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첫 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집니다.
6개월만 일단 기다려보기로 결정한 후 내 몸을 위하여 뭔가 열심히 해보기로 했죠. 문제가 생긴 세포와 장기의 기능을 바로 잡는데 운동의 힘이 그 어떤 약보다 강력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던 지라 일단 운동에 집중해보기로 했습니다. 집 앞 필라테스 학원도 기웃거리고 아파트 내 헬스장도 기웃거렸죠. 몇 번 시도해보았지만 뭔가 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불편하고 어색했어요.
문득 몇 년 전 둘째 아이 친구 엄마가 지나가듯 얘기해준 태극권이 생각나더군요. 전화를 해봤죠. 마침 그 태극권 도장이 저희 집에서 아주 가까운 곳으로 장소를 옮겼더군요. 초급반이 시작된 지 좀 되었지만 중간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처음 가는 날, 허리가 아파서 늘 고생하고 있던 친구와 같이 갔어요. 태권도 도장 같은 넓은 장소에서 저와 비슷한 또래의 중년 몇 사람이 전날 배운 동작을 서투르게 연습하고 있더군요. 태극권이라고 해서 태극기가 크게 걸려 있을 줄 알았더니만 태극문양조차 찾아보기 힘든 무미건조한 장소였어요. 조금 후, 무술과는 전혀 인연이 없어 보이는 흰 얼굴을 가진 작은 남자 한 분이 들어오시는데 다들 공손하게 인사를 하더군요.
어색한 첫인사 후 수업을 시작합니다. 처음 온 회원이지만 별로 신경도 안 쓰시더군요. 그냥 남들 따라만 하면 된다고 한 마디 던지십니다. 다 같이 두 팔을 천천히 들어서 아주 천천히 아래로 내리는 동작을 몇 번 하더군요. 오케이~ 뭐 그것쯤이야... 이 동작이 끝나니 이번에는 두 발을 어깨 넓이 정도로 벌리고 두 팔을 가슴 정도에 올려서 큰 나무를 안고 있는 자세로 가만히 서 있으라고 하더군요. 뭐.. 이것도 오케이~
그래도 券이라고 붙은 운동인데 자세가 좀 어이없어 보이기는 했지만 그냥 따라 했습니다. 그런데 몇 초도 지나지 않아 금방 지겨워지더군요. 실눈을 뜨고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구경했죠. 폼나는 깔맞춤 도복도 아니고, 낡은 체육복, 등산복 등을 형편대로 입은 10명 정도 되는 중년의 남녀가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와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오묘한 음악을 배경으로 한 채 눈을 감고 두 팔을 든 채 무표정하게 서있습니다. 다들 무슨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서 있는 건지 궁금하더군요. 살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장면이 아주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관장님도 맨 앞에서 그런 자세로 서 있었는데 갑자기 천천히 한 말씀하십니다. “시간이 가면 몸에서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부분이 생깁니다. 그러면 의식은 그 움직임을 천천히 뒤따라가기만 해야 합니다. 절대로 의식이 몸을 먼저 움직이게 하면 안 됩니다.” 헐~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고?? 그러면 의식이 움직임을 따라가라고?? 내가 의식하지 않고 움직이는 것은 내장의 불수의근 밖에 없을 텐데 어떻게 나의 의식이 그 움직임을 따라간다는 거야??
몇 분이 지나니 저절로 움직이기는커녕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합니다. 수시로 거울에 비치는 시계를 쳐다보면서 이걸 언제까지 하나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모두 5분, 10분, 15분.. 시간이 가도 그대로 있는 겁니다. 20분쯤 후 관장님께서 신호를 주니 그제야 모두 자세를 풉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어요. 뒤돌아보니 같이 왔던 제 친구는 그 사이 벌써 사라지고 없더군요.
다음은 노가(老架)라고 부르는 태극권 중 몇 동작을 다 같이 합니다. 천천히 하는 동작이어서 언뜻 보면 아주 쉬워 보였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따라 하기가 아주 어려웠어요. 곁눈질로 남들 흉내만 대충 내다가 첫 시간 수업은 끝났습니다. 아.. 내가 기대했던 태극권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싶은 생각만 들었죠. 상황을 보고 재빠르게 사라진 친구의 순간 판단력이 새삼 부러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