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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Jul 28. 2019

라돈 침대와 라돈 온천, 그 괴이한 공존 2

방사선 호메시스라는 현상이 실제로 사람에게 존재하는가에 대한 증거는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이때 역학이라는 학문 분야가 등장합니다. 세포나 동물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직접 연구하는 학문분야거든요. 


저는 의과대학 졸업 후 지금까지 아무도 못 말리는 역학자로 살아왔습니다. 역학자로서 마주쳤던 거시 세계와 미시세계 사이의 모순, 그에 대한 의문이 저를 치열한 연구자로서의 삶으로 몰아갔었죠. 그 의문들은 제가 역학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던질 수 없었던 질문들이었을 것이고, 제가 현재 가진 모든 생각들도 역학자가 아니었더라면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결론들이었을 겁니다. 


그랬던 제가 몇 년 전부터 이 역학이라는 학문의 가치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학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학문을 하는 연구자들에 대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습니다. 역학이 보여주는 거시 세계는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듯 늘 사람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세상이 역학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매우 다양한데 방사선 호메시스라는 현상은 그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역학자들은 얼마나 신뢰성 있게 줄 수 있는 걸까요? 예를 들어, 역학연구에서 저용량 방사선 노출이 암 발생 위험을 낮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면 사람에게서 방사선 호메시스라는 현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려도 괜찮은 걸까요? 



세상이 던지는 질문 중에서는 역학 연구를 통하여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들이 있고, 죽었다 깨어나도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역학자들은 이 두 가지 질문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고, 지금도 여전히 못하고 있다고 봅니다. 온갖 최첨단의 기술들로 꽃단장을 하고 등장하는 최근의 역학 연구들을 보고 있자면 단순히 구분을 못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연구의 모라토리움을 선언해야 할 지경까지 온 듯 싶습니다. 


자신들의 한계를 전혀 알지 못한 채 역학자들은 방사선 호메시스라는 현상이 사람에게 존재한다면 충분히 입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연구를 합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습니다. 그럼, 역학자들은 길게 고민하지 않습니다. 사람에서 방사선 호메시스라는 현상은 없는 것으로 결론내려 버리죠. 그러나 방사선 호메시스란 현상은 기본적으로 후자의 질문에 속하는 영역입니다. 자신들이 가진 무기의 치명적인 연구방법론상 문제점들로 인하여, 역학연구를 통하여 이를 입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하지만 역학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무기의 한계점을 충분히 인지하지 못했죠. 


오히려 아주 낮은 농도에서 실내공기 중 라돈이 암 발생 위험을 높인다는 역학연구 결과들이 보고되면서 (아래에서 다시 설명하겠지만 이 역시 재평가해야 할 역학 연구입니다), 방사선은 제로만이 안전한 것이고 용량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그만큼 더 해로워지는 것이라는 가정, 즉 LNT (Linear Non-Threshold) 모델에 기반하여 방사선과 관련된 모든 법과 규정들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처음에는 가정이었으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그 가정은 어느새 진실로 둔갑을 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본인 주위에 있는 모든 것에 방사선이 얼마나 있는지를 측정해가면서 살아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과학 분야 연구에서 선형성에 대한 연구자들의 집착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역학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최종 결론 도출시에 노출량이 증가할수록 질병 발생 위험이 증가하는가?가 핵심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생명체는 비선형성이 기본값입니다. 아주 높은 농도 영역에서는 100에서 100만큼 해롭고 200에서 200만큼 해로우면, 1000에서는 1000만큼 해롭다고 가정해도 됩니다. 그러나 낮은 농도 영역은 그렇지 않습니다. 1에서 1만큼 해롭고 2에서 2만큼 해로운 현상이 관찰되었다고 해서, 10에서 10만큼 해로울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더하여 1에서 1만큼, 2에서 2만큼 해롭다고 보고하는 그 역학연구들은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일까요? 환경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위험요인의 경우, 어떤 하나를 원인으로 꼭 집는 그 자체가 오류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예를 들어 실내공기에서 측정한 라돈치의 경우 라돈뿐만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수많은 실내공기 오염물질 혼합체를 대변한다고 봐야 합니다. 라돈치가 높은 곳에는 이 놈들도 같이 높고, 라돈치가 낮은 곳에는 이 놈들도 같이 낮기 때문입니다. 환기를 하면 라돈치가 낮아진다고 하죠? 이때 라돈만 빠져나갈까요? 당연히 다른 실내공기 오염물질 혼합체도 같이 빠져나갑니다. 즉, 실내공기 라돈치 역시 미세먼지, 미세 플라스틱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코끼리의 일부분으로 그 역할을 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합리적이지만 역학자들은 라돈한테만 그 책임을 전가했다고 봅니다.  


