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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진 Aug 27. 2023

드디어 외할머니를 다시 만나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날아온 외손녀

5월 1일. 기다리던 미국 영주권 승인 알람이 울렸다. 드디어.


작년 10월 17일 미국에 입국했고, 6개월이 흘렀다. 반년이 흐르는 시간 동안 일을 하지 않았다. 먹고 놀았다. 팔자가 좋은 아줌마였다. 돈은 남편이 벌어다 주고, 겨울 날씨는 온화했고, 키울 애기도 없었다. 책을 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게으른 나는 나 자신에게 그런 생산적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다. 책을 좀 읽고, 그림을 그렸다. 글도 조금은 썼다. 한국을 많이 그리워했다. 엄마, 아빠, 동생들이 많이 보고 싶었고, 무엇보다도 우리 외할머니가 많이 그리웠다. 내가 떠나가 있는 동안 외할머니는 요양원에 모셔졌다. 백수생활에 익숙해졌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하루를 바라보는 일도 익숙해졌다.


그런 하루하루가 지나가다, 드디어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그 말인 즉, 내가 드디어 한국에 갈 수 있다는 거다. 남들은 미국에 살고 싶어 영주권을 기다리는데, 나는 미국을 뜨고 싶어 영주권을 기다렸다. 영주권 카드를 받은 그날 나는 바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리움이 나를 가득 채웠기 때문이다. 엄마도, 아빠도, 동생들도, 친구들도, 집도, 음식도, 인천공항도,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 적혀있는 한국어 간판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보고 싶었던 건 나의 외할머니였다.


힝구(남편)는 고맙게도 휴가를 내어 나와 동행해 주었다. 비행기가 인천에 내리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어 출국장으로 뛰어갔다. 나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고국이라는 땅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제 나는 안다. 외국에 6개월간 살면서 나는 애국자가 되어버렸다.


먼저 동생들이 있는 대전에 도착해 청국장과 치킨, 떡볶이를 먹으며 그리웠던 한국 음식에 대한 허기를 채웠다. 대전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바로 외할머니에게로 향했다. 안동에 위치한 한 요양원. 수빤이가 면회 일정을 잡아주었고, 우리는 그에 맞춰 할머니에게 드릴 생크림 빵과 김밥을 사서 할머니를 찾았다.


코로나가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요양원에서는 여전히 코로나 검사를 한 후 소수의 인원만이 정해진 공간에서 면회를 할 수 있었다. 바이러스에 취약한 노인들만 있는 곳이기에 아직까지도 코로나가 한창이었을 때처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콧구멍을 쑤시니 눈물이 핑 돌았다. 힝구와 나는 요양원 일층의 면회실에 앉았다. 식당 옆에 플라스틱 커튼으로 가림막이 쳐진 곳이었다. 창밖은 봄 햇살이 내리쬐며 초록빛으로 밝게 빛나는데 면회실은 형광등만이 공간을 비추어 어딘가 모르게 서늘한 느낌이었다. 잠시 후, 갈색 문이 열리고 할머니 얼굴이 보였다. 파마기 없는 짧은 하얀 머리에 속이 들여다보이는 시스루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나의 할머니가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 얼굴에 두 손을 가져다 대며 할머니를 크게 불렀다.

“아이고, 내 손녀 왔는가?”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아이고를 붙이며,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할머니의 아이고가 좋다.

“할머니 내가 누구고?”

“누구긴 누구야. 은진이지. 김서방도 왔는가?”


그럴 줄 알고 있었지만 당연히 할머니는 나를 알아보았다. 한 번 밖에 보지 못한 내 남편도 우리 똑똑한 할머니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으로 되었다. 마음 저 깊은 곳 한구석엔 혹시 할머니가 나를 못 알아보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할머니는 나의 기우를 깨끗하게 씻어주셨다. 내가 한국 땅에 없었던 지난 6개월 동안 할머니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몇 번을 넘어졌고, 본인이 스스로 살 수 있다고 하던 집으로부터 격리되어 시설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모두 전화로 알게 된 할머니의 소식이었고, 그 최종 결과를 그제야 마주했다. 얼굴을 맞대고, 손으로 만져 볼 수 있는 나의 할머니는 많이 여위었다. 살집 좋던 몸은 온데간데없고 뼈에 얇은 피부가 얹혀있었다.


“할머니, 저 미국에서 왔잖아요.”

“맞지, 우리 손녀가 미국에서 왔지. 요즘엔 손님이 많이 온다. 어제는 윤 대통령이 온다고 해서 내가 음식도 많이 해놨어. 외국에서도 손님들이 많이 온다고 하고 해야 할게 많다.”

할머니의 대답을 듣고 나는 슬픔과 안도가 함께 느껴졌다. 우리 할머니가 정신이 없구나 싶었고, 없는 정신임에도 다행히 우울한 공상에 빠진 것이 아니라 대통령을 영접하는 명예로운 일을 하고 있다 상상하고 계시니 말이다. 원래 정치에 관심이 많던 우리 할머니는 뉴스와 시사 토론을 즐겨보셨다. 오죽하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나간 100분 토론 패널에 있던 나를 할머니가 직접 발견하고 “우리 은진이가 TV에 나왔네?” 하며 엄마에게 직접 전화하기도 했었다. 그랬던 할머니는 이제 TV에 나오는 인물들이 자신과 같은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뉴스를 틀면 나오는 대통령도 자신과 함께 있다고 생각하신다.


