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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희 Aug 11. 2017

인간은 던져진 존재

접촉의 심리치료 48 |  의식의 교착상태 해결을 위한 rebooting

내가 직면하는 모든 우연적 현실은 그물망처럼 서로 긴밀하게 엮인 관계,
축적된 업보, 미해결 과제로부터 발생하는 필연적 사건이다.     


깊은 슬픔

첫인상이 차가운 느낌을 주면서도 깊은 매력을 느끼게 하는 미모의 중년 여성과 마주 앉았다. 이 내담자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지 않고 허리를 반듯하게 펴고 패션모델같이 앉아 있었다.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간간이 활짝 웃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다. 하지만 활짝 웃을 때 아름답던 그 웃음은 아주 잠깐 남았다가 바로 사라졌다. 이 사람의 이러한 긴장은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하며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누가 소개해주어서 호기심에 와보긴 했는데, 사실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중간 간부라 일이 좀 힘들어 그렇지 가정에 돌아오면 잘 난 남편과 아무런 문제 없이 잘 자라주고 있는 아이들……. 매일 피트니스센터 가서 운동하고. 뭐 좀 힘든 일들이 있더라도 세상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닌가요?”      


자신은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그이가 느끼는 감정과 정서는 의도적인 허용범위 안에서 지극히 제한적으로 표현되었고, 그 흔적을 바로 거두어갔다. 그런 그의 태도로 알아차릴 수 있듯이, 그를 이 자리에 오게 했던 내용은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한다. 관계에서 정을 주고받는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신체심리치료 전개 방식의 핵심은 몸의 접촉을 통해서 몸으로부터 마음속 마음, 즉 억압된 무의식의 센터에 접근(outside-in)하는 것이다. 자신의 내면세계와 만남의 장(field)에서 떠오르는 알아차림의 내용들은 무의식에 억압되어 저장된, 의식적인 자각은 없지만 현재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암묵적(暗默的)인 기억과 체험의 콘텐츠들이다. 이런 느낌과 파편화된 기억들에 대한 회상들을 말로 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면서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도록(inside-out) 촉진해주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부분에선 말로 하는 심리상담의 기법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무의식에서 떠오른 스토리텔링을 막힘없이 내담자의 자유 연상을 통해 의식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수용해주는, 공감적 경청이다. 그리고 내담자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으면서 이야기의 맥락이 잘 이어지면서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야기의 묶음을 요약해서 반영해준다. 그와 함께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담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과 비언어적인 변화를 살핀다.  

    

제주에서. 이달희 사진

의식으로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다

내담자와의 대화는 이렇게 부드럽게 진행되다가 내담자가 한 말 중 특정한 문장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나의 의식 속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이해의 실마리가 될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도 내 의식 속에서 사라져 버려 몇 번을 ‘무슨 얘기였지요? 다시 말해주겠어요’하며 되물었다. 내 머릿속에 입력되자마자 증발되어버렸던 그 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인간은 어차피 던져진 존재잖아요. 하이데거가 말한.”      


이 혼란스러움을 내 안에서 체험하면서 그 현상이 일어나게 했던 의식의 근원으로 잠시 따라가 보았다. 그리고 ‘아하’하면서 몸에 전율이 일었다. 이것은 바로 청춘의 시절에 고통스럽게 직면해야 했던 바로 그것. ‘존재함의 허무’였다.


소크라테스는 진리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전혀 모르는 것에 관해서는 물어야 할 방법조차 모른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어떻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가? 우리의 영혼은 하늘의 이데아계에서 진리를 배웠으나, 지상에 내려올 때에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렇지만 어슴푸레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관하여 질문할 수 없다.”


이러한 역설(逆說)로부터, 하이데거는 생각하기를 시작했다. 진리를 알지 못하는 우리는 불안과 죽음의 자각에 의하여, 진리를 질문하기 시작할 수 있게 된다고 해답을 제시하였다. ‘인간은 좋든 싫든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일컬었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삶을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하는, ‘던져진 존재’ 임을 아는 순간 불안에 사로잡힌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의 장벽을 넘어서야만 비로소 존재와 자유의 참 의미를 터득하게 된다.     


