한다. 스튜어트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입대하기 이전에는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턴에 가다〉(1939)와 같은 드라마나 조지 큐커 감독의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와 같은 코미디에서 활약하던 호감상의 배우였는데, 앤서니 만 감독과의 협업을 통해 필름 누아르 영향을 다분히 받은 음울하고 폭력적인 서부극으로 연기 변신에 성공했고, 이후 50년대 중반부터는 스튜어트의 연기 변화를 눈여겨본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이창〉(1954), 〈현기증〉(1958)에서 커리어 대표의 연기를 펼치기도 한다. 한편 심지어 스튜어트가 아니더라도 만 감독은 로버트 테일러와 함께한 〈지옥문을 열어라〉(1950), 헨리 폰다가 주연한 〈가슴에 빛나는 별〉(1957), 게리 쿠퍼의 〈서부의 사나이〉(1958) 모두 연출하면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리딩맨들과는 모두 서부극을 한 번씩 촬영하였을 정도로 장르를 대표하는 흥행 감독으로 여겨졌다.


〈엘 시드〉는 만 감독의 첫 번째 중세 역사 대서사극이었지만 훌륭한 평가를 받으며 누아르, 서부극에 이어지는 만 감독의 세 번째 전성기의 전조를 알리는 듯 보였다.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지는 〈엘 시드〉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1993년에는 직접 작품의 복원에 참여해 미라맥스를 통해 영화가 재개봉되는데 일조했으며, 2000년대에는 수집용 DVD 발매를 하면서 부가 영상을 직접 제작하는 등 작품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았다. 만 감독이 〈엘 시드〉의 성공 이후 눈을 돌렸던 주제는 그가 서점에서 찾은 에드워드 기번의 고전 역사서인 『로마 제국 쇠망사』로, 그는 로마 제국의 황혼기를 주제로 한 영화를 〈엘 시드〉와 〈왕중왕〉의 제작자인 새뮤얼 브론스톤에게 제안했다.


본작의 주연은 〈엘 시드〉에서 앤서니 만 감독과의 이미 협업 경험이 있었고, 〈벤허〉에서 로마 제국을 주제로 한 대서사극의 주연을 맡았던 찰턴 헤스턴으로 내정되어 있었지만, 그가 니콜라스 레이 감독의 〈북경의 55일〉에 주연하기로 결정하면서 〈벤허〉에서 조연 메살라를 맡았던 스티븐 보이드가 주연으로 결정되었다. 그 외에도 왕립 셰익스피어 극단 출신으로, 추후 〈스타워즈〉(1977)에서 오비완 케노비 역을 맡게 되는 알렉 기네스, 셰익스피어 원작을 기반으로 한 〈줄리어스 시저〉(1953)에서 브루투스 역할로 주연을 맡았던 제임스 메이슨, 연극 무대와 브로드웨이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아온 젊은 배우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조연으로 캐스팅되었지만, 흥미롭게도 영화 크레딧의 톱 빌링을 따낸 배우는 소피아 로렌이었다. 당시 소피아 로렌은 이탈리아를 넘어, 할리우드와 세계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비토리아 데 시카 감독의 〈두 여인〉(1960)에서의 연기로 칸 영화제와 아카데미에서 동시에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등, 커리어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었다. 〈로마 제국의 멸망〉에서 소피아 로렌이 받은 출연료는 1백만 달러로, 로렌 이전 이 기념비적인 출연료를 달성한 여배우는 조세프 맹키위츠 감독의 〈클레오파트라〉(1963)에서 작품의 제목이 되는 주인공 역할을 맡은 엘리자베스 테일러뿐이었다.


(左) 〈엘 시드〉(1961), (右)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CineMaterial]


앤서니 만 감독이 본 작품을 만들면서 〈벤허〉를 무시하기란 어려웠으리라. 그는 〈벤허〉와 동일하게 울트라 파나비전 70의 2.76:1 화면비로 영화를 촬영했는데, 묘하게도 영화는 로드쇼에서 2.20:1 화면비로, 정식 개봉 시에는 2:35:1로만 상영되었다. 2011년, 원본 70mm 필름에서 8K 디지털 이미지로 리마스터링 되어 와일러 감독의 딥 포커스 기술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벤허〉와는 달리, 〈로마 제국의 멸망〉은 21세기 하이데프 시대에 와서도 제대로 된 리마스터링을 거치지 못했으며, 결국 상이한 화면비와 현대 홈비디오의 화질 차이 때문에 같은 울트라 파나비전 70 카메라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선뜻 믿기 어려운 상황이다.


