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양희 Apr 05. 2024

이상하고 아름다운 생(生)

중심을 잡고 있는 이들의 믿음과 신념은 존중받아야 한다


  2009년 어느 날, 친구 크리스가 짧은 글을 보내왔다. 5분 만에 휘리릭 읽을 정도로 짧은 글이었지만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 생(生)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글의 제목은 The Egg, 알이다. 베스트셀러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마션’의 작가 앤디 위어(Andy Weir)가 쓴 The Egg는 신이 화자가 되어 48세에 죽은 주인공에게 삶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 형식으로 적힌 초단편 소설이다. 신은 죽은 이에게 모든 사람은 역사 속에서 다른 삶을 경험하는 동일한 영혼임을 알려준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이며 이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진 '나'라는 존재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다. 모든 개인이 상호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삶을 경험하는 하나의 존재라는 개념은 이전에 있었던 자아와 외부, 탄생과 죽음에 완전히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인간의 존재와 우주 속 우리의 위치에 대해 짧은 문학이 던지는 깊은 철학에 빠져있었던 날이었다. (글 끝에 소설의 전문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한 영화를 보며 그와 비슷한 충격을 받았다. 바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다. 마블 영화로 유행하기 시작한 멀티버스의 개념을 이용하여 생의 상호연결성에 대해 풀어낸 영화다. (이후,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포함) 주인공 에블린은 미국에 이민온 후 세탁소를 운영하며 세무당국의 조사에 시달리고 있었고, 남편의 이혼 요구와 딸의 커밍아웃으로 더욱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던 중 다른 평행우주에서 나타난 남편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에블린이 나서야 한다는 임무를 주게 된다. 그 다른 우주에서는 모든 평행우주를 파괴하려고 하는 악의 화신이자 자신의 딸인 조이가 활개를 치는데, 에블린은 자신의 딸을 물리치기 위해 여러 우주 속에 살고 있는 본인의 능력들을 소환하여 그녀와 맞서고, 결국 세상을 구한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요 설정은 매 순간 이루어지는 우리의 선택에 따라 서로 다른 결과를 가지는 다차원적 우주들이 창조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의 결정이 자신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의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시사한다. 나비효과와 엔트로피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영화는 그저 멀티버스의 존재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혼돈 속에서도 포용과 사랑, 가족 간 유대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어 더 큰 울림을 주었다.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모든 곳에, 다 같은 시간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개념을 실험적인 전개와 독특한 영상미로 풀어낸 이 영화는 202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7개 부문에 수상한 쾌거를 이루었다. 딸과 함께 세상의 어지러움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없는 ‘공’(열반, 혹은 허무주의)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은 이마에 눈을 하나를 더 붙여 소리 나는 곳을 굽어보는 존재로 거듭나면서 사랑과 친절함으로 싸웠다. 그녀의 모습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평안함이 아닌 나와 내 외적인 존재와의 관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다 달았다.



  인생의 의미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문학과 영화, 드라마에서 점점 더 많이 다루어지면서 생과 사, 사후 세계에 대한 발칙하고 창의적인 세계관을 만들어내는 작가들과 창작자들의 상상력에 놀라곤 한다. 과거에는 종교의 영역에 있었던 생과 사후에 대한 해석들이 대중문화에서도 재해석되며 사람들의 삶에 재미있는 생각거리를 던져 주고 있다. 일반 대중으로서 이렇게 깊이 있는 콘텐츠를 만나면 다른 이들과 나누고 이야기하고 싶다. 유일신을 믿는 신실한 종교인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는 상상의 결과물들이 세상에 뻗어나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나는 궁금하다.




  나는 대학을 다니는 4년 간 채플을 드렸다. 기독교 학교에 입학한 이상 채플을 이수하지 않으면 졸업을 하지 못했기에 졸업을 위해선 꼬박꼬박 채플을 드렸어야 했다. 학교에 입학한 모든 이의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기에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채플은 교회에서 하는 예배보다는 조금 덜 종교적이었다. 주로 하나님이 전해주는 지혜와 말씀 안에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나를 둘러싼 환경(가족, 사회, 지구가 될 수도 있는)을 보살피며 살아가야 할지를 알려주는 시간들이었다. 때때로 무용채플과 합창 채플이 있었는데, 절대적 신께 바치는 아름다운 예술에 반해 나 역시 열심히 찬송가를 불렀다. 그 당시에도 불자였지만 마음이 어지러운 날이면 교목님이 전해주는 온화한 음성 속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으며 아침을 열었다.

