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 / 공주와 개구리
주룩주룩 비가 내리는 날, 카페 드몽드(Cafe Du Monde)는 축축한 비옷을 걸친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 ‘세계의 카페’라는 불어 이름처럼 온 세상의 사람들이 모인 듯했다. 좌석들은 지붕만 있고 벽은 없는 캐노피 아래 놓여있어 바깥의 비바람이 테이블까지 휘몰아쳤지만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날씨에 큰 불만이 없어 보인다. 카페의 명물인 비니에가 없는 테이블이 없었다. 갓 튀겨 나온 사각형의 밀가루 도넛 위에 곱게 뿌려진 하얀 설탕 가루가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흩어졌지만 아무 상관없었다. 이곳은 뉴올리언스고,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니까. 빗속에서 먹는 따뜻한 비니에의 바삭하면서도 달콤한 맛은 ‘카페 드몽드’의 시그니처인 특별한 커피와 더해져 맛이 진해진다. 카페 바로 옆에서는 거리의 가수가 조악한 스피커로 나오는 MR에 맞춰 그 보다 못한 목소리로 노래실력을 뽐낸다. 노래를 못해도 거리의 악사가 될 수 있는 곳. 나는 뉴올리언스다.
결혼 후, 미국으로 건너와 휴스턴에서 신혼을 보냈다. 미국에서 4번째로 큰 도시라는 휴스턴은 지금까지 내가 방문해 본 25개 나라의 여러 도시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자동차를 위해 만들어진 이 계획도시는 드넓은 텍사스의 땅덩이를 잠식이라도 하듯, 콘크리트를 부어 쭉쭉 뻗어나가는 도로망 위에 인간을 위한 배려 없이 건설되어 있었다. 타는 듯 한 더위마저 도시에 정을 붙이지 못하게 방해했던 그 곳. 휴스턴에서 영주권을 기다리며 미국 밖을 나갈 수밖에 없었던 나는 반 강제적으로 집순이가 되어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그리운 가족과 집에 갈 날을 기다렸다. 일 안 하고 놀면 좋을 줄 알았는데, 같이 놀 친구가 없으니 외로움이 나날이 커져갔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던 남편은 쉬는 날이면 어디로든 나를 데리고 나가 미국의 이곳저곳을 보여주었다. 내 마음이 집구석에 앉아,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는 데만 허비되지 않도록. 그렇게 미국 내,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고 남편의 상냥한 배려 덕에 나는 미 대륙 곳곳에 담긴 이야기들을 몸으로 읽을 수 있었다.
뉴올리언스는 휴스턴에서 비행기로 1시간 10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와 남편은 뉴올리언스를 당일치기 여행지로 잡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맛있는 음식이 사람들을 맞이하고 재즈가 흐르는 곳에서라면 휴스턴처럼 마음이 처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비니에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디즈니의 영화, [공주와 개구리]에서였다. 2009년 개봉한 이 영화는 디즈니 최초로 흑인 여주인공을 앞세웠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티아나는 기존의 공주 캐릭터들의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하는 적극적인 면모를 가졌기에 더욱 사랑스러운 캐틱터다. 다른 공주들과는 달리 너무 일과 성공에만 몰두하고 있어 낭만과 여유를 제쳐두고 일만 하는 특이한 인물이었는데, 오늘날 여성상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영화의 줄거리를 알아보자.
주인공 티아나는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자신의 식당을 열고자 열심히 일하는 젊은 여성이다.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는 그녀는 아버지를 닮아 음식을 만드는 솜씨가 뛰어났다. 그런 그녀가 손님들에게 대접하던 빵이 비니에였다. 네모난 모양의 빵에 슈가파우더가 잔뜩 올라간 그림으로 표현된 빵은 실제 모습과 똑같았다. 어떤 맛일까 궁금했던 비니에를 실제로 먹어보니, 영화 속 인물들이 왜 모두 이 빵을 먹은 뒤 반달모양의 눈을 감으며 사르르 녹는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있었다. 티아나의 빵에 반한 뉴 올리언스의 최고 부자는 도시를 방문한 나빈 왕자를 맞이하기 위한 파티에 티아나를 고용해서 빵을 만들게 했다. 한편, 도시를 방문한 나빈 왕자는 재즈를 사랑하고 국정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한량이었다. 왕과 왕비가 자신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끊어버리자 뉴올리언스 부잣집 딸과 결혼하기 위해 도시를 찾은 거다. 하지만 그는 거리를 떠도는 부두마법사에게 낚여 개구리가 되어버린다. 티아나는 파티에서 개구리로 변한 나빈 왕자를 만나 그가 다시 사람이 되면 엄청난 사례를 해주겠다는 말에 키스하게 되는데. 그림형제의 동화 ‘개구리 왕자’였다면 왕자가 다시 사람이 되는 결말을 맞겠지만, 디즈니의 [공주와 개구리]에서는 티아나가 개구리로 변해버린다. 개구리가 되어버린 티아나와 나빈 왕자는 다시 사람이 되기 위해 부두교의 대모 마마 오디를 찾아가며 모험을 펼친다.