리마스터링에 들여진 노력의 차이에서도 보이듯, 두 작품에 대해서는 묘한 온도차가 존재하는데 이는 아마 〈로마 제국의 멸망〉이 개봉 당시 비평과 흥행에서 참패를 겪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정된다. 본 작품의 실패로 인해 제작자 새뮤얼 브론스톤은 파산신청을 했으며, 그 와중에 개인 재무에 대한 조사로 인해 밝혀진 스위스의 비밀 계좌로 인해 위증죄 혐의를 쓰게 되면서 영화계에 발을 붙이기 어려워졌다. 앤서니 만 감독 또한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영화인 〈텔레마크 요새의 영웅들〉(1965)을 연출했으나, 본인의 누아르 뿌리로 회귀한 차기작 〈아스픽의 멋쟁이 (A Dandy in Aspic)〉(1968)을 촬영하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작품의 흥행 참패가 제작자와 감독의 초라한 말년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로마 제국의 멸망〉은 실패작의 대명사처럼 불리게 되었고 잊힌 작품 취급을 받고는 했다. 하지만 35년의 시간이 지난 후 개봉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2000)와 유사점이 발견되면서 클래식 할리우드 최후의 로마 제국 배경 대서사극으로 다시 언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은 할리우드에서 로마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서사극 텐트폴을 끝내버린 저주받은 작품으로만 받아들여지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는 작품이다. 로마 제국 북부군 사령부의 엄숙하고 검소한 분위기를 의인화시킨듯한 로마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철인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알렉 기네스)의 자아성찰은 로마 제국을 다룬 그 어떠한 작품에 비교해 보아도 더할 나위 없이 진중하다. 영화 전반부의 배경인 도나우 강 근처 황량한 북부군 사령부와는 반대로, 영화 후반부의 배경인 호화와 문명의 수도 로마는, 동시대를 다룬 〈글래디에이터〉, HBO의 TV 시리즈 〈로마〉(2005), 스타즈의 TV 시리즈 〈스파르타쿠스〉(2010) 등 현대의 작품들이 빠지기 쉬운 과장된 폭력과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는 고대 문명 연출에 도취되지 않으면서도, 고결한 위용을 자아낸다. 로마 제국의 양면을 상징하는 듯한 두 배경은, 평생을 전쟁터에서 검소하게 살아가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향락에 취해 살아간 그의 아들, 콤모두스(크리스토퍼 플러머)를 무척이나 닮아있다. 또한 두 황제의 아래에서 차선과 차악의 선택을 강요당하는 두 주인공, 루실라(소피아 로렌)와 리비우스(스티븐 보이드)의 삶은 신 또는 시대의 조류에게 희롱당하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처럼, 비장감과 무력감, 그 사이 발생하는 숭고한 처연함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의 세계

