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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Jun 02. 2024

두 얼굴의 도시

뉴욕 / 비긴어게인

이름만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도시가 있다.


그곳은 바로 뉴욕.


고층 빌딩이 빽빽하게 들어차 숲을 이룬 지상 최고의 도시 뉴욕은 신비한 매력으로 여행자를 매혹시킨다.


브로드웨이의 번쩍이는 네온사인들과, 쉴 새 없이 화면을 바꾸는 타임스퀘의 전광판에 시선을 빼앗긴 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부는 뉴욕의 한 복판에서 남편과 뮤지컬 ‘물랑루주’ 공연장에서 빠져나와 거리에 나섰다. 이제 막 부부가 된 우리는 공연 예술의 세계와 영화 속 같은 도시의 뷰 그 사이 어느 지점에서 현실감각을 잃은 채 거리를 무작정 걷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들과 연신 셀카를 찍으며 그곳에 있음을 추억으로 남기기 바빴고, 붐비는 인파와 도시가 내뿜는 분위기에 취해 나 역시 한껏 들떠 있었다.


타임스퀘어, 물랑루즈,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우리는 신혼여행지로 뉴욕을 택했다. 나는 여행지로 도시보다는 자연을, 현대적인 곳보다는 고전적인 곳을 여행지로 선호하는 사람이지만 어쩌다 보니 뉴욕에 와 있었다. 나와 남편은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애를 하던 장거리 커플이었기에, 한국에서 결혼식을 했으니, 미국에 신혼여행을 가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했다. 각자의 직장 휴가도 적게 소진하면서 결혼식을 위해 한국에 온 남편을 본국에 데려다줄 수 있고, 미국에서 가장 많은 러브 스토리를 만들 수 있는 곳이 뉴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탁 터놓고 말하면 ‘낭만’과 ‘로맨스’ 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물이었다 할 수 있다. 신혼여행으로 뉴욕이라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뉴욕을 신혼여행지로 삼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을 하며 글을 써 내려간다.


여행을 할 때마다 그곳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떠오른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와 TV시리즈 증,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건 Sex and the City와, 비긴 어게인 일 것이다. 섹스 앤 더 시티 속, 사랑을 찾는 도시여성들의 싱글라이프는 막 스물이 된 내가 동경하던 모습이었다. 프로페셔널하고 자신감 넘치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과 활기찬 도시를 담고 있는 그 영화는 어른이 되면 저렇게 사랑하는 구나하며 보았던 어린 어른이 된 내가 즐겨보던 성인물(?)이었다. 개방적인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간접체험 할 수 있었던 그 영화가 실제 연애를 하면서 거짓임이 밝혀지고, 점점 잊혀지던 어느 날, 비긴어게인이 개봉하며 환상의 뉴욕보다 현실적 뉴욕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영화를 볼 때 즈음엔 나도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때였다. 영화는 뉴욕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과 이별, 실패, 우연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음악들, 이 모든 것이 억지스럽지 않게 그려져 뉴욕이라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실제 뉴욕은 수 십 개의 가면을 쓴 도시다. 무엇이 진짜 얼굴인지 분간할 수 없지만 아마 내가 본 모든 모습이 뉴욕일 거란 생각이 든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지하철을 갈아탄 후, 맨해튼 중심부 지상에 딱 나왔을 때 번쩍이는 고층 빌딩에 매달린 창문 닦는 사람들을 마주했다. 그들이 열심히 유리벽을 닦아서인지 강렬한 햇빛이 건물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렇게 처음 본 뉴욕은 자본으로 칠갑한 다이아몬드 같이 보였다. 화려한 도시는 밤에도 여전히 빛났는데 화려하다 못해 낮보다 밝은 인공조명아래 도시 전체는 잠들지 않고 번쩍이는 올빼미의 눈을 닮았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마스크가 필수였던 코로나 시기였지만 뉴욕에서는 마스크를 끼는 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실제로 다른 나라이긴 하지만) 그곳에서 시민들의 공중보건 의식은 개인의 자유라는 우선된 가치에 무참히 밟혀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마스크 없이 거리를 누비며 묘한 해방감을 맛봤다.

뉴욕 지상의 화려함을 뒤로한 채 지하로 내려가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100년 이상 된 뉴욕의 지하철은 너무 낡은 나머지 더럽기까지 하고, 지저분하고 질서 없는 이들 또한 넘쳐났다. 지하의 실내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마약을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 신기한 건 그 무질서한 공간에서도 몇몇 길거리 예술가들은 자신을 위해, 혹은 타인을 위해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며 작은 공연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좋고 나쁨의 경계가 없는 곳.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낭만적인 것 같기도 한 이곳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바쁘고, 번잡하며, 높고, 활기차고, 시끄럽고, 더럽고, 어지러운 도시, 뉴욕. 영화 ‘비긴 어게인’이 담은 뉴욕 또한 내가 만난 뉴욕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뉴욕은 주인공 그레타와 댄이 상처와 실패를 맛보는 장소이자, 우연히 만난 사람들과 연결되며 반짝이는 문화와 계획하지 않은 창의성이 발현되어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뉴욕의 고층빌딩과 밤거리


그레타와 댄은 서로의 최악의 순간에 만났다. 그레타는 뉴욕에 함께 온 잘 나가는 가수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바람에 혼자가 되었고, 댄은 파탄난 결혼생활 때문에 지키고 힘든 데다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 난 상황이었다. 라이브 펍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은 음악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뉴욕 거리에서 노래와 연주를 하며 음반을 녹음했다. 둘이 함께 만드는 음악들은 실연의 상처와 새로운 시작을 노래하며 도시의 소음과 우연성을 담아 아름답게 완성되었다. 뉴욕이라는 예측불가의 공간에서 만들어진 음악들에는 도시의 생동감이 더해져 그들이 추구하는 자연스러움과 새로움을 만들었고 음반을 녹음하는 과정에서 두 주인공들은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며,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가지게 된다.


