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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Oct 05. 2020

마케터의 지향점 = 에디터

쉽지는 않지만..

 기술을 배웠어야 하는데. 마케터들이 맨날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마케터들은 항상 프로젝트가 잘되면 상품 덕이고 프로젝트가 못되면 내가 못 판 탓이라는 생각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고단한 (?) 삶의 원인을 꽤 자주 자신의 기술 없음에서 찾곤 한다. 9년차에 접어드는 나도 그렇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직에서 맨날 듣는 이야기. '모두가 마케팅적 사고를 해야 한다' 그런데 모두가 피디적 사고를 해야 한다거나 생산자적 사고를 해야 한다는 말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케터가 있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생각을 안해본 마케터가 있을까. (이 비슷한 애로사항을 디자이너가 겪고 있는 것으로 안다)

 정말 마케터에겐 기술이 없는 걸까. 기술자에 비하면 마냥 초라하기만 하다. 하지만 얼마 전 출판업 계신 분의 글에서 에디터십이라는 단어를 보고, 나는 이 말이 마케터의 전문성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글에서 에디터십이라고 할 때는, 잡지나 책의 편집 과정을 생각해보면 좀 더 용이할 거 같다. 책을 한권 만들어가는 과정을 프로젝트가 굴러가는 과정과 비교해보는 것이다. 결과로서 숫자를 만들기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종합하고, 편집하고, 협의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으로 조직 내에서, 일을 위해서 마케터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지를 좀 더 정리해보게 됐다.


자신의 미래를 보는 마케터의 심정 (윌리엄 터너의 눈보라 : 알프스 산을 넘는 한니발의 군대)


 마케팅은 숫자를 다루는 사람인가? 시장을 이해하는 사람인가? 어떤 면에서는 그렇다. 조직 내에서도 많은 이들이 마케터의 역할을 숫자와 강하게 결부시킨다. 그런데 나는 마케터의 진짜 힘은 숫자를 보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상품을 만들지 않는 비생산 직군이라는 점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피디는 콘텐츠를 만들고 제품기획이나 생산은 제품을 만든다. 디자인은 이미지를 만든다. 이들은 모두 생산자이다. 그 와중에 마케팅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거나, 혹은 만들지 못한다. 마케터는 비생산자다. 서포트 직군이다. 다만, 생산자와 가장 가깝게 붙어있는 비생산자라고 해도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많은 마케터들이 가지고 있는 롤인 마케팅 채널 운영은 그게 퍼포먼스 채널이건, 오가닉 채널 운영이건 많은 공수가 들지만, 그것이 상품을 만들어내는 건 아니다. 만들어진 것을 (상품 혹은 광고) 2차,3차로 가공하고 채널에 맞게 유통시켜서 이익을 발생시키는 게 목표다.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처음 말했듯 마케터의 성패는 상품에 결국 달려있는 게 사실이다. 주류 회사 계정인데 마케터가 뜬금없이 의류 수익을 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우리는 일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다 같이 해야 하고, 그럴려면 누군가는 일이 돌아가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요구되는 역량이 에디터십이라고 생각한다. 여러 파트를 묶어서 과정을 진행시키고 결과를 향해 가야 한다. 매니져의 리딩과는 조금은 다른 얘기다. 리딩이 앞에서 어떻게든 끌고 가고 지시권을 가진 거라면, 에디터십은 그 안에서 미친듯이 뒤적이며 계속 메꿔나가고 엮어나가고 협의하는 것이다. 마케터에게는 생산자가 느끼는 창작의 고통이 없는 만큼, 일의 결과물에 자아를 투영할 위험성이 적고, 그 여유분을 일의 과정을 꾸리는 데에 사용해야 한다.

 때문에 마케터가 가장 처량한 사람이 되는 순간은 에디터십을 발휘할 수 없는 환경에서, 생산자를 수동적으로 오매불망 바라보고 있을 때다. 만드는 이들의 권위가 너무 강고해 상품이나 콘텐츠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은 마케터로서 최악의 상황이다. 뭔가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전문성이 없으니 먼저 치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비생산자로서의 고민을 하다가 생산자로 전압한 분들도 많다. 이 방법도 좋은 선택이다. 하지만  마케터가 보통 자신의 기술이 없음을 한탄하는 순간은 디자이너/피디/제품기획자/개발자의 기술을 염두에 둔 한탄이기 때문에 당장 전업을 준비한다고 해도 쉽게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뭔가를 반드시 만들어내는 직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시간이 무슨 대수겠냐만. 

이 책을 곱씹어 보면 결국 다 두루두루 보고 있으란 이야기.




 하지만 나 같이 그냥 지금 하는 일의 연장선상에서 뭔가를 해내고 싶고, 어느 정도 타협을 하고, 마케터/조직원으로서 밥값을 하고 싶은 사람은 어찌해야 할까? 결국 에디터십을 장착하고 궂은 일들을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만들어지는 것을 기다렸다가 받아와서 운영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제적으로 전체 진행과 목표를 위해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협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야 한다. 전반적으로 굴러가는 과정을 계속 염두에 두는 사람이 되야 한다.