앤서니 만 감독, 〈로마 제국의 멸망〉(1964) [출처: DVDBeaver]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는 제목과는 달리, 영화는 실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기원 476년이나,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453년이 아니라, 5현제 시대의 마지막 군주인 180년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알렉 기네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앤서니 만 감독 또한 일반 관객이 느낄만한 영화의 제목과 실제 시대 배경의 간극에 대한 위화감을 충분히 공감하고 있기에, 영화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에 대한 내레이션과 함께 시작된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난제 중 두 개는 로마의 발흥, 그리고 멸망의 이유들이다. 진실에 대해 다가가려면, 로마의 멸망은 그 발흥과 동일하게 하나가 아닌 수많은 원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300년에 걸친 시간 동안 벌어진 과정이었고, 어떤 국가들은 로마가 쇠락해가는 기간만큼도 존속하지 못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해 이 정도로 우아하게 설명을 하기도 어렵다 생각되지만, 한편으로는 앤서니 만 감독은 영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본인의 의지로 자신을 구석에 몰아넣고 있다는 감상을 금할 수 없다. 적어도 영화라는 매체로는 쉽사리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놓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개봉 후에 받았던 비판들은 이 작품을 지탱하는 질문의 거대한 범위와 어느 정도 연결되어 있다. 『뉴욕타임스』의 평론가 보슬리 크로더는 영화가 "너무나도 거대하고 일관성이 없기에 … 영화의 주인공들 중 관객이 굳이 공감하고 신경 쓸 만한 인물이 없다."라고 평했으며, 이는 당시 작품을 바라보던 시선을 어느 정도 종합한 의견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알렉 기네스),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영화는 기원 180년, 로마 제국의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게르만족 토벌을 위해 직접 이끌고 있는 도나우 강가의 북부군 사령부에서 시작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금욕과 합리주의적인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 스토아학파에 경도된 인물로, 편하게 수도인 로마에 남기보다는 본인이 직접 전쟁터에 나서 자신의 건강을 학대하다시피 하면서 제국 변방의 환경을 직접 경험하려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러 제국의 변방까지 온 각 지역의 소수민족들을 접견하고, 그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팍스 로마나, 모든 민족이 인종과 종교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로마의 시민으로 대우받는 미래를 설파하며, 자신의 고뇌를 기록으로 남기는 『명상록』 집필에 몰두한다.


그를 돕는 두 인물은 장군인 가이우스 리비우스(스티븐 보이드)와 그리스 노예 출신으로 황제의 서기 자리까지 오른 티모니데스(제임스 메이슨)로, 이들은 황제가 바라는 로마 제국의 이상적인 미래에 적극적으로 공감을 하고 그에게 충성을 바친다. 한편, 부친을 돕기 위해 도나우를 방문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루실라(소피아 로렌)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리비우스와 재회하고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한 애정이 깊어졌음을 깨닫는다. 그렇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의 동부 전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하여 루실라를 아르메니아의 왕인 소하이무스(오마 샤리프)와 정략결혼시키기로 결정하고, 두 연인은 서로에 대한 애정과 황제에 대한 충심 사이에서 고통스러워한다.


루실라(소피아 로렌),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황제의 가장 커다란 걱정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 콤모두스(크리스토퍼 플러머)의 문제로, 콤모두스는 부친과는 상극인 사치와 폭력에 도취된 삶을 추구한다.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혈통이 아니라 능력과 이상을 기반으로 리비우스를 선택하려 한다는 결심을 그와 루실라에게 내비친다. 건강이 악화된 부친을 방문한 콤모두스는 함께 자라온 리비우스와 재회해 회포를 나누지만, 그의 입에서 자신의 부친이 황제 승계의 건에 있어 아들을 제외하고 리비우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듣자 몹시 실망한다. 게르만족과의 전투에 돌입하자 리비우스는 무모하게 먼저 진격하고, 심지어는 리비우스에게 시비를 걸면서 〈벤허〉를 떠올리게 만드는 전차 경주를 벌이기도 한다. 황태자의 불안정한 상태를 본 그의 심복들은 콤모두스를 황제로 추대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독살 계획을 실행한다. 루실라와 리비우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리비우스를 후계자로 공표하려 했다는 의중을 알고 있지만 황제가 정식 문서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리비우스는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루실라의 반대를 무릅쓰고 콤모두스를 황대로 추대한다. 루실라는 그런 리비우스를 원망하며 아르메니아로 떠난다.


영화의 전반부는 친가족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실라, 콤모두스, 그리고 양자-양부의 관계를 형성한 리비우스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는데, 흔들리는 가부장의 권력은 앤서니 만 감독의 작품세계에서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주제 중 하나이다. 바로 직전 작품인 〈엘 시드〉는 종교에 관계없이 포로의 인권과 자유를 지향하는 돈 로드리고(찰턴 헤스턴)와 그의 약혼자 히메나(소피아 로렌)의 아버지인 고르마즈 백작(앤드류 크루익샹크)이 상징하는 절대 권력에 대한 충의가 격돌하면서 시작된다. 또한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드(랄프 트루먼)의 사망 이후 야심에 찬 그의 두 아들 알폰소(존 프레이저)와 산초(게리 레이먼드)가 왕위를 얻기 위해 왕국의 분열을 일으키는 과정 또한 가부장의 권력이 위협당하면서 야기되는 혼란을 그려낸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만 감독이 이러한 과정을 연출하는 손길에는 어떤 가치 평가가 결핍되어 무심하다시피 한 기운이 느껴진다. 오히려 가부장의 권력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혼돈과 비극으로 인해 예술 작품으로 승화될만한 가치가 있는 서사가 생성되었다는 기묘한 감상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이나 『엘렉트라』를 위시한 부모-자식 간의 비참한 숙명을 노래한 고대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만든다.


