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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Nov 01. 2024

식물독 논쟁, "..와 함께 진화해 왔다는 의미는?"

최근 저탄고지 열풍과 함께 식물성 식품 자체를 해롭다고 주장하는 글 혹은 동영상들이 꽤 많이 눈에 띄는군요. 각종 해부학적, 생리적, 생화학적 특성들을 열거하면서 인간은 진화론적으로 육식동물임이 분명하며 동물성식품만으로 사는 것이 지당하다는 의견들을 너무 자신 있게 내놓고 있어 당황스럽기까지 하군요. 불을 사용하기 전 인간과 같은 구강과 치아 구조로 어떻게 육식을 주식으로 할 수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들은 식물성 식품 안에 포함된 각종 독성물질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인간은 식이섬유를 소화시키지 못하므로 식물성 식품들을 기본적으로 피해야 할 식품으로 분류하고 있었습니다.


전에 올렸던 "저탄고지 vs. 현미채식, 무엇이 더 건강한 식단일까?"에서 단탄지 관점으로 보면 극과 극을 달리는 이 두 식단이 호메시스 관점에서 보면 꽤 유사한 식단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식물성 식품 자체 혹은 동물성 식품 자체가 해롭다면 둘 중 하나는 인류 건강을 위하여 퇴출되어야만 하는 식단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전에는 모든 동물성 식품이 해롭다는 비건들의 주장이 유행이었다면, 요즘은 분위기가 완전히 역전되어 식물성 식품이 독이라는 측의 주장이 인기몰이를 하는 듯싶습니다.


식물 안에 포함된 수많은 파이토케미컬의 본질이 독이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인간들 먹고 건강해지라고 만드는 성분이 아니라 자신들을 공격하는 미생물, 곤충, 동물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만드는 성분이기 때문이죠. 독이라는 단어는 그 뉘앙스만으로도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어딘가에 독이 있다면 당연히 피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하지만 지구상 생명체 출현이래 기나긴 시간 동안 동물은 식물과 함께 상호진화 과정을 거쳤으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 와 함께 진화해 왔다”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요? 현재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든지 관계없이 생명체가 진화과정 중에 반복적으로 경험했던 모든 요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했던 정도의 노출 수준에서> 자신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도록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용량으로, 현시점 아무리 위험하다고 알려진 것도 이 원리를 따르게 됩니다.


예를 들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중력, 방사선, 햇빛, 미생물 등과 함께 진화해 왔습니다. <이런 환경 요인들이 존재함>을 디폴트 값으로 해서 생명체들의 세포, 조직, 장기, 시스템 기능은 최적화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만약 이 요인들 중 하나라도 제거된 환경에 살게 되면, 생명체 기능은 서서히 망가지게 됩니다. 미생물이 사라지면 생존이 불가능해지듯, 방사선이 0인 환경에서도 생존이 불가능해질 겁니다 (제로만이 안전하다는 대전제하에서 만들어진 현재의 방사선 과학이 오류인 이유입니다). 반대로 자신들이 진화과정 중에 경험했던 노출보다 훨씬 높아지면 이 역시 생존을 위협하게 되는데, 특정 용량 이상에서는 이 모든 것이 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파이토케미컬도 이 범주에 속합니다. 동물이 지구상에 처음 등장한 시점은 논란이 있지만, 5억 년 전 캄브리아기 대폭발 시기 수많은 동물들이 출현했음은 정설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동물을 초식, 육식, 잡식 등으로 분류할 때 가장 먼저 출현한 것은 초식이고 이후 육식과 잡식이 등장했다고 보는데, 핵심은 그 과정 동안 동물과 식물은 끊임없는 공진화를 경험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결과 생존과 번식에 유리한 방향으로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한 종들만 살아남게 되며, 현시점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물들은 모두 그들의 후손입니다. 즉, 진화 과정 중 식물에 대한 지속적인 노출을 경험하면서 생존해왔던 종들은 식물의 독성을 자신한테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획득한 상태라고 봐야 하며, 그 능력을 표현하는 학술용어가 바로 '호메시스 (Hormesis)'입니다.


현재 논란이 되는 대표적인 식물성 식품 중에는 기원전 만 년부터 인간들이 본격적으로 먹기 시작한 곡류들이 존재합니다. 몇 년 전 올렸던 “현미가 사람을 서서히 죽이는 독약이라고?”라는 글에서 자세히 다룬 적이 있습니다만, 한 종이 만년동안 지속적으로 경험했던 환경이란 후성유전학적 적응이 충분히 가능한, 길고 긴 기간입니다. 먹거리든 뭐든 관계없이 생명체가 경험하는 환경은 즉각적인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가져오고, 이런 환경이 지속적으로 존재한다면 생존에 최적화된 후성유전학적 정보는 세대를 이어서 전달됩니다.  약 500세대 이상 그 과정을 거쳐온 현대인들은 곡류를 개체의 생존과 번식에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한 상태라고 봐야 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산업화이전의 먹거리란 거주지역에 따라 극과 극을 달렸고, 따라서 곡류뿐만 아니라 정착생활과 함께 섭취가 시작된 다양한 식물성 식품들에 대한 적응 수준은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특정 민족이나 부족 상황을 일반화해서 어떤 음식을 찬양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이고, 악마화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입니다. 신토불이가 달리 신토불이가 아닙니다. 조상 대대로 먹어왔던 음식들에 포함된 수많은 성분들을 낱낱이 분해해서 시행한 세포실험, 동물실험 연구에 기반하여 유익한 음식, 해로운 음식을 구분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아마 없을 듯합니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음식을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을 이용하고 요리를 하는 유일한 종인 인간들이 피해야 할 음식은 최근 100년 이내에 새롭게 등장한 정제탄수화물 및 가공식품 정도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물론 환자들의 경우 질병에 따라 더 적합한 개별 식단들이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 식물성 식품들을 피하는 것으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치료 식단이 모든 사람을 위한 일상 식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식물성 vs. 동물성 혹은 탄수화물 vs. 지방으로 다투면서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현대 사회의 식품들을 오염시키고 있는 수많은 xenobiotics들에 대하여 고민해 보고 해결책을 찾고자 노력하는 편이 훨씬 더 건강에 도움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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