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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Mar 29. 2024

무엇을 입고 사나요

새 옷은 안 사고파요

  고등학교 3년간,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씻고 밥을 먹고 일곱 시 반에 학교에 가면 여덟 시부터 0교시가 시작됐다. 야간 자율학습까지 마치면 10시. 씻고 독서실에서 누가 가장 오래 남아있는지 친구들과 선의의 경쟁 아닌 눈치 싸움을 한 후 새벽 1시에서 2시가 되어야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입는 옷을 생각할 시간 따윈 없는 3년간의 수험생활이 끝난 후, 내 일상엔 너무나도 많은 선택이 들이닥쳤다. 정답만 찍어내면 되는 일상, 학교와 선생님, 대한민국의 교육시스템이 만들어 놓은 스케줄 속에서만 생활하다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내가 하는 모든 것과 모든 일에는 선택이 필요했고, 그에는 책임이 뒤따랐다. 짜인 것에 익숙해져 버린 나는 선택의 자유보다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더 크게 느꼈고 선택하는 게 싫었다. 이게 최선의 선택이 아닐까 봐 늘 겁이났다. 해보고 아니면 돌아가면 되는데, 정답만 찍어야 하는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는지 몰라 옷을 갈아입으며 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날씬하면 뭐든 입어도 잘 어울릴 텐데 하며 통통한 몸매를 저주하기도 했다. 외모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던 나의 학창 시절, 나는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나를 포지셔닝했기에 통통해도 자존감도 높고 언제 어디서나 당당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는 모든 게 달라졌다. 나보다 똑똑한 친구들은 나보다 예뻤고, 날씬했고, 옷도 잘 입었다. 더 이상 공부 잘함이 내 무기가 될 수 없는 곳에 와버린 것이다.


  교복에서 벗어나 새로운 옷을 입을 수 있는 대학생 새내기가 되었지만 지난 삼 년 내내 교복에 갇혀있던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지 못했다. 다행히도 옷가게를 하는 엄마가 나를 위해 코디해 준 옷들로 기숙사의 좁은 옷장을 채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평소에도 스타일이 좋지만, 시간, 장소, 목적에 맞는 스타일링의 중요성을 잘 알기에 나는 엄마로부터 옷 입는 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엄마는 평범하고 뻔한 스타일보다는 독특하면서도 멋이 배어 나오는, 유행이 타지 않는 그런 스타일이 멋진 거라 했다. 방학이면 집에 내려온 나는, 엄마 가게에서 해외의 길거리에서 찍은 평범하지만 스타일리시한 사람들의 사진들을 블로그에서 찾아보며 이 사람이 옷을 잘 입었네, 못 입었네를 평가를 했고, 가게에 있는 옷을 입어 보며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스타일의 정점은 엄마와 함께 간 부산의 깡통시장에서 완성되었다. 지인의 결혼식 참석을 위해 부산에 내려간 엄마와 나는 결혼식이 끝난 후 깡통시장에 들렀고 그곳에서 독특하면서도 좋은 품질의 구제 옷들을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고른 건 가오리 핏의 베이지색 코트였다. 그 옷은 미국에 있는 오늘의 옷장에도 여전히 걸려있을 정도로 내가 아끼는 최애템이다. 무심히 툭툭 걸쳐도 스타일이 완성되는 모 100%의 코트와 스웨터, 모직 치마와 포인트를 줄 수 있는 스카프들.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패턴들과 스타일, 뭐니 뭐니 해도 착한 가격에 빠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깡통시장을 찾게 되었다.

  외모에 한 창 신경 쓰던 대학생 시절의 나는 늘 옷이 모자랐다. 옷장에 옷은 가득 찼지만 입을 게 없는 신기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새 옷을 사고, 친구와 옷을 바꿔 입기도 하고, 엄마가 보내다 준 옷을 입으면서 오늘은 무엇을 입을지, 소개팅에는 어떤 옷을 입고 나갈지, 주말 약속에는 어떤 가방을 들지 옷들에 휘둘리는 생활을 20대 중반까지 해나갔다.