  1학년 필수 이수 과목이었던 기독교와 세계에서도 A+을 받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종교와 세계, 인생에 대한 나의 탐구열이 활활 타올랐던 시기였다. 당시 과목을 가르치던 교수님은 절에 가서 절을 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배척당한 분이셨다. 종교인이자 학자로서 자신의 종교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해 비교 연구는 불가피한데, 그가 몸 담은 교회가 많이 배타적이었는지 교수를 우상숭배자로 보았던 모양이다.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면 불상에 절을 하는 것을 우상숭배로 여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불교에서 절을 하는 행위는 불상에 대고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서 하는 수련에 가깝다. 불상이 무언가를 이루어지게 한다고 생각하는 불자는 없을 거다. 불상은 상징이다. 간절한 누군가가 십자가를 검쥐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십자가가 무언가를 이루어 줄 거라고 믿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아마 그 교수님은 불교문화를 존중하는 것을 몸소 보여주기 위해 절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이슈를 몰고 다녔던 그 교수님 덕분에 유일한 신이자 인격신으로 불리는 하나님이 아닌 학문으로서의 기독교와 다양한 종교를 포용할 수 있는 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알 수 있었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한 층 깊어졌다.


대학원까지 포함해 6년을 다닌 아름다운 모교



  종교가 취하는 다양한 형태와 모습을 분석하기 위해서 이태원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오르기도 했다. 스마트폰 보급 전이었던 2007년의 봄, 길을 헤매고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간 언덕배기 위 이슬람 사원에서는 아잔(예배 시간을 알리는 소리)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사원 안에서 히잡을 쓴 한국인 무슬림을 만났다. 그녀는 자신이 왜 무슬림이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이전에 그녀가 무슬림 국가에 살았었고, 그때 이슬람 문화에 익숙해지면서 종교에 대한 이해도 깊어졌기 때문이란다. 종교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나라에 살고 있으니 자신의 선호로 종교를 선택한 것이라는 그녀의 말은 명쾌하고도 분명했다. 나 역시도 무신론자이자 범신론자인 불자지만(굉장히 길고 거추장스러운 나의 믿음 체계가 조금은 우습다) 불교라고 나의 종교를 공표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선호하는 문화와 관습, 교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불교이기 때문이었다. 많은 불교문화 중에서도 나는 티베트 불교를 선호하는데. 고원 사막지대에서 희소한 재화를 가지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종교에서는 결국 인간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할 작은 존재임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슬 푸른 칼날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시신의 배를 가른다. 돔덴이 시신의 뼈를 발골하여 토막을 낸 후 자리를 비키니, 주변을 에워싸던 독수리 떼가 시신으로 달려들어 만찬을 시작한다. 2시간 만에 시신은 뼈만 남는다. 식사를 마친 독수리들은 일제히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다. 금방이라도 파란색 잉크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로 망자도 함께 솟아오른다. 이 땅에 머무르다 자연에 바치는 마지막 보시를 한 샘이다.

  

  티베트와 같은 고원에서는 조장, 풍장의 풍습이 있다는 걸 중학교에서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있다. 하지만 조장이 이토록 적극적인 발골의 행위를 포함하는 장례 방법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여행 작가 김남희는 그녀의 책 <길 위에서 읽는 시>에서 우연히 참석한 티베트의 장례식을 생생하게 전달했다. 티베트의 고원은 나무가 자라지 않는 척박한 산지이기에 땔감을 들여 화장을 하기도 어렵고, 땅이 딱딱해서 매장도 어려운 지역이다. 이곳에서 조장은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망자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장례방식이었다.