콤모두스의 치세가 시작된 이후, 로마는 극도의 화려함을 추구하는 황제의 기풍에 따라 변경 지역과 소수민족에 대한 세금을 높이고 모든 부를 수도로 집중시키면서 혼란에 빠지기 시작한다. 북부 사령관이 된 리비우스는 게르만족을 토벌하고, 티모니데스의 도움으로 그들이 자의적으로 로마제국의 통치하에 들어오도록 설득해 수도로 데려온다. 이민족을 모두 압제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콤모두스는 루실라를 수도로 소환해 리비우스와 재회시키고 만약 게르만족의 로마제국 이주 계획을 철회한다면 루실라와 결혼할 수 있도록 자신이 주선하겠다고 제안한다. 하지만 리비우스는 콤모두스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티모니데스와 함께 원로원을 설득해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로 이주해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이에 분노한 콤모두스는 리비우스를 다시 도나우로, 루실라를 아르메니아로 되돌려 보낸다.


콤모두스(크리스토퍼 플러머),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콤모두스 황제의 폭정을 참지 못한 변방의 군벌들과 로마의 변경백들은 창끝을 로마로 돌려 반란을 일으킨다. 유일하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북부군 리비우스는 과거의 동료들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고, 그곳에서 루실라가 자신의 남편인 소하이무스를 도와 반란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루실라는 콤모두스를 몰아내고 로마 제국을 구원하자면서 리비우스에게 자신과 함께 하기를 청원하지만 그 순간 소하이무스가 비밀리에 불러온 로마 제국의 라이벌, 페르시아 군대가 들이닥치면서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반란군은 페르시아 군대를 보고 리비우스의 지휘 아래 모여 전투에서 승리한다. 이에 크게 기뻐한 콤모두스 황제는 리비우스에게 자신과 함께 공동 황제가 되어 제국을 통치하기를 제안하면서, 그 조건으로 반란군의 숙청을 요구한다. 리비우스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향하자 콤모두스는 티모니데스가 이끌고 있는 게르만족 정착지를 학살한다.


리비우스는 콤모두스를 벌하기 위해 홀로 로마로 입성하면서 자신이 돌아오지 않으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들어오라고 당부를 남긴다. 하지만 이미 원로원은 콤모두스를 신황제로 추대하였고, 콤모두스는 로마의 금을 긁어모아 리비우스가 규합한 군대를 뇌물로 유혹한다. 루실라는 혼란 중에 리비우스를 찾으러 로마로 들어가지만, 리비우스와 함께 사로잡혀 화형대에 서게 된다. 콤모두스는 리비우스를 화형 시키기 전, 자신이 자신 있는 일대일 결투를 통한 마지막 승부를 제안하고, 리비우스는 전투에서 간신히 승리하고는 화형 당하기 직전의 루실라를 구출해낸다. 로마의 장군들은 리비우스에게 황제가 되기를 청원하지만, 그는 로마가 이미 쇠락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루실라와 함께 제국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리비우스가 거절하자마자 로마의 왕위는 가장 높은 가격을 부르는 권력자에게 계승되리라는 암울한 미래를 암시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리비우스(스티븐 보이드),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영화로 대답하기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질문을 던진 만 감독의 세계는 와일러 감독의 〈벤허〉, 혹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스파르타쿠스〉와는 달리, 언뜻 보면 거대한 역사의 조류에 표류해 허우적거리고 있다. 〈벤허〉와 〈스파르타쿠스〉의 감독들은 자신들의 영화가 어떤 영화인지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고, 그들이 설정한 세계의 범위를 필름 위에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에 반해, 〈로마 제국의 멸망〉은 영화 전체가 초기의 질문에 대한 3시간의 대답으로 구성되어있고, 때문에 작품의 얼개가 영화가 진행되면서 함께 지어지고 있다는 감상을 준다. 때문에 만 감독이 질문의 대답에 성공했는지는 그 구축 과정을 받아들이는 관객마다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다.