다시 상처받을까 봐 두렵다

하이데거의 ‘던져진 존재’를 말하던 내담자의 이러한 모습으로부터 나의 젊은 시절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했던, 친밀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그 상실의 아픔으로 얼마나 가슴 아팠던가.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채 살아내야 할 이 삶은 과연 합당한 것인가 하며 분노하다가 응답 없는 기다림에 좌절하며 깊은 우울에 빠졌었다. 그 아픔이 비록 성장으로 이끌었다고 하더라도 그 아픔을 다시 마주하게 하는 ‘깊은 관계 맺기란 또 나를 아프게 할 수 있으니 두려운 것이다’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 관계 맺기에서 자신의 마음의 안쪽에 깊숙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음의 보호막을 단단하게 또 높게 두르고 있었다. 그러한 청춘의 시절에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던 정신적 혼돈이 그의 말 한마디에서 불쑥 떠올랐던 것이다.


그런 고통과 다시 마주하기 싫다는, 의식에서의 방어기제는 ‘차단과 억제’로 작동되었다. 그리고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그 상황 촉발의 언어나 상황을 차단했던 그러한 인지 작용은 의식의 회피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스트레스에 대한 인간의 방어 행동으로 싸우던가 도망치던가 아니면 얼어붙던가 하는 반응(fight-flight-freezing)에서 얼어붙는, 자기보호를 위한 저항과 방어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은 정신적인 외상을 가진 사람들이 그 상황을 잘 기억해내지 못하거나 그와 관련된 정보를 수용하지 않고 거부하는 반응과도 같은 것이다.


신체심리치료에선 아픈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몸의 접촉의 접점에 의식의 초점이 맞춰지도록 이끌어준다. 의식(ritual)과도 같이 장엄하게, 또 부드럽고 따스한 접촉의 연결을 통해 내담자는 그동안 억압되거나 회피하고 있었던 내면의 또 다른 자아들의 메시지와 접촉하며 변화와 성장을 위한 알아차림이 이어지게 된다. 따뜻한 사랑이 담긴 부드러운 보살핌의 손길은 본능적인 저항과 경계의 무장을 내려놓게 해 주고 안전함, 깊은 신뢰, 평화로움을 느끼게 해준다. 관계 맺기에서 불안과 경계, 두려움을 느끼게 했던 명료하지 않았던 정서적 둔감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알게 해준다.      


상실의 아픔으로 웅크린 나를 일깨우기

정서적 혼란과 둔감의 상태는 컴퓨터를 비유로 들자면, 여러 개의 프로그램을 사용하면서(multitasking) 메모리를 많이 사용할 때 버벅거림과 같은 현상은 의식의 교착상태(deadlock)와도 같은 것이고, 이것에 대한 해결방법은 컴퓨터를 다시 켜기를 하면서 혼란에서 벗어나 하나에 초점을 맞추게 하는 것과도 같다. 충분히 안전하게 따뜻한 보살핌을 받고 있음을 체험하면서 느슨해진 몸과 마음은 부정을 긍정으로 대치할 수 있게 해준다.

 

이 내담자는 신체심리치료 세션이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 감사해요. 정말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상실이 너무나 아파서 견딜 수 없었어요.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서 나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어요.”


사랑했던 사람의 상실은 한 개인에게 크나큰 슬픔과 아픔으로 세상을 살아야 할 이유를 잃게 만든다. 그리고 내면에서 힘과 긍정의 자원을 완전히 소진하게 만들어 무기력하고 희망을 갖지 못하게 의식을 마비시키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이럴 때 생애 초기 따뜻한 어머니의 가슴에서 느꼈던 사랑과 보살핌의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만들어주는 부드러운 접촉은, 안으로 웅크리고 있던 나를 활짝 일깨워 세상에 손을 내밀 수 있게 해 주고, 삶에서 의미를 찾게 해준다.


https://somaticpsychotherapy.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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