  조장의 실제 모습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사람이 시신을 훼손하는 장면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주어진 환경을 최대한 활용하고, 주변을 오염시키지 않으면서 자연으로 회귀하는 티베트 문화와 그 문화의 핵심이 되는 불교 교리를 알게 된 후, 처음 느꼈던 놀라움의 감정은 전율로 바뀌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자신의 삶을 평화와 기쁨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이 궁금했고, 이런 문화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은 마음이 티베트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번진 것이다.        





  다양한 종교에 대한 탐구는 내가 원하지 않은 방식으로도 이루어졌다. 스무 살, 스물한 살 때는 ‘도를 아십니까’ 선생님들이 나를 목표물로 어찌나 자주 삼았던지, 시골의 어리바리함을 채 벗어내지 못한 나는 자주, 그것도 많이 그들에게 시달렸고 3학년이 되어서야 그들의 레이더 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실제로 당시, 나의 친구 한 명은 '도를 아십니까'를 따라가 화가 난 조상님들께 제를 올리기 위해 현금인출기에서 전 재산이었던 26만 원을 빼다 바치기도 했다. 그는 카이스트를 졸업해 현재 교수가 된 똑똑한 인재다. 종교라는 가면을 쓰고 누군가에게 경제적 손실을 끼치고 자신의 잇속을 채우는 이들이 많아지는 현실 속, 아무리 똑똑해도 쉽게 속아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사람의 마음은 유약함을 그를 통해 배웠다.

  또 한 번은 유학생이 많은 봉사활동 단체에 이끌려 그들의 회의실에 들어갔다. 놀랍게도 20살, 21살이었던 그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 국적의 사람들과 결혼한 상태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전 세계를 하나로 만들기 위해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혼인을 권장하는 종교 그룹의 신도들이었다. 겉으로는 좋은 취지로 보이는 그들의 교리에도 자유의지로 나의 짝을 찾지 못하고 종교적 권위자가 나의 파트너를 정하고 그 사람과 결혼을 한다는 건 나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나는 다시 그곳에 발길을 주지 않았다.

  가장 최근, 불교 모임에 같이 가자는 외국인 친구의 말에 함께 한 자리에서는 일본어로 된 요상한 주문을 외우는 가정집에 들어가 한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특정 종교를 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는 언어에는 ‘얼’이 있다고 믿는 사람으로서, 일본어로 만들어진 주문을 외고 싶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도 철저한 애국자도 아니거니와 일본인 친구도 몇몇 있지만 일본이 한반도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하면 그 언어로 만들어진 주문의 뜻을 알지도 못한 채 외고 또 외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임 역시 두 번 다시 가지 않는다.

  시어머니 역시 특이한 종교단체에서 활동을 하고 계신데, 심지어 그곳에서 파면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곳을 그리워하며 특별한 성경을 읽고 계신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전하는 말씀이 논리적이지 못해, ‘어머님, 이런 책을 좀 읽어보시는 게 어때요?’라고 제안했다가, 자신을 무시한다며 화를 내셔서 그 이후엔 종교에 관한 말씀을 하시면 그녀 옆에 앉아 귀를 닫은 채 그저 눈을 뜨고 있는데 최선을 다 할 뿐이다.





문화권 마다 다른 종교와 신, 사후세계에 대한 해석


  종교란 모두의 것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것이기도 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는 자신이 서있는 자리에서 쌓아온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가치판단을 내려 선택할 문제다. 종교의 이름을 걸고, 소수의 이윤을 챙기려는 사이비들이 판을 치는 세상 속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사이비 종교의 세계에 끌려 들어가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세상과 단절하고 스스로를 파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신론자이자, 범신론자이자, 불자인 내가 나 스스로를 이러이러하다고 정의 내릴 수 있는 이유도 나 스스로의 중심이 반듯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나는 대자연은 물론이고, 인간이 인간과 신을 위해 만들어놓은 창조물들을 보며 경외감이 드는 사람 이다. 종교가 문화의 큰 부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의 사회에 살면서 종교의 영향력 밖에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렇기에 각자의 신념은 더욱 존중받아야 하고, 공통된 가치를 소중히 여기며 서로 배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진실인지 참된 가치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생을 살고 있는 동안은 말이다.