예컨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암살 직전, 그가 자신의 방을 거닐며 자문자답하는 씬을 살펴보자. 배우가 후시녹음한 내레이션이 그의 내면의 목소리로 흐르고, 그가 현장에서 육성으로 연기하는 대답이 교차되면서, 자신을 찾아온 죽음과 씨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지독한 궤양으로 고생하면서 암세포의 전이를 예감하고 있다. 그는 이 순간 죽음이 찾아온다면, 평생 철학과 대화를 통해 진실을 추구해온 자신의 이상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절망하면서도, 인간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방법은 대화밖에 없다는 역설을 마주하고 있다. 자승자박에 가까워 보이는 이 내면의 문답록은 만 감독이 영화를 통해 구축하려는 대답의 기반이 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알렉 기네스),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자그마한 궤양 하나로 인해 시작되는 인간의 죽음만큼이나, 제국의 멸망 또한 작은 암세포로 인해 시작된다. 그리고 그 멸망의 과정은 그리스 비극에서 그려지는 숙명적 파멸처럼, 어떤 한 개인의 노력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탈출할 수 없는 쇠락의 길에서 절망하기보다는, 2년, 아니 1년이라도 자신의 삶을 연장해서라도 대화를 이어가기를 희망하고 있다. 물론, 그의 희망은 독살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하고 허무하게 끝이 나고 만다.


그의 의지를 계승한 리비우스와 티모니데스는 콤모두스의 폭정으로 인한 제국의 멸망을 예감하고 있음에도 게르만족을 설득해, 그들을 평화롭게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중단하지 않는다. 티모니데스는 게르만족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의 손이 타들어가는 고통도 참아내고, 리비우스는 원로원을 설득시키기 위해 자신에게 약속된 루실라와의 결혼 또한 포기한다. 이들이 자신들의 개인적 영달을 모두 희생해가면서 얻어낸 이탈리아의 게르만족 부락은 잠시간의 평화와 부흥을 누리지만, 리비우스에게 분노한 콤모두스의 명령 아래 불태워지고 짓밟힌다. 게르만족과 함께 살해당한 티모니데스의 얼굴을 보면서, 리비우스는 제국의 멸망이 도래했음을 탄식한다. 만 감독은 표면적으로는 로마 제국은 왜 멸망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질문하고 있지만, 실제로 화면에 구축된 세계는 그 멸망의 과정 속에서 어떠한 고귀한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대답하고 있다.


만 감독의 결론은 1964년, 미국인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무척 당혹스러운 성질의 대답이었다. 물론 영화의 기획과 제작은 훨씬 전에 시작되었지만, 영화 개봉 1년 전, 진영을 초월해 존경받았던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암살을 목도하였던 미국인들은 불안정한 시대상과 냉전시대의 시작과 〈로마 제국의 멸망〉 내에서 그려지는 세계의 유사성에 께름칙한 반응을 보였을 수도 있다. 1964년으로 돌아가 보자. 케네디 대통령이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과의 우주 경쟁에 돌입해 달에 인간을 착륙시키겠다는 포부를 내비친 순간이나, 쿠바 미사일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낸 결단력, 인종간 화합을 위해 연방 대법원의 첫 흑인 판사인 서굿 마셜을 임명한 진보적 행보는 팍스 로마나와 비견될만한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으나, 그의 때 이른 죽음으로 인하여 이러한 희망의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장례식, 〈로마 제국의 멸망〉 [출처: DVDBeaver]


