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땡땡 Aug 29. 2020

요즘 내가 달리기 시작한 이유



지겨운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 설 순 없으니

단 한 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출발점에 섰다. 신발끈은 풀리지 않게 두 번 묶는다. 에어팟을 귀에 꽂고 나이키 런 어플을 켠 뒤 목표 거리를 설정한다. 네모 버튼만 누르면 시작인데, 곧 닥쳐올 고통이 어렴풋이 보인다. 심호흡을 크게 한다.


"3,2,1 시작합니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건, 코로나 시대에 실내 체육시설들이 대부분 휴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운동을 안 하기는 좀이 쑤시고, 막 근력이 붙고 있던 터라 그만두기는 싫었던 차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 밤이나 이른 새벽에는 적막 속에서 홀로 달릴 수 있는데, 이점 역시 사회적인 거리가 필요한 요즘 시국에 부합했다. 특별한 장비나 돈이 들지 않고 건강한 신체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 또한.




이론상은 그렇지만, 일단 시작하면 살림이 하나둘 늘어간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일반 운동화를 신고 뛰었다가, 발에 모래를 맨듯한 묵직함에 러닝화를 샀고, 초등학생 이후 처음으로 종아리까지 오는 긴 양말을 신었다. 땀 흡수에 좋다는 기능성 티도 몇 장 구비했고, 손목에 부담을 줄이기 위해 휴대폰은 허리 밴드 안에 넣었다. 이 착장으로 편의점에 갔더니, "어디 등산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들었는데, 사람들의 눈에도 러너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 같아 뿌듯했다.




컨디션마다 다르지만, 보통은 출발한 지 1km도 안됐을 때, 아차 싶은 생각이 든다. 벌써 숨쉬기가 불편하고, 다리의 묵직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많이 달린 것 같은데... 1킬로미터를 완료했습니다. 는 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이 생각이 들었을 때가, 첫 번째 고비다. 아직 반도 도달하지 못했고, 목표 거리까지는 한참 남았다. '이걸 왜 시작했을까'하는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흉곽 아래에서부터 조금씩 숨이 차오른다.


그렇다고 포기하기는 애매하다. 차라리 얼마 안 됐을 때 그만두면, 들인 노력이 크지 않고 돌아오기에도 가까워서 그나마 낫다. 지금은 가야 할 길이 꽤 남았지만, 뛰어온 거리가 아까워서 어쩔 수 없이 간다. 길게 호흡을 하며 공기를 빼내려 애쓴다. 초반보다 페이스가 느려지지만 걷지는 않으려 한다. 느리게 뛸지 언정 걷지는 말라고. 러닝을 처음 하던 날, 같이 뛰던 누군가 그랬다.



 "축하합니다 절반을 완료했습니다."


이 문구가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몸을 휙 돌린다. 강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마주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 사이사이 맺힌 땀을 말려준다. 이제 왔던 길을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 여전히 힘들긴 해도, 한결 가뿐하다. 달려올 때는 보이지 않았던 주변의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강물, 산, 들꽃, 뛰어오는 사람들의 표정까지. 제일 좋아하고 신나는 노래, 지금을 위해 아껴뒀던 노래를 튼다. 다리에 좀 더 힘을 실어본다. 부스터를 다는 것처럼!



차로 가면 1분도 안될 거리, 그 마지막 구간이 생각보다 길다. 숨이 턱끝까지 차고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발이 땅에 처박히는 것 같다. 더 이상은 못 가겠어. 주변의 풍경이 다시 흐려지고 앞에 놓인 길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이제 정말 그만하고 싶은 순간, 텅 빈 머릿속 불현듯 하나가 스쳤다.


이것도 못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지극히 나다운 생각이었다. 일단 시작하면 포기하는 걸 싫어하는. 순간 천천히 달려도 걷지는 말라던 말이 떠올랐고 남은 힘을 짜내, 나를 붙잡으려 애쓰는 듯한 지면에서 한 걸음씩 튀어 올랐다.



"축하합니다. #km를 완료했습니다."


마침내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참고 있던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전신이 땀범벅이 되었어도 해냈다는 뿌듯함이 온몸을 휘감았다. 어플에선 정지 버튼을 눌렀지만, 한동안 심장은 튀어 나갈 듯 진정되지 않았고 어깨는 파르르 떨렸다.



오래지 않아 육체의 고난이 지나가고, 그것에 물들었던 정신에겐 빈 공간이 생겼다. 달릴 때는 힘들다는 생각 외엔 아무것도 자리할 수 없었는데, 잊고 있던 상념이 들어와 앉는다.






"넌 너무 생각이 많아서 탈이야."


아침에 눈 뜨면 시작되고 잠들면 정지되는 인간사처럼, 생각 역시 생성과 변화 속에 흘러간다. 내용이 부정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한숨이 나오고 속이 답답하고 종종 관자놀이가 띵하기도 하다. 다들 다양한 방식으로 머릿속을 비우고자 하는데, 2박 3일짜리 템플스테이를 가거나, 종일 휴대폰을 꺼놓기도 하고, 필름이 끊길 만큼 술을 퍼붓기도 한다. 누구든 저마다의 방식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그 방법의 하나로 달리기를 택했다.



발이 지면에 닿는 순간, 멀리 뻗은 길과 나만이 존재하게 된다. 심장이 뛰는 것, 공기가 흉곽 아래에서부터 들어차는 것, 다리가 묵직해지는 것 등 평소에는 인지하지 않았던 육체의 감각 하나하나에 열중하게 된다. 후우- 입모양을 동그랗게 만들어 숨을 크게 내쉰다. 버겁고 묵직한 것을 바람에 실어 보낸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걸음이 멈춘 뒤에는 한동안 가쁜 호흡이 이어진다. 흥분이 가시지 않은 신체덕에 정신 역시 멍한 상태로 여운이 남는다.


공기같이 익숙한 상념들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한숨 쉬는 것 대신 달릴 채비를 하기로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퇴근 후에 뭘 하시나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