경외심을 느끼게 하는 자연




The Egg
Written by Andy Weir
Translated by Soo Choi  최수영

당신은 귀가하는 도중 죽었다.
차사고였다. 그다지 특별한 사고는 아니였지만 치명적이였다. 당신은 죽으며 아내와 두 아이들을 남겼다. 다행히 고통은 없는 죽음이였다. 응급요원들이 당신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사실 몸이 아주 산산조각 나는 바람에 죽는게 나았다.
그리고 그때, 당신은 날 만났다.
“무슨... 무슨 일이 일어난거죠?” 당신은 물었다. “여긴 어딘가요?”
“당신은 죽었어요,” 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돌려말할 필요는 없다.
“트... 트럭이 미끄러지고 있었는데...”
“그랬죠.” 나는 말했다.
“내가... 내가 죽었나요?”
“네. 하지만 상심하진 말아요. 다들 언젠간 죽는 법이니까요.” 나는 말했다.
당신은 돌아보았다. 아무 것도 없었다. 당신과 나를 제외하곤. “여기가 어디죠?” 당신이 물었다. “사후세계인가요?”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내가 말했다.
“당신이 하나님인가요?” 당신이 물었다.
“네.” 내가 대답했다. “하나님이에요, 난.”
"내 아이들... 내 아내.“ 당신이 말했다.
“그들은 왜요?”
“그들은 괜찮을까요?”
“보기 좋군요.” 내가 말했다. “방금 죽었는데도 가족을 걱정하다니. 아주 좋아요.”
당신은 나를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당신한테는 나는 하나님이 아니라, 그저 한 남자로 보일 뿐이였다. 여자일 수도 있고. 베일에 싸인 권위자로 보일 수도 있겠다. 절대자라기 보다는 문법 선생님 같은 존재 같다고나 할까.
“걱정마세요.” 난 말했다. “그들은 괜찮을 꺼에요. 당신의 아이들은 당신을 완벽했던 사람으로 기억할꺼에요. 아내는 겉으로는 슬퍼하겠지만, 속으로는 안심하겠죠. 뭐, 둘의 결혼은 실패하고 있었으니까요. 이게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자신이 안심하고 있다는 거에 그녀는 매우 자신을 자책할꺼에요.”
“아.” 당신이 말했다. “그럼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죠? 천국이나 지옥에 가거나 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당신은 환생하게 될 겁니다.”
“아.” 당신이 말했다. “힌두교 얘기가 맞았네요, 그럼.”
“모든 종교는 다 그 나름대로 맞아요.” 내가 말했다. “저와 좀 걷죠.”
우리는 허공을 같이 걷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거죠?”
“딱히 정해진 곳은 없어요.” 내가 말했다. “얘기하면서 걷는 거죠.”
“그럼 요점이 뭐죠?” 당신은 물었다. “내가 환생하면, 난 다시 백지로 태어나는 거잖아요, 그렇죠? 아기로 말이죠. 그러면 내가 이번 생애에 경험하고 행했던 모든 것들이 다 무의미하게 되는 거고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답했다. “당신은 전 생애에서 얻은 모든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요. 그저 지금 당장 기억을 못 할 뿐이죠.”
나는 걷는 것을 멈추고 당신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의 영혼은 당신의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굉장하고, 아름답고, 거대한 것이에요. 인간의 생각은 당신의 존재의 그저 조그만 부분만을 담고 있을 뿐인거죠. 마치 컵에 담긴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 보려고 손가락을 담구는 것 같은, 그런 일이에요. 당신의 조그마한 부분을 컵에 담구고, 다시 꺼낼 때 당신은 그 그릇이 담았던 모든 경험을 얻는 거죠.”
“당신은 그간 48년 동안 인간으로 지내왔기 때문에 당신의 거대한 자아를 아직 다 느끼지 못한 것 뿐이에요. 여기서 좀만 지내고 나면, 당신은 모든 것을 기억하기 시작할 겁니다. 하지만 생애와 생애 사이에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요.”
“그럼 전 지금까지 몇 번 환생한거죠?”