겉에서 보는 피상적 뉴욕은 화려하면서도 더럽고, 멋지기도 하면서 불편하고, 넓고 거대하기도 하면서 비좁은, 다양한 방면에서 양가적 얼굴을 모두 가진 이상한 도시다. 지금 막 생긴 남편이란 존재는 멋진 공연을 보고 실컷 들떠 있다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처음으로 행그리한(Hugry+Angry=Hangry, 배고프면 화를 내는) 모습을 보였는데, 함께한 첫 여행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모습에 노출된 나는 그에 대한 짜증과 도시가 뿜어내는 어지러움 속에 놓여 가슴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영화 초반에 그레타는 남자친구가 만들었다는 새로운 음악 속에서 그가 바람을 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느끼게 되는데, 그녀에게 사고처럼 다가온 이별처럼 한 인간에 대한 배신감을 나 역시 느꼈던 것 같았다. ‘이 사람 괜찮은 줄 알았는데, 배고픔에 자기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원초적 인간이구나.’ 아빠를 닮은 남편을 골랐단 생각에 조금은 슬퍼지는 뉴욕의 밤이었다. 머리를 지배하는 그의 위장을 어르고 달래기 위해 엉겁결에 들어간 식당에서 80불 가까이를 쓰고선 도시 속 덩그러니 혼자가 된 느낌을 받았다. 나의 감정을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이곳에 쓸쓸함의 파도가 밀려왔다. 이건 마치 군중 속의 고독인 듯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군중들이 모두 고독한 사람들은 아닐까라는 곳까지 불현듯 생각이 미쳤다. 화려한 밤거리, 그 많은 사람들 속 각각의 사람들은 활기차게 웃고 있지만 저마다 남모를 아픔이나 슬픔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 그때, 비긴어게인 영화 속 주인공들을 떠올리며 화가 났던 마음은 조금 지정되며 새롭게 시작되는 결혼생활에 임해야 할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레타와 댄은 뉴욕의 주요 랜드마크에서 음반을 녹음한다. 워싱턴 스퀘어 파크(Washington Square Park), 하이라인(The High Line), 차이나타운(Chinatown), 루프탑(Rooftop), 지하철. 뉴욕의 상징적인 장소들이 만들어낸 소음이 담긴 노래들은 살아 있는 도시의 느낌을 고스란히 담으며 뉴욕이 가진 에너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마음을 꾹꾹 담은 가사를 담백하게 노래하는 그레타를 보며, 그녀가 겪는 이별의 아픔, 지나간 사랑에 대한 그리움과 후회, 미련을 두지 않겠다는 깔끔한 마음들을 읽을 수 있었다. 뉴욕은 한 사람이 겪어가는 아픔과 성취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배경이 되어 그레타를 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앞으로 나아갔다. 뒤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의 삶을 향해. 앞으로. 또 앞으로.

하이라인 파크
뉴욕공공도서관


뉴욕의 장엄한 고층 빌딩들은 인간의 야망의 상징이다. 하늘을 찌르듯 솟은 마천루는 이곳을 사는 사람들의 포부와 성취를 속삭이는 듯 조용하면서도 시끄럽게 서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크라이슬러빌딩, 록펠러센터, 원 월드 트레이드 센터까지. 치솟아 있는 구조물들은 인류의 희망과 진보를 뜻하는 것 같지만 화려함 아래 드리운 그림자 속, 거리에는 거친 현실이 자리하고 있다. 홈리스들은 건물 현관들을 피난처 삼아 드러누워 있고, 고양이만 한 쥐가 거리를 활보했다. 거리에서 마구잡이로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내뱉은 이들을 종종 목격하면서, 이곳이 과연 안전한 곳인지 계속해서 확인해서 경계했다. 반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현대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전시된 방대한 예술적, 문화적 자본을 보며 왜 뉴욕이 문화, 예술의 수도가 될 수밖에 없는지를 여실하게 알게 되었다. 5시간을 둘러봐도 다 담 볼 수 없었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외부와 단절된 사각의 벽 안에 담긴 방대한 예술과 역사의 규모에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극명한 대조로 어지러움을 줬던 도시 뉴욕에서 내가 얻은 것이 있다면 밀물처럼 왈칵 가슴속에 밀려들어온 지적 활력과 예술적 자극이었다.


메트로 폴리탄 미술관


결국 뉴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모순이 조화를 이루며 춤추는 뮤즈’다. 명과 암이 뚜렷하게 존재하고, 도시에 대한 양가적 감정이 존재하지만 그 매력을 부정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뉴욕이다. 뉴욕은 그곳을 이루는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반영하는 무한한 얼굴을 가진 도시다. 그래서 영화 ‘비긴 어게인’에서도 그레타는 꿈과 사랑이 시험대에 올랐을 때도, 좌절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 수 있었다. 변할 수 있는 곳, 새롭게 탄생할 수 있는 곳. 뉴욕.

뉴욕은 내가 몰랐던 새로운 도시의 이면과, 새로 맞이한 남편이 숨겨왔던 모습, 웅장함과 거친 면이 만나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치명적이 결점에도 불구하고 뉴욕이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건, 아마도 영원히 매혹적이고 영감을 주는 도시이기 때문이 아닐까. 신혼여행지로는 별로지만, 홀로 여행했을 때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도시. 뉴욕에 언젠가 나 홀로 떠나고 싶다. (여봉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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