  하여, 마케터는 가장 먼저 날짜와 시간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의사소통을 적절하게 잘 해낼 수 있어야 한다. 누구보다도 빨리 프로젝트에 대해 스케쥴링을 선행하고 필요한 자원들을 '만드는 이'들에게 요청해서 받아와야 하고, 중개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유관 파트의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영상을 제작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시간과 리소스가 드는지. 이전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는 무엇인지. 디자이너는 어떤 업무스타일인지. 통상 결과물은 언제 쯤 받을 수 있는지. 제품의 출시일이 변경될 가능성은 없는지. 예산은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등을 '먼저' 확인하고 정리해서 제안해야 한다.  요컨대 생산자가 잘 생산할 수 있도록 연결하고, 정리하고, 전체의 흐름을 만드는 게 결국 마케팅의 해야 할 일이고, 또 적극적으로 가져와야만 하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영상을 연출하거나, 제품의 아이디어를 내거나 하는 일에 비해서 멋있어 보이진 않겠지만, 그러나 일이 굴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 해야 한다. 사람의 리소스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만드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결국 전반적인 과정을 편집하고, 이어붙이고, 정리해줘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오히려 이 책이 마케터로서 더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 거 같다.


 뻔한 얘기지만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근데 커뮤니케이션을 잘 한다는 건 형님 아우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봤다.친분을 쌓아놓으면 일도 잘 풀리겠지. 그렇지 않다. 업무에 도움이 되는 친분은 업무를 잘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업무가 끝나고 가지는 술자리가 아니라.

 좋은 의사소통이란 일상적인 업무관계에서 쌓아놓은 성실함과 책임감을 바탕으로 '정확하게 요청'하고 충분한 맥락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하게 됐다.  즉, 지금 요청하는 이 내역이 왜 필요한지, 대책은 무엇인지, 안될 경우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을 정리된 말로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3일 전에 '내일 모레까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납기일을 고려해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3주 후에는 필요합니다' 라고 미리, 맥락을 충분히 제공해주는 것이다. 요청 뿐 아니라 상대방의 말을 들을때도 이러한 맥락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려하는 것이 좋은 커뮤니케이션일 것이다.



 마케터의 스킬로서 많은 것들이 요구되는 시기다. 글을 잘 쓰는 것, 시장의 트렌드를 꿰는 것, 숫자를 잘 보는 것, 광고채널의 운영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것...이런 능력들을 갖추고 있다면 위에 말한 에디터십의 발휘에 큰 도움이 된다. 하지만 몇가지가 부족하다고 해서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또, 생산자가 이런 능력을 부수적으로 갖춘 경우도 많다 (트렌드에 강한 디자이너) 우리가 하려는 건 결국 일이 되게 하는 것이지 그 스킬 자체가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은 배우거나, 넘기고 신뢰하면 된다.

  내가 주변에서 봤던 좋은 마케터들은 약간의 스타일 차이만 있을 뿐 과정을 선제적으로 주도하고 요청하고 엮어나가는 에디터십을 갖춘 분들이 대부분이고, 나도 그런 분들에게 옛날이나 지금이나 많은 것들을 배우곤 한다. 

 물론 이런 마케터에 대한 내 입장은 개인 경험에 의존한 특이하고 편협한 생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꽤 현실적인 부분도 있다고 자신한다. 선제적인 스케쥴링과 요청, 과정에 대한 높은 이해도, 풍부한 맥락을 지닌 의사소통. 이 세가지가 결국 마케터의 핵심 역량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 때문에, 결국 마케팅의 종착점이 사업기획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딱히 멋있는 일은 아니다. 살림꾼이나 머슴을 좀 길게 표현해놓은 것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일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빈틈을 메꾸고, 엮어나가는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또 많은 것들을 얻어나갔던 거 같다. 역설적으로, 마케팅은 생산자가 아니기 때문에 일의 과정을 잘 꾸려나가는 데에 어느 직군보다도 전문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직군이라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됐다.  어차피 10년 20년이 지나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게 프로젝트의 결과겠는가, 아니면 그 과정에서 구축된 관계와 노하우겠는가? 2년 전 대 성공한 프로젝트가 10년 후에도 이력서에서 매력적일까. (죽기전에 못먹은 밥 생각 나겠냐는 말이다) 결국은 과정이 전부라는 생각을 요즘은 정말 많이 하게 된다. 에디터십이라는 말의 본 뜻과는 다소 다른 이야기를 한 걸 수도 있겠지만, 이것만큼 적절한 단어가 없다는 생각은 한동안 계속 될 듯 하다. 

결국 고양이를 이길 수는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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