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시 향남읍 증거리 증거길 14
수종 : 느티나무
수령 : 1300년 (현재 1338년)
수고 : 19m
흉고직경 : 8.4m
지정일 : 1982.10.15
지정번호 : 경기-화성-37
소재지 : 화성시 향남읍 증거리 증거길 14
관리자 : 증거리 이장
도시가 아니기에
마주할 수 있는 아름다움
주말에 연차를 붙여 쓰고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 내려와 3일을 쉬었다. 주말 동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단하시겠지만 그래도 애들을 상대해줄 어른이 몇 명 더 생기니 마음에 여유가 생겼던 걸까, 잠깐 짬을 내서 근처에 있는 오래된 나무를 보러 다녀와야겠단 사치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 젖먹이인 둘째가 태어난 이후로 고궁과 풍경사진을 찍는 건 잠시 한편으로 미뤄두고 집에서 아이들 사진을 주로 찍었는데 그래도 내 마음속 한구석에는 풍경과 자연 사진에 대한 열정이 살아있었나 보다.
예전에 만들어둔 지도를 찾아보니 운 좋게도 차로 20분 거리에 1300년 된 느티나무가 있었다. 천년이란 세월을 버틴 나무는 흔치 않은데 어떤 나무일까 궁금했다. 마침 오전부터 흐렸던 하늘에서 부슬부슬 비도 내리기 시작해서 나무를 보러 가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대략적인 주소를 구글맵에 표기해놓았는데 출발하기 전 그 주변을 로드뷰로 아무리 둘러봐도 큰 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일단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치고 가보니 역시나 넓은 도로 근처의 엉뚱한 장소에서 안내가 종료되었다. 길가에 차를 잠시 세워두고 좀 더 검색해보니 화성시미디어센터 지원사업을 통해 제작된 증거리 느티나무 관련 유튜브 영상이 하나 있길래 그 영상에서 알려준 주소로 다시 이동했다. 구불구불 좁은 1차선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가 주택가 근처에서 멈췄다. 결국 창문을 열고 일하고 계신 주민분께 이 마을에 큰 나무가 있다고 해서 찾아왔다고 여쭤보니 정확한 길을 알려주셔서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차를 세우고 집 왼쪽으로 나있는 얕은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니 드디어 천년이 넘는 세월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를 보는 순간 거대한 아프리카 코끼리가 한 마리 눈앞에 서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수고가 19미터라고 적혀있었지만 키가 아주 커 보이진 않았는데 하늘을 향해 굵게 올라가던 줄기가 중간에서 꺾인 것 같았다. 천년이 넘는 오랜 세월을 겪으면서 나무의 생에 우여곡절이 많았음을 외관에서 알 수 있었다. 뿌리가 일부 길가 쪽으로 노출되어있었지만 그래도 나무 밑동은 굵고 건강해 보였다.
인터넷으로 정보를 좀 더 찾아보니 이 나무가 국내 현존하는 느티나무 중에서 세 번째로 나이가 많은 나무라고 해서 좀 놀랐다. 작년 여름쯤 화성시에서 이 나무를 알게 되어 주변의 잡초도 한번 정리하고 보호수 팻말도 새로 제작하는 등 그나마 관리를 하기 시작했고, 천연기념물 지정을 의뢰하는 신청서를 작성했다는 기사도 있었는데 아직까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진 않은 것 같다.
나무가 워낙 큰데 표준 줌 렌즈 하나밖에 없는 상황이고 주변 길도 폭이 좁아서 바닥에 거의 눕다시피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 한 분이 지나가시다 나무를 보러 왔냐며 반갑게 말을 건네셨다. 나무 바로 앞에 있는 집주인이셨는데 나무에 대한 이런저런 추억을 말씀해주셨다. 지금은 사라져 볼 수 없지만 주변에 이 나무보다 더 큰 나무도 있었고, 본인이 젊었을 때 이 나무 아래에서 결혼식을 올리셨다고 한다. 예전에는 훨씬 더 큰 나무였는데 어느 날 벼락을 맞아 나무 윗부분이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멀리서 일부러 나무를 보러 온 게 기특하셨는지 감사하게도 집 마당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올 거라고, 들어가도 괜찮다고 허락해주셨다. 혹시 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냐고 여쭤보자 씁쓸하게 웃으시며 '아마도 이 마을이 사라지게 되면 어렵지 않을까...'라고 말끝을 흐리시는데 뭐라 위로의 말씀을 드리기가 참 어려웠다.
도시가 아니기에 마주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믿는다. 시내에서 나와 조금만 달리다 보면 주변 풍경은 금세 변한다. 보는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도로 위 가득한 차들도 사라지고, 빽빽이 들어선 고층 아파트들 대신에 숲과 푸른 벼가 자라는 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비로소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 약간의 여유가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것 같다.
시골길을 산책하다 만날 수 있는 소박하고 담백한 풍경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핫플레이스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미를 보여준다. 사람들이 떠난 마을은 이제 쇠잔해졌지만 그곳엔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무심히 슬쩍 꺼내놓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낸 조화로운 풍경은 서로 카피하고 심지어 자기 복제에 급급한 도시의 콘텐츠들 사이에서 지금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