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모든 것은 허용기준으로 관리합니다. 수많은 발암물질들이 그렇고 환경호르몬들이 그렇고 미세먼지가 그렇습니다. 허용기준 이상이면 난리가 나고, 이하면? No problem. 하지만 허용기준은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강요된 상식 중 하나라고 봅니다. 굳이 “강요된”이라는 형용사를 붙인 이유는 단어 그 자체로 모든 것을 許하였노라고 말하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허용기준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며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현재 사용되는 허용기준을 만들 때는 반드시 두 가지 대전제가 필요합니다. 먼저 농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더 해롭다는 전제입니다. 선형성이죠. 연구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노출되는 농도보다 수백 배, 수천 배 높은 농도에서 실험을 합니다. 사람들이 실제로 노출되는 정도의 농도에서는 실험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형성이 있다는 전제하에 낮은 농도에서의 상황을 수학적으로 추정하여 허용기준이란 걸 결정합니다. 선형성 없이는 이런 추정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선형성은 현재 허용기준을 정하는 모든 영역에서 필수적으로 사용하는 전제 조건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대전제가 틀렸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를 들면 높은 농도에서는 전혀 관찰되지 않았던 어떤 반응들이 아주 낮은 농도에서만 보인다면? 현재의 허용기준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아무런 쓸모없는, 단지 숫자놀음에 불과해지는 겁니다.
문제는 이 상황이 만약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라는 겁니다. 최근 허용기준보다 훨씬 낮은 저농도에서 이 놈들이 벌이는 수많은 일들에 대한 연구 결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거든요. 이들은 아주 낮은 농도에서 대사계, 면역계, 신경계, 호르몬계에 광범위하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주 낮은 농도에서 보이는 이런 문제들이 농도가 어느 정도 높아지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비선형성을 보이죠. 이러한 비선형성의 세계를 선형성의 잣대로 재단하여 만든 것이 현대사회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왔던 허용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대전제는 환경오염물질은 지금 허용기준을 만들고자 하는 그 물질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입니다. 우리는 현재 몇 가지 종류의 환경오염물질에 “동시에” 노출이 되면서 살고 있을까요? 100개? 1000개? 10000개? 아마 이것으로도 부족할 겁니다. 과연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만들어진 허용기준이 1000개, 10000개가 동시에 존재할 때도 작동할까요? 굳이 답을 드리지 않아도 상식적으로 판단하실 수 있을 겁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는 말은 돈 모을 때만 통용되는 속담이 아닙니다. 허용기준 이하의 초극미량 농도를 가진 수천, 수만 가지 환경오염물질들이 모여서 우리의 병을 일으키는 태산 같은 원인이 되는 겁니다. 제가 늘 이야기하는 방 안에 존재하는 거대한 코끼리의 실체죠.
혹자는 그렇다면 진정으로 허용가능 해 질 때까지 기준을 더욱더 낮추면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쪽 세계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이 낮은 농도 영역에서는 비선형성과 함께 예측 불가능한 화학물질들 간 상호작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측 불가능한 상호작용이라는 것은 1+1+1+1.. 의 세계가 아니라 +, -, x, /의 세계라는 의미입니다. 비선형성을 가진 수많은 화학물질들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그 기괴한 조합의 최종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모두 다 노출되면서 살고 있으나 모든 사람들이 환자가 아닌 이유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저농도 환경노출은 허용기준과 같이 정량적인 기준을 만들어서 예방 차원에서 관리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연구자들이 좋아하는 예측모형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접목해본들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대사계, 면역계, 신경계, 호르몬계에 질병이 있다면 (당뇨, 암, 치매, 자가면역질환 등등.. 우리가 아는 모든 병이 여기에 문제가 생겨서 발생하는 겁니다), 우리는 이 놈들이 그 병의 발생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간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추론이 가능해야 우리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물론 허용기준이라는 것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개별 화학물질들이 고농도에서 보이는 독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허용기준이라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직업적으로 특정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상황에서는 허용기준으로 관리를 해 줘야 하죠. 하지만 저농도 영역에서는 아무리 엄격한 허용기준을 만들어 놓아도 비선형성과 예측 불가능성 앞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최근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한 국내외 연구자들이 혼합체에 적용되는 허용기준을 만들어 보겠다고 출사표를 던져놓은 상태입니다. 엄청난 연구비가 투입되는 대형 프로젝트들이 온갖 첨단 기술과 미사여구로 포장된 채로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까지의 연구들이 그래 왔듯이 이 역시 연구자들만의 잔치가 될 겁니다. 허용기준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없는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현대사회의 연구가 비즈니스화 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 연구자들 사이에서 스위스 로잔 연방공대의 한 박사과정 학생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남긴 글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저도 한 구절 한 구절 폭풍 공감하면서 읽었는데요, 이 학생이 지적했던 모든 문제들은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해지고 있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현재의 허용기준보다 훨씬 낮은 농도를 가진 수많은 화학물질들에 대한 장기간 노출은 각종 질병을 일으키는 핵심 원인입니다만 이 문제는 현재의 정상과학 패러다임 하에서는 아무리 닦고 조이고 기름을 쳐도 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야흐로 토마스 쿤이 이야기하던 과학 혁명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