엄마의 패션에 영향을 받은 나와 동생







  취업을 위해 대전에 내려온 나는 서울에 있을 때보다는 덜 스타일리시한 사람이 되었다. 굳이 이곳에서 그렇게 스타일을 따질 필요가 있나 하는 지역에 대한 무시가 조금 깔린 태도이기도 했다. (시골인 영천에서 태어난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말이다.) 회사를 다니며, 크게 옷을 꾸며 입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반복되는 일상 속, 늘 보는 사람들과 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조금 더 알게 되어서였던 것 같다. 스쳐가는 많은 사람들 속, 내가 더 독보이고 싶었던 이십 대 초가 지나고, 내가 하고 싶은 것들, 내가 바라는 인생의 상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입는 옷으로 누군가에게 나를 알리지 않아도, 나 스스로도 온전히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진 것이다. 그간 열심히 살아왔고, 공부도 했고, 나름의 노력을 거쳐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옷에 대해 크게 가치관이 변한 건 클로드를 만나고 나서부터였다. 2년 정도 사귀었던 룩셈부르크 출신의 그는 항상 이상한 옷을 입고 다녔다. 어느 청년 행사에서 나누어 준 하얀색 티셔츠는 옆구리 부분에 작은 구멍이 나있었고, 학교에서 나눠준 노란색 티셔츠는 변색되어 나긋나긋해져 있는데도, 그는 계속해서 그 옷들을 입었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은행가인 부모님을 두어 부유함에도 자신이 입는 옷에 신경 쓰지 않는 그의 모습이 신기했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가 중요하지 않은 사람. 불필요한 물건들에 대한 욕심이 없는 사람. 본연의 모습을 중시하고,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그가 좋았다. 물론 그도 현대의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는 양복을 입고, 상황에 맞는 스포츠 웨어를 입는 사람이었다. 필요한 순간에도 후줄근한 티셔츠만 입는 것은 예의 없는 일일 테니 말이다. 그와 함께 하는 동안 좋은 영향을 받아서인지 나 역시 옷에 대한 소비를 줄이기 시작했다. 이미 입을 옷은 많았고, 굳이 옷이 아니더라도 나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많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입던 옷들을 입고 또 입는 것에서 나아가 입지 않는 옷들을 처분하기 시작했다. 헌 옷 통에 넣거나 친구들에게 건네주었다. 삶이 단순해지는 기분이 좋았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기 시작한 20대 후반부터 내가 좋아한 옷 브랜드가 있다면 프라이탁과 파타고니아다. 프라이탁은 메신저 백으로 유명한 스위스 기업이다. 스위스 일하고 있던 구남친, 클로드를 만나러 취리히에 갔을 때, 프라이탁의 매장을 처음 방문했다. 컨테이너 박스를 수직으로 쌓아 건물로 만든 가게의 구조가 참 특이했다. 친환경과 업사이클링을 표방하는 기업으로써 가게마저도 컨테이너로 만든 것이 인상적이었다. 프라이탁은 그래픽 디자이너였던 프라이탁 형제가 사용하고 난 트럭용 방수 타포를 가지고 자신들의 가방을 만들면서 시작한 기업이다. 당시 형제는 자전거를 타고 등하교를 했는데, 비가 올 때마다 내용물이 젖는 가방을 대체하기 위해 버려지기 직전의 방수 타포를 활용하여 튼튼하고 질긴 가방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를 시작으로 만들어진 각각의 가방은 서로 다른 역사와 무늬를 지닌 방수타포로 만들어져 세상에 하나뿐인 디자인을 지닌다. 프라이탁 제품은 재활용한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음에도 상당히 고가다. 제품의 가격이 비싼 이유는 인건비가 비싼 스위스 공장에서 직접 생산하기 때문인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원재료가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발생하는 탄소 발자국을 줄이기 위해서다. 또한 100% 빗물만을 활용하여 방수 타포를 씻어내는 공정을 개발함으로써 물 사용량과 오염도룰 줄여나가고 있다. 제품의 가격이 비싸긴 하지만 가격을 매긴 이유가 너무나도 합당해서 절로 수긍이 간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제품에 가격으로 더해진 것이다. 요즘에는 면직물류 등의 라이프웨어(생활 속에서 입는 의류)들도 생산을 확장했는데, 그 역시도 원재료들이 이동하면서 생성되는 탄소 발자국을 최소화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생산된 목화를 가지고 그곳에서 직접 직물을 만들고 옷을 제작하여 판매하고 있다. 물론 수출되어 한국에서 옷을 사 입게 된다면 탄소발자국이 남게 되는 것이지만 그 지역에 여행이라도 가 볼 일이 있다면 충분히 구매할 의사가 있다. 빠르게 유행이 변화하는 오늘날의 의류 시장 속, 환경의 가치를 생각하는 프라이탁의 옷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프라이탁의 메신저 백 (출처:프라이탁 홈페이지)


