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ain Sevilla / Alcazar / Summer
스페인에 다녀온 지 1년 하고 5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기억이 흐릿하다. 물론 잊은 건 아니지만 머릿속에서 여행의 디테일을 그려보는 게 쉽지 않다. 그 도시에서 날씨는 어땠는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그리고 맛은 좋았는지, 골목을 걸을 때 어떤 냄새가 났는지, 공기는 포근했는지. 그래서 여행기는 여행을 하는 도중에 현지에서, 아니면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작성해야 한다. 인천공항에 내려 게이트를 빠져나와 일상으로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방금까지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던 그 세계가 꿈만 같이 느껴지는 경험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다만 그날의 사진만 또렷이 남아있을 뿐이다.
세고비아와 톨레도를 거쳐 세 번째로 도착한 도시 세비야는 스페인 여행의 첫 번째 클라이맥스였다. 화려하지만 결코 사치스럽지 않은 알카사르 궁전, 늦은 시간까지 먹고 마시며 일행과 즐겁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광장 주변의 음식점들, 그리고 플라멩코 박물관에서 만난 혼이 담긴 강렬한 춤과 전통음악. 스페인이란 나라의 문화 중 정수만을 추려내서 도시 하나에 응축해 모아놓은 것 같았다. 일본의 교토, 체코의 프라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건 단연 알카사르와 플라멩코 공연이었다.
스페인을 여행하다 보면 알카사르, 알카사바 비슷한 두 단어를 자주 듣게 되는데 알카사르는 아랍인이 지은 궁전, 알카사바는 아랍인이 지은 요새를 의미한다. 세비야의 알카사르는 'Real' 이란 단어가 앞에 붙는데 이는 왕실에서 관리하고 사용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만큼 다른 지역의 알카사르 보다 건축적 조형미가 뛰어나고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다. 현재의 알카사르는 14세기 말 페드로 1세가 지은 건물인데 그는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 축조에 투입되었던 건축가들과 장인들을 불러 모아 건물을 짓게 했다고 한다. 왜 그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여행 후반부에 알람브라 궁전에 방문했을 때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알카사르는 '알람브라 궁전의 자매'라 불린다. 결국 알카사르의 아름다움이 알람브라 궁전에 견줄 만큼 빼어나다는 말이다.
사자의 문을 통해 알카사르에 입장한 후에는 일정한 코스를 정해두지 않고 그냥 마음 내키는 대로 걸어 다녔다.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가듯이 따라가는 것보다는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아름다운 패턴과 문양을 보고 궁전 안의 골목 사이사이를 탐험하듯이 둘러봤다. 기온이 높았지만 습도가 낮아 그렇게 덥고 지치지 않았다. 발걸음마다 새로운 풍경과 경험으로 이어지니 힘이 났다.
돈 페드로 궁전을 둘러보고 잠깐 바람을 쐬러 바깥쪽 정원으로 나왔다. 오렌지 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궁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수확을 한 건지 나무에 열매가 열려있지는 않았다. 화려한 궁궐 내부와 대조적으로 자연의 녹색 그리고 황토색 벽과 타일로 구성된 공간에 들어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디테일한 아름다움을 좀 더 가까이에서 여유 있게 구경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알람브라 궁전보다 매력적인 궁전이 아닌가 싶다. 스페인에 조금만 더 빨리 왔더라면 궁 안의 여름 꽃들이 만개한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정원을 돌아보다 안쪽에서 지지대를 타고 올라가 폭포처럼 쏟아지는 모양을 하고 있는 키 큰 배롱나무를 봤다. 8월쯤 왔더라면 꽃의 폭포를 볼 수 있었겠지만 내가 갔을 때는 아래쪽의 꽃은 다 시들고 윗부분만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런 것 또한 사람과 장소의 인연이라 생각하고 너무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그 때라도 만나고 사진으로 이렇게 기억할 수 있게 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해외여행을 갈 때 한 번 가봤던 여행지를 다시 찾아가는 건 쉽지 않다. 여름휴가 시즌은 정해져 있고 비용도 한정적이다. 그런 상황에서 용기를 내서 새로운 경험과 휴식을 위해 떠나는데 같은 장소를 방문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선택지가 아닐까. 그러나 스페인은 같은 장소라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가고 싶다. 그만큼 지역의 문화 콘텐츠가 풍부하고 아주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