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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타기인생 Feb 08. 2019

마음수행이라는 이기심.


 혜민스님에 대한 찬양조의 외신 기사. 팔로잉 하는 분이 이 기사의 논조와 방향을 비판하는 글을 올리자 다른 이가 마음수행의 중요성을 이야기했고, 원글의 필자는 다시 그것이 트렌드가 됐을때 생기는 여러 부작용들 - 현실의 고통에 대한 도외시-을 논박했다. 나는 이 흐름을 보면서 상당히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마음수행이라 불리는 공부와 평화를 중시하고, 이런 과정이 인생에서 정말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돌고 돌아 인정한 사람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불교의 메세지들이 하나의 트렌드나 준칙이 됐을때 끼치는 폐해를 내 개인사 단위에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니, 그 논쟁을 보면서 맘이 복잡해질수 밖에.

 나는 자기 마음을 수행하는 것은 사실 자신이 어떤 계급, 위치,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필요한 것이고 할 수만 있다면 꾸준히 해나가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내가 처한 실재의 조건과 별개로,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욕망을 형성한다는 진리와 별개로 인간의 욕망과 마음이란 어느 시대가 됐건 어떤 계급이었건 통제 불가능한 것이고 평화란 결국 그런 마음챙김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여유있는 자들의 행위라고 해서 굳이 안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그 '마음챙김'이라는 게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이고 사회적으로는 몰지각한 경지라는 것인데, 이것은 개인의 행복이란 결국 무엇인가에 관해 물어본다면 피할수 없는 국면이기도 하다. 우리의 행복은 결국 주관적이다. 그것이 좋은 사회를 일궈서 가능해진 것이건, 현실의 부조리에 눈감은 결과이건, 유산계급의 여유건 간에 그 감각을 느끼는 것은 지금의 내 자신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헛된 기대를 하곤 한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 아닌가요? 근데 내가 볼때 불교라는 종교 자체가 태초부터 사회의 부조리 개선, 이런 것에 대해 그렇게 관심이 없다. 왜냐면 그런 부조리 자체가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그저 한때 지나가는 문제들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 고타마 싯다르타의 나라가 적국으로부터 멸망당하게 생겼는데도 결국 그것이 '업'의 문제이기 때문에 막을 수 없다는 태도. 전염병으로 가족을 잃어 비탄에 빠진 이에게 싯다르타가 '가족을 잃지 않은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오면 아들을 부활시켜주겠다'라고 제안한 후, 그가 전염병 피해가 없는 집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유도하고 생노병사의 고통과 무상을 가르치는 종교가 무슨 사회의 변화에 관심이 있겠는가.

 자비니 하는 것들도 나중에 불교의 발전/전개 과정에서 더 발전된 개념이며 그 또한 결국 '고통의 말소'라는 목적과 논리가 분명한 가치관이다. 나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남에게도 고통스럽고, 남의 고통을 불러오는 것은 결국 또 번뇌의 연쇄작용을 만들어서 본질이 고통인 이 삶들을 다시 태어나고 이어지게 만드니까. 불교의 목표란 결국 가장 본질적인 고통을 해소하는 것이고(시작 자체가 왕자가 생노병사가 너무나 두려워서 거기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서 탐구한 종교이다)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고통이란 애시당초 사회개혁을 통해서 달성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생노병사가 불러일으키는 필연적 고통이란 그게 북유럽의 복지국가건 헬조선이건 똑같기 때문에...싯다르타는 이를 결국은 생명을 가진 존재가 가지는 집착의 문제라고 봤고, 그가 봤을 때 고통의 문제는 육도윤회의 중생 모두가 몇만겁의 시간이 지나도록 겪고 있는 일종의 '법칙'이었던 것.

 때문에 고통의 해소 자체를 목적으로 두고 있는 불교는, 거기에 대한 대안으로서 '안되겠어 나라도 여기서 나가야겠어'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끊임없이 마음과 몸의 작용을 관찰하고 그 원리와 공허함을 깨달아서 번뇌를 일으키는 뿌리 자체를 불살라 없애는 것. 그런 사상체계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밀고나갔을 때는 '독화살을 쏜 자보다 독의 치유가 중요하다'는 철저히 실용주의적 사고가 나오고, '물에 떠내려가는 개미떼를 살려주는 수행자는 훌륭하지만 그 시간에 수행에 집중하여 깨달음을 얻는 수행자가 더 훌륭한 수행자다'라는 논리까지도 가능해지는 독특한 종교인 것이다. 그런 것들이 오죽 어렵고 난해했으면 고타마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은 뒤에 '이걸 대체 세상에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계속 고민했겠는가.


 불교가 이야기하는 사회, 세속의 생활지침. 그런 것은 불가능하며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종교는 철저히 개인의 각성과 고통 해방을 위한 체계이지 덧없이 사라질 바깥의 세계를 바꾸는 종교가 아니다. 자, 이제 속세에서 통용되는 윤리 도덕 법칙은 잊고 오로지 개인의 고통 해방을 위한 수련을 계속하라. 그런다면 분명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제안을 하는 체계인 것이다.

오죽하면 당대에 '자식들을 끌고가서 가문의 대를 끊는 자'라는 욕을 먹었을까. 기독교처럼 한 민족의 습속을 기록하고 왈가왈부 지침을 한 종교도 아니다. 불교는 형이상학적인 논쟁에 대해 '그건 중요한것도 아니고 알 수도 없으며 증명할수도 없다'고 거부한다. 불교에서 그런 문제들은 다 부차적이다. 때문에 나는 불교적 수행이니, 마음수련이니 하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으로 이뤄지는 행위여야 하며, 여기에 어떤 사회적 영향력이나 대중 교화...이런 것들을 덧붙이는 순간 그 자체의 모순으로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걸 생각 안하면 "남편의 폭력, 고치려고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같은 이야기를 하고, 믿게 되는 것.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모순을 개선하기 위한 행동에 나서는 것과, 마음수련을 하는 것이 양립 불가능하진 ㅎ다. 오히려 나는 그런 이들일수록 자기 안에 대한 탐구를 통해 바깥세계와 내 마음이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둘러싼 저 바깥이 얼마나 무상한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철저히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이고 개인적이며 내밀한 행위로서 기능해야 하며, 이를 가지고 남의 태도와 세상의 구조를 왈가왈부하면 그것만큼 모순적인 것도 없게 된다. 무엇보다 이게 하나의 태도로서 요구되고 있을때는 분명히 그 흐름이 반영하는 어떤 반동적인 부분이 있다. 그래서 혜민이니 법륜이니 하는 승들의 대중교화가 우스운 것이다. 스님들. 세상에 그만 이야기 하시고 수행이나 열중 하셨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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