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흙마당 한가운데 터를 잡고 힘겹게 꽃 몽우리를 밀어 올리고 있을 능내리 그 집 늙은 살구나무가.
“살구나무는 잘 있는지요?”
"살구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어요. 마당 밖 벚꽃은 다음 주면 만개할 거 같아요."
꽃은 폈는지, 꽃은 졌는지 묻는다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살구나무는 잘 있느냐고 얼토당토않은 문자 한 통을 보내고 말았다. 나의 우문에도 재치 있는 주인마님 금방 답신을 보냈다. 그만 뭉클해졌다. 가슴이 아릿하여 나는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봤다.
능내리와 인연을 맺은 지는 벌써 십 수년째다. 남편이 1년을 넘게 해외 파견 근무를 떠나고 애마 아반떼가 방전을 일삼으며 주차장에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때다. 내 사전에 운전이란 없다 외쳤던 생각을 접고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그때 운전연수를 하던 중 우연히 능내리 가는 길을 알게 됐다. 능내리는 내 마음을 단번에 빼앗아 버렸다. 언젠가 꿈결에선지 가보았던 기억 속 어디쯤인 것처럼 낯설지가 않았다. 언젠가 걸었던 섬진강 어느 모퉁이 물빛을 닮은 것도 같았다. 다시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을 꿈꾸게도 했다. 더욱이 내 인생에 스며들어 가슴을 뛰게 했던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의 어린 시절 놀이터였다는 능내리 강마을을 나도 사랑하게 되리라 짐작했다.
면허증을 받아 들고 가장 먼저 나선 길도 능내리다. 문득 마음이 동하면 나는 카메라를 들고 훌쩍 능내리로 나선다. 강 마을과 골목길, 지천으로 피고 지는 야생 풀꽃들이 무성하게 숲을 이룬 능내리는 내 마음의 고향이 되었다.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강변길이며 들길, 구석구석 이어진 웅숭깊은 샛길. 테마별로 조성한 다산 길까지, 마음을 내어 놓고 걷는 내게 능내리는 미세한 세포까지 살아 움직여 출렁이게 했다. 겨울이면 강은 은빛 광활한 평야를 만들어놓았고, 봄이면 강 언덕에 반짝이며 돋아난 냉이꽃과 꽃다지가 잿빛 무심한 강을 깨웠다. 푹신한 봄날 살구꽃은 늙은 가지로도 덩실 피어 애잔하게 했고, 여름이면 넓은 연잎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의 경쾌함으로 더위를 씻어줬다. 건너편 우뚝 선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을 들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능내리의 가을을 기막히게 묘사했다. 자연의 모양은 신기하고 오묘해서 나를 철학자로, 예술가로 만들었다. 내 마음을 나보다 더 잘 아는 듯 강물도 나무도 나를 향해 몸을 흔들었다. 갈 때마다 이곳저곳 새로운 길을 탐색했다. 나무가 서 있는 자리며 꽃이 피는 자리, 물살이 고요한 시간, 물빛이 일렁이는 색감까지 느낌으로 읽을 수 있을 만큼 나의 능내리 사랑은 짙어갔다. 그즈음 살구나무를 만났다.
왜 하필 살구나무였을까. 그 많고 많은 나무 중에 가장 못생기고, 가장 뺏마른 늙은 살구나무에 내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리움의 대상은 꼭 사람만이 아닌가 보다.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숨겨둔 사람처럼 나무는 내게 가슴앓이를 하게 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가 어디 쉬우랴. 마을 카페 중에서도 가장 손질되지 않은, 여느 집 허름한 농가를 보듯 마당에는 우물이 있고 물기 머금은 우물곁엔 잎사귀를 곧추세우며 자랑스럽게 질경이가 자라는, 명색이 카페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그 집 마당 한가운데 버젓이 서 있는 늙은 살구나무라니… 하필이면 말이다.
살구나무 아래 섰다. 굵고 거친, 옹이 진 가지에 자디잔 꽃송이를 매달고 나무는 묵직하게 흔들리고 있다. 살구나무는 잘 있느냐고 안부를 묻고 달려간 나무 아래에서 나는 울컥, 목이 멘다. 인생의 지난함과 쓸쓸함을 온몸으로 딛고 서 있는 늙은 살구나무가 누구의 삶을 대변이라도 하듯 묵묵하게 서 있다. 꽃을 피우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결곡한 자태로 꽃송이를 터뜨리고 있다.
잘 지내나요, 어쩌다 전하는 안부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이 있는가. 살구나무가 나를 흔든다. ‘추운 겨울 잘 견디고 있어요, 꽃이 필 즈음 다시 올게요, 노랗게 살구가 익어 가면 연락 주세요….’ 혼자서 그렇게 눈빛으로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돌아서면 언제나 마음이 짠해졌다.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나를 에워싸는 건 살구나무와 함께 했던 추억 속 그림이다. 수많은 기억들이 펼쳐졌다 사라진다. 까닭 없이 밀려드는 그리움에는 언제나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