〈로마 제국의 멸망〉의 영화 세계에서 진보적 식견과 결단력으로 팍스 로마나를 주창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의 이유는 전염병으로 기록되어 있는 역사와는 달리, 독을 사용한 암살로 각색되었다. 그 이후 혼란에 빠진 제국의 모습과, 황위가 매물처럼 취급되는 엔딩은 영화 세계 바깥의 세상과 떼어놓고 관망하기 어려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벤허〉처럼 질문과 대답에 이르는 과정이 명료하고 구원의 희망을 담은 작품과는 달리, 사방팔방으로 흘러넘치는 서사의 타래를 예정된 멸망으로 회수해버리는 고대 그리스 비극에 가까운 〈로마 제국의 멸망〉은 대중적으로 흥행에는 지나치게 우울한 분위기를 풍긴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멸망〉이 필름 위에 담아낸 로마 세계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의 비극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억울한 면이 있다. 영화를 여는 북부군의 진영에 모여드는 각지의 군대들의 위용이라거나, 눈이 쌓인 숲에서 격돌하는 로마 군대와 게르만족의 전투는 경탄스러울 정도의 현장감이 느껴지며, 최대 규모의 야외 세트로 세계 기록에 등재될 정도로 거대한 400 × 230 미터의 위용을 자랑했던 로마의 광장은 카메라 내 세계의 질감에 실물성을 더한다. 영화의 종장, 리비우스와 콤모두스의 결투는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그 어떠한 영화에서 연출된 검투와 비교해도 압도적으로 날 선 긴장감을 연출해낸다. 낭비스럽다고 생각될 정도의 프로덕션 디자인, 영화가 던지는 거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복잡다단하고 철학적인 대답, 로마 제국의 북부 변경, 동부 변경, 수도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적 배경, 그리고 이 모든 영화적 요소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그리스 비극의 기운은 필름 밖으로 흘러넘치고 있다.


누군가에게 이러한 과잉은 영화 작가의 야심이 너무 컸기에 필름 안에 총체적으로 담기는데 실패했다는 감상으로 수렴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과포화 상태가 〈로마 제국의 멸망〉을 그 어떤 로마 제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비교하여도 가장 대서사극이라는 장르에 어울리는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카메라가 비추고 있는 세계의 외부가 살아있다(혹은 멸망해 간다)는 징후가 느껴지고, 만 감독은 그 세계 중 자신이 영화에 기록하기로 결정한 장소를 향해 선택적으로 카메라를 돌린다. 때문에 〈로마 제국의 멸망〉이 울트라 파나비전 70으로 촬영되었지만, 단 한 번도 촬영비와 동일한 2.76:1의 화면비로 상영되지 않고, 사이드를 크롭 해낸 2.35:1 비율로만 공개되었다는 사실은 묘하게 의미심장하다. 화면에서 넘쳐, 영화 세계와 이어지는 외부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서사시적 영화 감각이란 관객의 이해와 인지에서의 성공스런 탈출과 맞닿아 있을 수도 있다.


마침

울트라 파나비전 70은 기술적으로는 단순히 광활한 화면을 담아내는 카메라일 뿐이다. 하지만 그를 마주했을 때 영화 작가가 느끼는 감상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이를 캔버스로 인식한다면 늘어난 만큼의 빈 공간을 정교하게 채우기 위한 연출적 노력으로 이어지며, 이를 렌즈로 인식한다면 그만큼 카메라 밖의 세계를 확장시킨다. 물론,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와 앤서니 만 감독의 〈로마 제국의 멸망〉이 두 방법론을 대표하는 작품이라거나,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이 더욱 뛰어나다고 단언적인 결론을 내릴 생각은 없다. 하지만, 늘어난 화면비에 대응하는 자세의 미묘한 차이는 대서사극이라는 장르에 대해 색다른 시선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와는 별개로, 만약 역사 영화의 팬이라면, 울트라 파나비전 70이라는 카메라 자체가 담아내는 역사 세계의 웅장함에 경도됨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벤허〉와 〈로마 제국의 멸망〉에서 수평으로 아득히 뻗어나가는 거대한 세계를 보다 보면,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헤이트풀 8〉의 세계를 머릿속에 구축하면서 가장 먼저 했던 작업, 영화 세계를 비출 뷰파인더인 카메라와, 그 세계의 기반이 되는 배경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을 할 수 있다.


숨이 멎을듯한 70MM 필름에 담긴 설산.


(끝)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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