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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덕희 Dec 11. 2019

전자파를 느낄 수 있다고?

세 번째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토요일 오후, 저같이 늦게 합류한 사람들을 위한 이론 교육이 있었어요. 도올 선생처럼 칠판에 분필로 한자를 일필휘지로 써 내려가면서 강의를 할 것 같았는데, 깔끔하게 만든 파워포인트 파일을 아이패드에 띄워놓고 TV에 연동시켜서 강의를 하시더군요. 정기신(精氣神), 연정화기(練精化氣), 정중구동(靜中求動), 운기조식(運氣調息).. 무협지에나 나올법한 이런 낯선 용어들이 수시로 등장했어요. 열심히 듣는 척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맘에 와 닿지 않았어요. 현대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허황해 보이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끝나갈 즈음, 뜬금없이 전자파 이야기를 꺼내시더군요. 태극권을 열심히 하다 보면 자기한테 잘 맞지 않는 전자파를 느낄 수 있다고 하는 게 아닙니까? 뭐? 전자파를 느낄 수 있다고? 책에 적어 두었듯이 그 당시 저는 제가 가진 뇌종양의 원인으로 전자파를 의심하고 있었거든요. 물론 관장님은 제가 무슨 사연으로 태극권을 시작하는지는 전혀 모르는 상태였죠.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였지만 여전히 매우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였고,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저같이 속세에 찌든 민간인들도 가능한 경지라고는 결코 생각되지  않더군요. 하지만 전자파 이야기에 꽂혀서 속는 셈 치고 1년간 태극권을 해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천천히 호흡과 함께 온 몸에 긴장을 푼 후, 큰 통나무를 둘러 안듯이 양 팔을 올리고 무릎을 살짝 구부린 자세로 서 있는 걸 참장이라고 부르더군요. 일단 자세를 잡고 나면 자세도 신경 쓸 필요 없고 호흡도 신경 쓸 필요 없고, 오로지 내 몸에서 움직임이 나타나는 곳이 있는지에만 의식을 집중하라고 하더군요. 해봤죠. 하지만 저한테는 그 집중기간이 1분, 아니 단 10초도 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끊임없이 내 의식은 내 몸을 떠나서 나의 과거로 미래로 주변 인물들로 둥둥 떠다니더군요. 한참을 헤매다 문득 생각이 나면 다시 내 몸으로 돌아와 보지만, 나의 의식이 내 몸에 머무르는 순간은 매번 찰나인 듯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태극권을 시작한 지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한 초짜들만 모여있던 저희 반에 특별한 한 분이 있었어요. 모든 사람이 참장을 하는 내내 거의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데, 이분만은 예외였습니다. 참장이 시작되기만 하면 거의 1분 이내로 흡사 영화에서나 본 듯한 소림사 무술을 혼자서 하는 겁니다. 키가 조금 작고 다부진 몸매를 가진 제 또래의 남자분이었는데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내지르는 손짓 하나, 발짓 하나가 예사롭지 않았어요. 20분간 각종 무술 동작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데, 끝날 때쯤 되면 온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더군요.  


초창기에는 참장을 하는 20분이 너무나 지겨운 시간이었기 때문에 수시로 실눈을 뜨고 그분이 하는 동작들을 구경하곤 했어요. 조금 낯이 익고 난 뒤에는 몇 번이나 직접 물어봤죠. 정말 그 동작들이 “저절로” 나오는 거냐고요? 동작 하나하나가 너무 정교하고 절도가 있어서 결코 저절로는 나올 수 없는 동작으로 보였거든요. 하지만 물어볼 때마다 대답은 똑같았습니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데 "저절로" 그렇게 나온다는 겁니다. 다만 10년 전쯤 잠시 태극권을 배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는 하더군요.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습니다. 야바위판의 바람잡이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순한 의심까지 잠깐 했었습니다. 


1달쯤 지납니다. 저도 참장을 할 때 왼쪽 어깨가 조금씩 아래로 처지는 것 같은 느낌이 오는 것도 같았어요. 가끔씩은 팔이 조금씩 흔들리고 다리에 진동이 오는 것도 같았어요. 하지만 그건 그냥 근육이 긴장해서 나오는 반응 정도로 생각되지 그 이상의 무엇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더군요. 저 바로 뒤에서 지금 이 시간에도 현란한 몸동작으로 소림사 무술을 하시고 계신 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었죠. 


지겨운 참장이 끝나면 태극권 동작을 하나씩 배웁니다. 전사, 뫼비우스 띠, 태극문양을 계속 강조하시더군요. 그러나 타고난 몸치에 가까운 저는 그저 흉내내기에만 급급할 뿐이었어요. 한여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천천히 하는 움직임이라서 땀 한 방울 나지 않더군요. 이걸 운동이라고 믿고 계속해도 되나 싶은 회의감이 급속도로 밀려들었습니다. 5분만 해도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흐르던 운동들이 갑자기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네번째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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