“많이요. 아주, 아주 많이요. 아주 여러 가지의 삶으로 말이죠.” 내가 말했다. “이번에는 기원전 540년의 중국인 소작농 여자로 태어나게 될 꺼에요.”
“잠시, 뭐, 뭐라구요?” 당신은 더듬으며 말했다. “나를 과거로 보낸다는 말이에요?”
“뭐, 그런 셈이죠. 당신도 알겠지만, 시간은 당신의 세계에서만 존재해요. 나의 세계는 다른 방식으로 돌아가죠.”
“당신은 어디서 왔는데요?” 당신이 물었다.
“물론” - 난 설명하기 시작했다 - “난 분명 어디서론가 왔어요. 여기와는 다른 곳이죠. 그리고 거기서 나같은 존재들은 더 존재해요. 당신은 나의 세계에 대해서 더 알고 싶어한다는 걸 알지만, 솔직히 지금으로썬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아.” 당신은 약간 실망한 듯 했다. “잠시만요. 만약 시간 상 다른 곳에 제가 환생하게 된다면, 한번 쯤 내 자신과 맞닥뜨린 적도 있을 수 있겠네요.”
“그럼요. 항상 일어나는 일이죠. 그리고 두 생애 다 자신의 삶 밖에 인지할 수 없으니, 당신은 그런 일이 일어나는 지도 모르고요.”
“그럼 도대체 이러한 일을 하는 목적이 뭐인거죠?”
“지금 진심인가요?” 난 물었다. “지금 진심으로 나에게 삶의 목적을 물어보고 있는 건가요? 약간 진부한 질문이라고 생각 안해요?”
“타당한 질문이라고 생각 하는데요.” 당신은 물러설 기색이 없어보였다.
나는 당신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삶의 목적, 그리고 내가 이 모든 세계를 만든 이유는, 당신의 성장을 위해서에요.”
“인류 전체 말이에요? 우리가 다 성장하기를 원하는 건가요?”
“아뇨, 당신 한 명이요. 난 이 모든 세계를 당신 하나를 위해 만들었어요. 새로운 생애 하나 하나마다 당신은 자라고 성숙해져서 더 크고 대단한 지능을 가지게 될꺼에요.”
“저만요? 다른 사람들은요?”
“다른 사람들은 없어요.” 당신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건 당신과 저 뿐이에요.”
당신은 나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지구 상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은...”
“다 당신이에요. 당신의 각기 다른 환생이죠.”
“잠시만요. 내가 모두란 말이에요!?”
“이제야 이해하기 시작하는 군요.” 축하의 의미로 등을 툭 치며 내가 말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인간이라는 건가요?”
“그리고 이 후에 살 모든 인간이기도 하죠.”
“내가 아브라함 링컨이였어요?”
“그리고 존 부스 (역주: 링컨의 살인자)이기도 했죠.” 내가 덧붙혔다.
“내가 히틀러였다고요?” 당신은 끔찍한 듯 물었다.
“그리고 그가 살해한 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였죠.”
"내가 예수님이였단 말인가요?"
"그리고 그를 따른 모든 사람들이었죠."
당신은 조용해졌다.
"당신이 어떤 사람을 피해줄 때마다"--내가 말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피해주고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배풀 때마다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한거죠. 과거와 미래를 포함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겪은 행복과 불행을 당신은 이미 겪었거나, 앞으로 겪을꺼에요."
당신은 오랫동안 생각에 잠겼다.
"왜죠?" 당신은 물었다. "왜 이 모든 걸 하는 거죠?"
"왜야하면 어느날, 당신은 나와 같이 될 것이거든요. 그게 당신의 존재이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나와 같은 부류이죠. 나의 자식이에요."
"우와," 당신이 놀라서 말했다. "내가 신이란 말인가요?"
"아니, 아직은 아니에요. 당신은 태아에 불과하죠. 아직도 자라고 있는 태아. 시간 상의 모든 생애를 다 살았을 때, 신으로 태어날 만큼 자라나 있을 꺼에요."
"그럼 이 모든 세계가," 당신이 말했다, "그저…"
"알과 같은 거죠." 내가 대답했다. "자, 이제 다음 생애로 환생할 시간이군요."그리고 난 당신을 보내주었다.

전문 확인
 https://galactanet.com/oneoff/theegg_ko.html




이전 03화 종교가 뭐냐고 물으신다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