영화 곳곳에는 뉴올리언스를 대표하는 상징들이 묻어나있다. 루이지애나의 대표 음식 검보부터, 비니에는 물론이고, 2층 테라스가 있는 프렌치 쿼터의 건축 양식과 거리에 넘쳐나는 재즈 연주가들이 모두 영화를 가득 채운다. 특히 부두교를 영화의 주요 소재로 활용한 점이 인상적인데, 이는 루이지애나의 19세기 역사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두교는 19세기 중미지역을 거친 노예무역으로 가톨릭과 서아프리카 종교가 결합된 새로운 토속신앙이다. 뉴올리언스 시내 곳곳에서 부두교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인형이나, 점쟁이 등으로 홍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운 기후와 미스터리 한 토속종교의 조합은 재즈와 더해져 도시의 매력을 증폭시킨다. 티아나와 나빈이 마마 오디를 찾기 위한 여정에서 만난 악어 ‘루이스’와, 반딧불이 ‘레이’ 역시, 미시시피 늪지대에 사는 생물군과 지형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캐릭터다. 사랑스러운 두 동물 조연들은 악기를 연주하고 사랑 노래를 부르며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티아나와 나빈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감초처럼 도와준다. 나는 그중에서도 ‘레이’를 좋아하는데, 한결같은 사랑과 친구에 대한 헌신을 보여주는 그의 모습에 눈물까지 흘렸다.
뉴올리언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끈적끈적한 두 개구리의 모험기는 그곳의 문화와 역사와 버무려져 있다. 비 오는 날 방문한 뉴올리언스는 영화 속의 모습과 너무 닮아있었다. 비니에를 먹고 난 후, 어느덧 비가 멎은 거리에는 곳곳에서 재즈가 울러 퍼졌다. 리드미컬한 타악기와 오르내리는 선율에 맞춰 나도 모르게 엉덩이가 씰룩 쌜룩 움직인다. 사람들이 북적인다 싶으면 그곳엔 거리의 악사들이 모여 공연을 하고 있다. 도시의 공기가 음악으로 가득 차 넘실거렸다. 고개를 돌리면 사방에서 서로 다른 음악들이 들려온다. 무심코 걷던 어느 거리에서는 뒤에서 음악이 나를 따라오기에 뒤를 돌아보니 결혼식 퍼레이드가 한창이었다. 길을 터주는 ‘앞잡이’ 뒤로 신랑, 신부가 우산을 든 채 춤을 추고 있었고 악기 연주자와 친구들이 그 뒤를 따른다. 색색깔의 양복을 입은 하객들도 춤을 춘다. 비로 젖어 축축했던 도로 위에서 한바탕의 축제 퍼레이드 같은 결혼식 행렬이 지나가니 거리가 환해졌다. 처음 보는 그들의 모습에서 묻어 나오는 행복에 나까지 행복해졌다. 영화 속의 한 장면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거리를 걸으며 유독 크게 들려오는 음악 소리를 따라 한 가게 앞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남편과 함께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 무대 앞쪽 빈자리에 앉았다. 두껍고 낮은 목소리가 진한 커피 향 같았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하는 가수는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불렀다.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이 마치 당신과 나를 위해 있는 것 만 같으니 세상이 어찌 멋지지 아니한가. 노래를 들으며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쳐다봤다. 멀리 시집온 내가 우울할까 요리죠리 데리고 다니며 다른 세상을 보여주려는 그의 노력이 음악처럼 다가왔다. 개구리 왕자 나빈과 티아나가 결국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고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 것처럼 아직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나는 ‘What a wonderful world’를 들으며 내 감정만 생각하다 잊고 있던 남편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을 떠올렸다. 서로를 위한 사랑만으로도 충만할 수 있다는 걸 잊고 나에게 없는 것에 집중했던 며칠. 나는 음악과 여행 덕분에 현재에 집중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게 되었다.
[공주와 개구리] 속 반딧불이 레이는 밤하늘에 떠있는 별을 홀로 사모한다. 그는 별 또한 자신과 같은 반딧불이인 줄 알고 이름까지 붙여가며 열렬히 사랑을 말한다. 별의 이름은 에반젤린. 별을 사랑한 반딧불이라니.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그의 구애는 처음에는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영화가 막바지에 다다라면 레이는 궁지에 몰린 나빈을 구하다 죽게 되는데, 그는 숨이 멎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에반젤린을 노래한다. 레이가 죽고, 그의 엉덩이에 있는 예쁜 불이 꺼지자 하늘에 있는 별 에반젤린 옆에는 새로운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늘 그곳에 있었겠지만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별. 티아나와 나빈은 그 별이 레이라고 생각했다. 애틋한 사랑의 결과 하늘의 별이 된 레이를 보고 나는 눈물지었다.
모든 디즈니 영화의 결말처럼 [공주와 개구리]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다시 사람으로 돌아온 티아나와 나빈은 서로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에서의 성공과 즐기기만 하는 인생의 가치관을 교환하며 그 중심에서 균형감 있는 삶을 살아간다.
인생이 영화같이 늘 로맨틱하고 극적일 순 없지만, 영화 또한 인생으로부터 나온 창작의 결과물이다. 사랑과 우정, 이해를 그린 [공주와 개구리]를 생각하며 영화 속에서 나온 뉴올리언스의 상징물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걸었을 때, 나도 에반젤린을 떠올렸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는 나의 에반젤린이야.”
맥락 없이 내 던진 나의 말이 무슨 뜻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남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영화도, 여행도 결국 이해와 사랑을 결말로 만들고 싶었던 나는 미스터리 한 한마디를 던진 후 그의 손을 잡고 재즈가 흐르는 거리를 계속해서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