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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치 Oct 05. 2018

문서파쇄기에 들어간 사직서

두 번째 퇴사 면담



한 달만의 두 번째 퇴사 면담이었다.


 일요일 밤, 집에서 사직서를 인쇄했다. 책상의 3분의 1쯤 차지하는 거대한 복합기. 처음 영업관리자가 되자마자 임직원몰에서 구매한 거였다. 동기와 업무는 장비빨이라며 킬킬댔다. 십여만 원 주고 구매했던 캐논 복합기. 성능 좋은 그 기계로 사직서를 여러 장 뽑았다. 미리 내 도장을 찍었다. 구겨지지 않도록 파일에 잘 꽂아 가방에 넣었다. 잠들기 전까지 수십 번 시나리오를 썼다. 내일 이런 표정으로 이런 말들을 해야지.


 호시탐탐 타이밍을 노려 적절한 순간을 찾았다. 조용히 다가가 다시 말했지. 팀장님, 저 면담 좀...




또 똑같은 대화가 반복됐다.


 빈 강당에 마주 앉았다. 조용히 내민 사직서를 보고 팀장님은 한숨을 쉬셨다. 한 장씩 꺼내 찬찬히 살피더니 이내 다시 파일 안으로 넣으셨지. 그리고 휴대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팀장님 잘 지내시죠? 다름이 아니라 우리 팀 막내가 그쪽 팀 가면 너무 잘할 것 같아서. 얘는 내근 체질이야. 나는 그 앞에 앉아서 가만히 웃었다. 팀장님, 다 소용이 없어요. 저는 이제 너무 지쳐버렸어요.


 또 똑같은 대화가 반복됐다. 다만 다른 몇 가지는 내가 그때보다 조금 더 지쳤고 조금 더 회사가 싫어졌다는 것. 우리의 첫 번째 면담 후로 내 동기가 다섯이나 더 퇴사했다는 것. 바깥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 사라졌다는 것.




내 사직서는 문서파쇄기 안에 있을까


 팀장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른 데 서류라도 붙으면 사인해줄게. 너 하고 싶은 거 딱 정해지면 그때 그만두자. 이렇게 힘들다고 다 뿌리치고 나가버리기엔 네가 너무 아까워. 그건 너 자신에게 너무 무책임한 거야. 도망치는 거잖아. 그때까지 내가 이거 안 돌려줄 거야. 이거 그냥 다 파쇄기에 넣고 갈아버릴 거야.

 

 나는 그 상황이 조금 웃겼다. 물론, 백수보단 이직이 모양새 좋다는 걸 안다. 근데 그냥 힘들어서 그만둘 수도 있는 거잖아. 좀 쉬고 싶어서 그냥 놀고 싶어서 그만둘 수도 있잖아. 그동안 쉼 없이 수능보고 토익따고 취준하며 살았으니 한 번쯤은 다 때려치우고 놀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도망치고 싶을 때가 다들 있지 않냐고. 나이 들면 더 도망치기가 힘들텐데 스물일곱에 도망치는 게 뭐 어때서.


  팀장님은 내 사직서를 가져가 돌려주지 않았다. 지금도 그의 손에 있겠지. 아니면 파쇄기에 넣고 정말 갈아버렸을까. 그 날 이후 윙윙대는 파쇄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조금 더 도망치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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