  파타고니아 역시 친환경기업의 대표 주자다. 한국에서도 한때 유행처럼 파타고니아 반 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젊은 남자들을 많이 목격했었다. 과연 파타고니아 티셔츠를 입는 이들이 Worn Wear(원웨어)라는 파타고니아의 평생 수선 책임을 알고 그를 구매했을지 궁금했던 한때가 있었다. 파타고니아는 환경과 모험을 사랑한 이본 쉬나드가 클라이밍을 위한 스포츠 용품을 직접 만들기 시작하면서 창업한 기업이다. 전체 매출의 1%를 환경 보호 기금으로 사용하는 이 기업의 문화는 이본 쉬나드가 쓴 책 <파도가 칠 때는 서핑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유기농 목화를 사용하고, 플라스틱병을 재활용하여 만든 섬유로 옷을 짓는 일을 1990년대부터 해온 이 기업은  ‘우리는 우리의 터전, 지구를 되살리기 위해 사업을 합니다.’라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 파타고니아는 그들이 생산하는 모든 것이, 팔리고, 운송되고, 보관되고, 세탁되고, 버려지는 전 과정에서 결국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침을 인식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다. 그리하여 제품이 소비자에게 꼭 필요한 것인지, 자문하며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과 소비는 결코 멈출 수 없는 활동이지만 기왕 하는 것이라면 더 나은 내일과, 지구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오래 입고, 덜 소비하는 것. 그것이 요즘 내가 옷을 대하는 태도다. 돌고 도는 유행 덕에, 예전의 옷들도 스타일리시하게 입을 수 있다. 게다가 요즘 옷들은 꽤나 튼튼해서 웬만해선 해지거나, 찢어지는 일이 드물다. 되도록 세탁 역시 자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요즘 옷의 주원료인 폴리에스테르는 플라스틱으로 세탁 시, 엄청난 량의 미세플라스틱들이 떨어져 나가 우리의 식수원을 오염시킨다. 옷을 사지도 않고 세탁도 잘하지 않는 더러운 짠순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 우리 생활에 그리 많은 옷과 그리 많은 세탁은 필요치 않음을 2017년부터 몸소 체험하고 있다. 과거의 사진을 정리하면서 마주하는 내 모습은 어느 순간, 어느 공간에서든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늘 다르게 행복해 보인다.

나는 남편이랑도 옷을 같이 입는다 ㅎㅎ


  2022년 방송대상을 수상한 환경스페셜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는 지구가 헌 옷으로 겪고 있는 고충을 여실히 드러낸다. 한번 입고 마음에 들지 않아 버려 버린 우리의 옷들은 지구 반대편 남미나 아프리카로 보내진다. 몇몇은 그곳 시장에서 내가 구제 옷을 샀던 것처럼 현지인들에 의해 소비되지만 대부분은 강이나, 바다, 고원 등에 버려진다. 옷으로 만들어진 무시무시한 산. 소가 그 산을 타며 섬유를 먹고 있는 장면이나, 옷이 가득 쌓인 해변의 탁한 물 색깔을 보면 입이 뜨악하고 벌어진다.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일이란 걸 알았는데, 영상을 통해 무시무시한 사실을 마주하니 지구에게 정말 미안해졌다. 결국 돌고 돌아 우리에게 올 그 재앙을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무시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다큐멘터리 환경스페셜 캡쳐


  지난해 말, 내가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외갓집에 있던 그녀의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미국에 돌아왔다. 동생들도 각자가 좋아하는 할머니의 옷을 챙겨 가방에 넣었다. 할머니가 입던 밤색 패딩 코트에는 할머니 집 냄새가 난다. 은은한 이 냄새에는 할머니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 추억을 이곳까지 가져온 것 같아 기쁘다. 나에게 남겨진 대부분의 옷에는 저마다의 추억이 있다. 처음 산 구제 코트는 엄마와 쇼핑의 추억이, 조지아 출장에서 돌아오기 직전 빈티지 샵에서 산 보라색, 초록색의 체크무니 코트에는 처음 가본 나라와 그 옷을 입고 다녔던 모든 곳의 추억이 담겨있다. 추억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나 스스로를 가꾸는 마음으로 지금의 옷을 관리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언젠가 새 옷이 필요하게 될 그날, 향후 20년 동안 입을 수 있을지를 생각해야겠지. 포근한 할머니의 냄새에 파묻혀 글을 쓰면서,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약속을 적어본다.  

출장지 빈티지 샵에서 산 내사랑 코트
다시 통통해져 꽉 끼지만 여전히 열심히 입고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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