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정석
생애 가장 열렬했던 짝사랑은 열여섯 때였다. 수학 학원 같이 다니는 고3 오빠였다. 고등학교 학생회장이라 했던가. 그때도 나는 어디 어디 회장, 반장 이런 걸 좋아했다. 고등부 농구대회 같은 데서 뛰기도 했다. 포인트가드였는데. 공부 잘하고 운동 잘하고 잘생겨서 어른들이(물론 학원 여자애들도) 좋아하는 엄친아 스타일이었다.
3학년 1학기 기말고사 시험 기간이었다. 장마철이었다. 새벽까지 학원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집에 가려는데 앞이 안 보이게 비가 쏟아지더라고. 미혜랑 둘이서 이 비를 뚫고 뛰어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학원으로 다시 올라갔다. 혹시 누가 놓고 간 우산이라도 있으면 빌려 쓸까 하는 마음에. 3층에서 누가 내려오는데 그 오빠였다. 눈인사를 하고 호다닥 올라갔는데 뒤에서 그 오빠가 부르더라고. 너네 우산 없어?
방아쇠 당기듯, 사랑에 폭 빠지는 순간이 있다. 수학의 정석 1이었다. 그 책 맨 앞장을 뜯어 휴대폰 번호를 적은 후 우산과 함께 줬다. 너네 둘이 같이 나눠 쓰고 가고 나중에 번호로 연락해서 우산 돌려줘. 그거 선물 받은 거라 주기는 좀 그래. 와, 지금 회상하다 보니까 청춘드라마 같아. 거의 반올림 레벨인 거 같은데? 이 정도 비하인드 스토리면 누구든 짝사랑에 빠지기 마련이지 않을까.
거의 1년을 꼬박 좋아했다. 좋아한다고 고백을 해보기도 했다. 쌍방의 연애감정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애틋함이 있었다. 그때쯤 시력이 나빠져서 안경을 바꿨어야 했는데, 언젠가 그 오빠가 빨간 뿔테 안경이 예쁘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그대로 안경을 맞췄던 것도 기억난다. 교복 줄이는 거 싫다고 해서 단 꿰매었던 거 다 뜯기도 했다. 다이어리에는 형형색색의 펜으로 그 이름을 깜지쓰듯 써 내렸다. 오빠는 내 친구들을 모르는데, 내 친구들은 다 그 오빠를 알았다.
지금 생각하니 고3이 중3 보고 무슨 생각을 했겠나 싶어. 나한텐 풋사랑은 아니었는데. 대학교 가서도 총학생회장 했다며. 어디 방송국에서 일한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그 이후로는 알 길이 없다. 잘 살고 있나 모르겠네. 지금도 그때 생각하니까 몽글몽글해졌어 뭔가. 간지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