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골고다>
저희 집에는 '마법의 바람'이 있습니다. 소윤이가 아장아장 걷던 13개월에 시작했던 그 마법이 아직도 통하더군요. 중학생이 된 소윤이도, 식사량으로 따지면 이미 어른이 된 초딩 소명이도 다치면 엄마에게 달려옵니다.
"엄마! 나 방문에 발꼬락 부딪혔어!"
"엄마! 나 놀이터에서 넘어졌어!"
아픈 곳을 "호~ 호~ "하고 불어주면 마법처럼 통증은 사라지고 아이들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네요. 아픔에 관심과 공감을 보낸다는 그 마음이 귀한 약이 되고는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이라는 표현이 있나봅니다.
그런데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죽음에 매달린 이의 그림을 보았습니다. 피흘림보다 더 고통스러운 무관심 한가운데 세워진 십자가. 뭉크가 그린 십자가에는 슬픔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군중들은 십자가를 등지고 서 있네요. 십자가 아래에는 뭉크의 마음을 지배하던 인물들이 그려져있습니다. 뭉크가 불륜의 관계를 맺은 여인의 남편. (십자가 아래 서 있는 노란색 수염의 남자) 그를 바라보는 우울한 옆 모습의 뭉크.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그를 키워준 이모. 뭉크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스승까지. 이들은 십자가도, 예수에게도 관심이 없습니다.
"군중 각자는 예수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자신만의
고통에 몰입되어 있을 뿐이다....
내 고통을 누가 구원해 준단 말인가.
위안도 구원의 희망도 귀찮을 뿐이다."
_김현화 <성서 미술을 만나다> 중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의 얼굴에는 고통보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그려져있네요. 예수가 흘린 피조차 땅으로 흐르지 않습니다. 그의 피는 그저 하늘을 붉게 물들일 뿐입니다. 뭉크는 20세기의 첫 작품으로 <골고다>를 그렸다고 합니다. 뭉크가 바라본 20세기는 구원도, 위안도 사라진, 그저 개인의 불안과 고독, 무관심만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사순절에
뭉크의 십자가를 보며
생각해 봅니다.
골고다에 서 있지만
구원도, 부활도 관심없는 눈빛은 아닌지.
불안과 무관심한 얼굴로
십자가를 등지고 서있는 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