"Absence of evidence is not evidence of absence"라는 유명한 명제가 있죠. 이 명제는 공중보건학 분야에서 LNT모델을 옹호하기 위해서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즉, 나쁘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나쁘지 않다는 증거는 아니기 때문에, 예방 차원에서 아주 낮은 노출도 일단 해롭다고 간주하고 국가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철학입니다. 일견 보기에 아주 훌륭한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을 막무가내로 적용하게 되면, 지금처럼 인간들을 오히려 더 불행하게 만드는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방사선의 경우에는 위 명제를 정반대로 적용함이 더 적절합니다. 즉, 역학연구에서 방사선 호메시스에 대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방사선 호메시스가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고 봐야 하죠.   


제가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때 현시대에는 흩어진 지식을 기반으로 한 합리적인 추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는데요 방사선 호메시스도 마찬가지의 접근법을 요구합니다. 방사선 호메시스에 대한 그 수많은 실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역학 연구결과를 가지고 이 현상이 사람에게 존재한다는 증거가 없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역학이라는 학문을 너무나 과대평가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햇빛에 포함된 자외선을 가지고 LNT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난센스이듯이, 지구 탄생 이래부터 공존해왔던 방사선을 가지고 LNT모델을 적용하는 것도 난센스입니다. 


라돈 온천의 존재가 과학을 몰랐던, 무지한 시대에서나 있을 법한 웃지 못할 코미디가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라돈 침대니 라돈 생리대니 하면서 벌어지는 소동이 먼 훗날 웃지 못할 코미디로 등극할 것으로 봅니다. 현재 허용기준 이상이니 이하니 따지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현재의 허용기준이라는 것 자체가 “방사선은 제로만이 안전하다”는 잘못된 전제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2017년 괴이한 이름을 가진 한 인물의 부고가 과학저널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Obituary notice: LNT dead at 89 years, a life in the spotlight” 우리말로 간단히 풀이하자면 “부고 알림: LNT모델 89세의 나이로 사망하다”입니다. 개인적으로 Science나 Nature에 실려도 손색없는, 과학사에 길이 남을 인물의 부고였다고 봅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LNT모델이 사망했다 하더라도 그가 남긴 거대한 유산을 청산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는 여전히 LNT모델에 의거하여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모델을 전제로 만들어진 수많은 제도와 그 제도하에서 먹고사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호메시스 모델 같은 비선형성의 세계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pseudoscience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었죠. 많이 배운 사람이라고 다른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개개인의 깨어있는 지성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방사선 호메시스를 적극 이용해서 우리 한번 건강하게 살아 보자는 취지로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미 심리적 장벽 때문에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사선 호메시스의 존재가 우리에게 던지는 매우 중요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연방사선”과 “호메시스”현상이 혼재하고 있는 저용량 범위에서는 내가 외부로부터 얼마만큼 더 노출되고 덜 노출되고를 따지면서 사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것 따지는 시간에 제가 늘 이야기하는, 방안에 있는 거대한 코끼리를 어떻게 잡을까 고민하는 편이 백 번 더 가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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