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겨울산의 매력을 아시나요?
힝구(남편)는 친구 없는 미국에서 열심히 자신의 도시락을 싸주는 앙순이가 안쓰러워 주말마다 새로운 곳을 보여주려 합니다.
“내일은 덴버로 가자.”
처음 로키산을 가게 된 건 산을 좋아하는 앙순이을 배려한 힝구의 계획 덕분이었죠.
나는 등산을 정말 좋아합니다. 나 홀로 한라산 2번은 기본이고, 계룡산은 한 두 달에 한번 정도는 남매탑, 삼불봉, 관음봉, 은선폭포, 동학사라는 주요 코스를 돌 정도지요. 산에서 뛰어다니는 저를 보고 등산 동호회 아줌마, 아저씨들은 운동선수냐? 군인이냐? 자주 묻곤 하셨지요. 게다가 코로나 직전에는 여름휴가로 이탈리아 돌로미티 알타비아 1코스를 7일 동안 걸으며 산장에서 먹고 잤던 찐 등산 Lover입니다.
힝구의 제안으로 갑작스럽게 가게 된 로키산 국립공원 주말여행. 우리는 잠들기 30분 전 짐을 싼 후 새벽 3시 20분에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일까요? 부적절한 복장을 갖춘 우리는 추운 날씨에 호되게 당했습니다. 오랜만에 겨울 산행을 하다 보니 고도가 높은 곳이 더 춥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어버렸나 봅니다.
덴버 공항 밖을 나설 때만 해도 “이 정도면 할 만하겠어.”라는 말이 나왔었지만 두 시간 정도 차를 타고 산 중턱에 내린 순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차림새를 보고 큰 착각을 하고 있었단 걸 단박에 알아버렸죠. 눈에 빠질까 설피 하며 스키, 아이젠 등 엄청난 장비들로 중무장을 한 사람들 사이, 옷 몇 겹을 겹쳐 입은 우리가 서 있었습니다.
원래 베어레이크 트레일과 에메랄드 레이크 트레일을 계획했지만 매서운 바람과 싸워 이기지 못하고 15분 만에 차로 돌아왔습니다. 무엇보다 견딜 수 없이 손이 시려 어쩔 줄 몰랐어요. 태백산 일출 등반 이후, 손이 얼어 터지겠다는 생각을 참 오랜만에 했습니다.
영하 12도에 바람까지 거쎄, 밖에 있는 시간보다 차로 뷰 포인트 사이를 이동하는 시간이 더 길었지만 나는 오랜만에 보는 ‘자연 속 산‘이 너무 반갑고 벅찼습니다.
내가 사는 텍사스는 드넓은 평지입니다. 한국에선 어디서든 늘 마주할 수 있는 산이 텍사스에서는 보기조차 힘들기에 산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커갔었지요. 그러던 차에 만난 로키산 풍경은 단단히 땅에 발을 디디고 하늘을 향해 뻗은 모양새를 그곳에 온 모든 이에게 뽐내며 웅장하고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산을 보니 집에 온 것 같았습니다.
이른 어스름이 내릴 무렵, 국립공원을 빠져나온 우리는 코스트코로 향했습니다. 장갑과 기모 레깅스 등의 방한용품을 사서 부실한 복장을 정비하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다음날 따뜻한 장갑과 레깅스를 보강해서 다시 찾은 로키산은 온화한 날씨로 우리를 맞아주었어요. 에메랄드 레이크 트레일을 밟으며 가슴 가득 들어오는 신선하고 차가운 공기가 남편 보고 따라온 미국생활의 답답함을 뻥 뚫어주는 것 같았어요.
미적지근한 날씨의 텍사스에서는 겨울을 느낄 수 없는 탓에 진짜 겨울을 찾아 3주 만에 다시 로키산을 향했습니다. 비교적 짧은 비행으로 갈 수 있는 곳이니까요.(2시간 30분 소요). 이번에는 Mill’s lake 트레일을 선택했고 우리 둘은 산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로키산은 해발고도가 3,000미터 넘는 봉우리들이 180여 개 있습니다. 높은 봉을 오르고 싶었지만 쌓여있는 눈 때문에 겨울에는 등반이 금지된 듯 보였어요. 힝구와 나는 평탄한 레이크 트레일을 걸으며 우리 주위를 둘러싼 고봉들의 장엄함에 감탄을 했습니다.
이번에도 등산화만 덜렁 신고 와서 눈길을 걷는데 미끄러질까 조금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아이젠을 사러 또다시 코스트코에 들렀지만 어째서인지 다 팔리고 없더군요.
눈이 많이 쌓인 겨울산에서는 아이젠과 슈페츠가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아이젠은 눈과 신발 사이 마찰을 높여주고, 슈페츠는 눈 더미에 빠져도 신발 속으로 눈이 들어가지 않게 막아주니깐요. 안타깝게도 나의 장비는 모두 한국에 있는 터라 나는 튼튼한 두 다리를 믿고 힘차게 눈길을 걸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다닌 길은 눈이 다져져 단단한데, 그 길을 살짝 벗어나기만 해도 발이 눈에 쑥쑥 빠져 눈밭에 빠진 힝구는 축축한 발로 산을 타야만 했습니다.
구름이 꼈지만 칼바람은 없는 부드러운 날씨에 눈이 오니 산은 더 멋있어졌지요.
“등산하기 참 좋은 날씨네요(Beautiful day to hike).”
마주 오던 아저씨가 인사 겸 건네는 소리에 우리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길을 따라 열심히 발을 옮기던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많던 발자국들이 사라져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앞서가는 커플도, 우리를 뒤따라오던 가족도 우왕좌왕하던 끝에 일행들은 각자의 갈림길에서 신중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어린 커플은 없는 길을 새롭게 만들어가며 앞으로 나아갔고, 우리와 가족들은 다시 제대로 된 길을 찾기 위해 왔던 길을 되돌아갔습니다. 가족 중 큰딸이 갈림길에서 밀스 호수의 방향을 찾아냈고, 그 덕에 우리는 단단히 언 호수 얼음 위에서 스케이팅을 하며 멋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었지요. 가족과 우리는 서로의 인생샷을 찍어주었고 30분쯤 후 커플들도 되돌아왔는지 호수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힝구는 우리가 놓쳤던 헷갈리는 갈림길에서 사람들이 길을 찾기 쉽도록 눈 위에 화살표를 그려 이정표를 만들었습니다.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사람들이 길을 물어보자 갈림길에서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라고 알려주었죠.
“정말 눈 위에 화살표를 그렸다구요(You actually drew an arrow on the snow)?” 한 아줌마가 웃으며 물었습니다. 눈이 계속 내리고 있어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이정표를 눈 위에 그린 힝구가 웃겼나 봅니다.ㅋㅋ
함박눈을 맞으며 하산하는 길은 겨울의 낭만이 가득했습니다.
“눈에 눈이 들어와서 눈물이 흐르니, 그게 눈물이야? 눈물이야?” 힝구는 내 언어유희에 탄복합니다.
“자기는 정말 시적이다.”
눈 드립은 사실 초등학교 때 교과서에서 나온 동음이의어 예문이었는데 말이죠.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힝구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눈에 눈이 들어가도 눈물을 흘리지 않은 채 시적인 사람이 되어 낭만을 품고 조용히 산을 내려오기만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