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술, 밤만 있으면 우린 뭐든 할 수 있지
치앙마이에는 혼자 여행 온 사람이 많다. 특히 아시안 여자들이 많은 편이다. 지금은 아파트를 렌트해 지내지만, 호스텔에 일주일 간 머물며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매일 밤 새로 사귄 친구들과 The Northgate Jazz Pub에 간다. 매일 다른 밴드의 잼을 듣고 감동받고 술에 취하고. 서툰 영어로 마음을 나눈다.
간호사 A
한국인이시죠?라고 누가 물었다. 곱실거리는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은 야무진 얼굴. 간호사였다. 아주 크고 좋은 병원에서 일하던. 도저히 병원에 못 있겠어서 조금 다른 일을 하다가 서른이 넘어 호주로 떠났다 했다. 멜버른에 1년간 있다가 이제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인데 잠깐 치앙마이에 들렀다고. 로스트 치킨에 맥주를 마시며 언니는 조언했다. 너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호주 가. 워홀 비자 나올 때 떠나. 1년 안 채워도 돼. 6개월만 있어봐. 네가 살던 세상이 얼마나 좁고 못났는지 깨닫게 될 거야.
청도이로스트치킨에서 나와 그랩을 잡아타고 재즈바에 갔다. 노스게이트에 간 첫날이었다. 너무 훌륭한 연주를 들으며 나는 거의 울뻔했다. 옆을 보니 언니도 그런 것 같았다.
웹 디자이너 B
네일을 받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들어왔고 네일 아트를 해주던 아티스트가 한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소파에 앉아 카톡을(...) 켰다. 한국분이시죠? 이번엔 내가 먼저 물었다. 혼자 오셨어요? 네. 오래 계세요? 이번 주까지만 치앙마이에 있고 곧 방콕으로 가요. 아 저는 오래 있어요. 퇴사하고 와서. 저도 퇴사하고 왔는데. 아 정말요?
두 번째 회사를 퇴사하고 치앙마이로 왔다던 그녀는 방콕과 끄라비를 모두 돌아보고 다음 달에 한국으로 들어간다 했다. 실업급여가 얼마나 꿀 빠는 일인지 설명하던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블루 누들이라는 데가 맛있다던데, 그거 먹고 재즈 들으러 가요. 너무 기쁜 마음으로 함께 노스게이트에 갔다. 맥주나 와인 대신 쌩쏨이라는 도수가 40도나 되는 태국 럼을 시켰고 둘이서 2병을 마셨다. 그녀도 아주 오랫동안 건반을 쳤고, 실용음악을 전공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3팀의 공연을 다 보고 나와 올드타운을 정처없이 걸었다. 에어팟을 한쪽씩 나눠 끼고 <스타이즈본> 사운드트랙을 무한 재생했다. Shallow가 나올 때, 재즈 공연을 보면서 꾹꾹 참아냈던 눈물이 조금 터진 것도 같다.
회사원 C
호스텔에서 만난 그녀는 아침 7시부터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며 한숨을 쉬었다. 한국은 지금 9시니까요. 칼 같네. 방긋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뭐 해달라고 하던데 싫다고 했어요. 저 휴가 중이거든요. 사실 저는 이번이 두 번째 회사예요. 첫 번째 회사 퇴사하고는 남미에 혼자 한 달 동안 다녀왔어요. 수진씨도 조금 먼 나라를 갔다면 해방감이 더 컸을지 몰라요.
그날 밤 C와 함께 노스게이트에 갔다. 지난 주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의 잼이 이어졌다. 화장실에서 만난 그녀는 줄 서있는 외국인들과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찰랑이는 롱 원피스를 입은 세상 청순한 아웃핏의 그녀는 춤도 잘 추고, 낯선 이들과 거리낌 없이 대화하고, 회사에 싫다고 연락하지 말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Peem, Moss, Ploy
A와 C와 함께 Zoe in Yellow에 갔다. 치앙마이 유흥의 성지랄까. 모든 외국인이 모인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상상불가지만 치앙마이 대부분의 펍은 자정까지만 영업한다. 11시 55분에 귀신같이 라스트 송을 트는 DJ를 보며 한숨 쉬던 우리 앞에 나타난 구원자들. 핌과 모스, 플로이는 아는 데가 있다며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새벽 2시까지 춤추고 마시고 떠들다가 포장마차에서 똠양누들을 먹었다. 처음 사귄 태국 친구들이었다.
핌은 치앙마이에서 태어나 방콕에서 대학을 다닌다. 생글생글 웃으며 얼음을 챙겨주고 음식 주문을 받아주고 사장님에게 애교섞인 인사를 건네고 돈을 걷어 계산을 도맡아 했다.
모스는 치앙마이에서 태어나 치앙마이에서 대학교를 다닌다. 예전에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온 적이 있어 한국말을 조금 할 줄 안다. 그녀의 인스타에는 이대에서 찍은 사진이 몇 장 있다.
플로이는 치앙마이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살다가 방콕으로 대학을 갔다. 코사무이에 집이 또 있으니 놀러 오면 집을 빌려주겠다고... (이게 말로만 듣던 태국 부자인가... 심지어 약간 제니닮음...)
타지에서 상냥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신세를 지고, 마음을 나눈 첫경험이었다.
낯선 곳에서 낯선 이들을 만난다. 겁이 나지만 싫지 않다. 이곳 치앙마이에서 매분 매초 세상이 넓다는 걸 체감한다. 이렇게 나와 다른 결의 삶을 사는 사람이 많다니. 낯선 감정들이 주는 감동의 대단한 크기. 그런 의미에서 오늘 밤도 재즈 들으러 갈 계획... 어느 드라마 대사처럼 재즈와 술만 있다면 못할 것이 뭐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