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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양희 Feb 17. 2023

사랑을 다짐해 봅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누군가를 제대로 알고 이해한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순간순간 변하는 그 사람을 알아가는 데 한평생의 세월이 걸리지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빨치산을 아버지로 둔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주인공 아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장례식장에 와서야 아버지를 알고 지내던 많은 조문객들을 만나며 진정으로 그를 이해하게 됩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 공산주의를 접하게 된 아버지의 4년이 그 후 아버지뿐만 아니라 주변인들의 한평생을 뒤 흔드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신념이 달라도, 인간이기에, 가족이기에, 이웃이기에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밖에 없는 그간 삶의 행적과 끈끈한 인간애가 묻어 나오는 작품이었습니다. 언젠가 문학 교과서에 실릴 것 같아요.


종이책이 읽고 싶었던 이은진은 세 권의 책을 골라 한국에 잠시 여행을 다녀오는 시동생, 창남에게 배달을 부탁했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 책들 중 하나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휴스턴으로 날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 읽을 정도로 몰입감이 높은 이 소설을 읽으니 자연스럽게 떠올랐습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의 장례식 말이죠.


외할아버지의 장례식 첫날엔 슬픔이 공기를 가득 메웠습니다. 할아버지와 애착이 남다른 나의 엄마가 이 시간을 잘 버텨줄 수 있을까 걱정도 많이 했었지요. 장례식에서 찾아와 주신 조문객들은 대부분 엄마, 삼촌들의 지인들이었습니다. 소설처럼 할아버지의 직접적 지인들은 없었던 탓인지 할아버지를 알기보다는 엄마와 삼촌들, 우리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왔고, 지내고 있는지를 작은 창틈으로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지요.


비통함이 가득한 자리에서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지곤 합니다. 큰삼촌을 향해 요가자세 중 하나인 고양이 자세로 엉덩이를 뽕긋 세우며 절하는 어떤 아저씨가 등장해서 뒤에서 보던 숙모와, 나, 엄마는 웃음을 겨우 참아가며 예를 갖췄었지요. 웃을 수 없을 것 같은 자리에서도 웃긴 걸 보면 못 참는 걸 보니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할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도 잘 살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나는 자연의 법칙을 믿습니다. 사람이 죽어 흙이 되면 그 흙은 또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되고, 그를 취해서 살아나가는 다른 생명체들에 일부가 깃들게 되겠지요. 순환하는 자연 속에서 어쩌면 죽음은 나로서 끝인 동시에 새로운 존재로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티베트에서 행해지는 조장을 보면 즉각적으로 순환하는 자연을 느낄 수 있죠. 독수리에 올라탄 망자의 시신이 하늘을 가득 메우게 되니까요. 다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그의 삶과 그의 마음이 아닐까요.


여전히 보고 싶고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앞으로 있을 또 다른 상실에 대해서도 생각해 봅니다. 그 상실이 공허하지 않기 위해, 나와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 더 열심히 사랑하려구요. 후회하지 않게, 사랑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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