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2016-12-20)
학교 앞에 새로운 커피 가게가 생겼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900원. 더할 나위 없이 ‘착한’ 가격에 너도나도 몰려들었다. 한참을 기다려서 겨우 주문했다. 우리 일행의 주문을 받은 점원은 커피를 내렸다. 밀려드는 주문에 쉴 틈이 없었다. 앉을 자리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땀을 뻘뻘 흘리다가 음료가 나왔다고 외쳤다. 그렇게 손에 쥔 커피 잔에는 큼지막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비록 최저임금일지라도 커피만큼은 최고’라는.
‘착한’이라는 표현은 언제부턴가 가격을 수식하는 고정 멘트가 됐다. 이른바 맛집 프로그램들에서는 어김없이 음식의 가격에 대해서 말한다. 푸짐한 양에 저렴한 가격을 지칭해서 ‘착한 가격’이라고 부른다. 조금 비싸다 싶으면 ‘안 착하다’고 말한다. 미디어가 사용하면서 ‘착한 가격’은 전 국민의 언어가 됐다. 소비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알린다는 취지지만 자칫 독이 될 수 있다.
2016년 12월 15일 <한국방송>(KBS)에서 방송된 <2TV 생생정보>에서는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는 음식점을 소개했다. 제육볶음과 양념게장까지 20가지의 음식을 줄줄이 소개한 뒤 저렴한 가격을 언급한다. 이어 무한리필 만두전골 가게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푸짐한 양과 가격을 다른 가게와 비교하며 칭찬한다. 꼭 한번 가보라는 추천을 빼놓지 않는다.
미디어가 말하는 ‘착한’ 가격은 무한경쟁의 산물이다. 늘어나는 경쟁 상대와 다양한 할인 혜택을 제공하며 골목까지 들어선 대기업 프랜차이즈 속에서 소규모 영세 자영업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가격을 낮춰야 했다. 가장 먼저 줄이는 항목은 인건비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줄이거나 없애고, 더 적은 수의 인원으로 업무의 양을 분담한다. 같은 비용을 받으면서 일이 늘어난다. 하루 노동 시간도 늘어난다. 자연스레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몰린다. 소비자가 현명해지는 동안 노동자는 정당한 노동의 가치를 잃는 바보가 되었다. ‘착한’ 가격이 아니라 ‘나쁜’ 가격인 셈이다.
정책은 미디어의 언어를 고민 없이 옮겼다. 행정자치부에서는 착한가격업소라는 제도를 운영 중이다. 해당 누리집의 설명에 따르면 착한가격업소란 ‘저렴한 가격과 청결, 기분 좋은 서비스 제공으로 소비자 만족을 드리는 업소’다. 싼 ‘가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때문에 착한가격업소 인증을 유지하기 어려워 인증을 포기하는 업소가 속출했다. 2012년 말 1092개에 이르던 서울시의 착한가격업소는 4년 동안 270개나 이탈했다. 노동가치에 대한 고민이 빠진 채 만들어진 정책의 현주소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단어는 이곳저곳 넘쳐난다. 길거리, 뉴스 각종 블로그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저렴하면 ‘착한’이라는 수식어가 안 붙는 곳이 없다. 단어 뒤에 숨은 폭력을 보지 못한 채 말이다. 맛 좋고 품질 좋은 커피를 저렴하게 소비하는 일은 문제 있는 것 아닐까? 스펙 좋고 열심히 일하는 당신의 인건비가 저렴한 것만큼이나.
*한겨레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2016-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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