한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중에, 요양원 원장님이 면회실에 들어왔다. 큰 키에 하얀 정장 마이를 입고 파마한 긴 꽁지머리를 목 뒤로 내린 얼굴이 검은 그 아저씨는 밤무대에 서는 트로트 가수 같이 보였다. 할머니는 그런 원장님을 아는 채 하면서, 먹을 것을 권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베푸는 사람이었다. 먹을 게 앞에 있으면 할머니는 누구에게든지 나눠주곤 했다. 정신이 없어도, 현실과 상상을 혼동해도, 내 할머니는 옛날과 다름없는 내 할머니였다.


나는 그저 할머니가 나를 보고 있는 짧은 동안만이라도 즐겁고 기뻤으면 했다. 그런 내가 할머니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할머니는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가, 또 이곳이 집인 것 마냥 갈색 문 넘어 외갓집의 중간 방으로 가자하셨다. 할머니의 시간과 공간은 뒤섞여 있었다. 그녀의 눈은 초롱초롱하다가도 때론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이제 면회시간 끝나서 생활실로 가보셔야 돼요. 정리해 주세요.”

“할머니 이제 가야 된데. 건강하게 잘 있으세요. 또 올게.”


30분의 면회 시간이 끝나자 간호사 선생님은 가차 없이 할머니를 우리로부터 때어놓았다. 할머니는 간호사가 운전하는 휠체어에 태워진 채 그대로 멀어져 갔다. 엘리베이터에 탄 할머니에게 연신 손을 흔들며, “할머니 다음에 또 올게요.”를 외쳤다. 할머니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약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한 채 “우리 아 한테 돼지고기를 삶아서 먹여야 되는데.”라는 말을 남겼다. 할머니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나에게도 해주고 싶으셨나 보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는 그대로 엉엉 울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서러움이 몰려왔다. 힝구는 그런 나의 어깨를 감싸며 토닥토닥 다독여 줬다.


할머니 면회 후, 집으로 향한 나는 보고 싶었던 엄마, 아빠를 만났다. 힝구가 함께 갈 거란 걸 미리 이야기하지 않아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아빠는 나보다 오히려 사위를 더 반가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힝구를 홀로 미국으로 돌려보낸 뒤, 나는 다시 외갓집을 찾았다. 외할아버지 제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두 분이 없는 외갓집에 삼촌, 숙모들이 다 모였다. 우리 집만 손녀들까지 다 참석했다. 할머니가 없었지만 가족들이 그득한 외갓집에서 밥 해 먹고 설거지를 하고 동생들과 누워 함께 잠자니 옛날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큰 외숙모는 외할머니의 음식솜씨를 지녔다. 할머니의 손맛은 딸에게로 전해지지 않고 큰 며느리에게 전수되었다. 그런 숙모의 음식을 먹고 3일을 지내자니 할머니는 여러 군데 자신의 유산을 남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일 수 있는 집을 숙모에게는 음식솜씨를 우리 모두에게 정성 어린 사랑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는 걸 말이다. 풀벌레 소리 들리는 소란스러운 밤. 엄마, 아빠, 삼촌들과 숙모들은 부엌에서 술을 마시며 옛 세월을 서로 나누었고 나는 그 소리를 자장가 삼아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할머니의 손맛을 숙모의 음식에서 느끼며 외갓집에 머무는 동안 두 번 더 할머니를 찾아뵈었다. 할머니의 모습은 더 호전되거나 더 악화됨 없이 힝구와 함께 본 외할머니의 모습 그대로였다. 가족들이 왔는데도, 우리 이야기보다는 딴 소리를 하는 할머니가 조금은 멀게 느껴졌다. 이제는 달라진 할머니를 이해해야 하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 나는 더 옹졸해진다. 괜스레 서운하기까지 했다.


2주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텍사스로 돌아왔다. 할머니를 눈으로 보고 난 후 안도감을 느낀 지 오래 지 않아 마음 저쪽에 파묻혀 있던 죄책감이 얼굴을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할머니가 나름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았기 때문에 한시름 놓았지만 실상 할머니 마음이 어떤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자신의 마음을 모를 것 같다는 핑계를 대며, 집에 가고 싶단 할머니의 말을 못 들은 척 무시했다. 아무도 그녀를 집에서 돌볼 수 없다고, 아니 돌보지 않는다고 이야기해도 고집을 부리고 혼자 당신의 집에서 자유롭게 살겠다 할 그녀의 의지를 못 본 척했다. 미래의 내 모습이 될 수 있는 오늘의 할머니에게 이 선택이 최선이라는 정해진 답안지를 내밀고 비겁하게 물러서 있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그러나 내가 이런 생각만 한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 있으랴. 나는 다시 마음을 고쳐먹는다. 할머니가 온전히 자신을 위한 판단을 하지 못한다면 보호자된 자식들이 대신 옳은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다고. 영주권이 나오기 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면, 다시는 할머니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었는데, 내 영주권은 6개월 만에 나에게 도달했고 할머니는 강인하게 나를 기다려주셨다. 이 모든 게 감사할 일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마음만 고쳐먹으면 되는 알량한 마음 수련 덕분에 나는 무거운 죄책감을 이기고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할머니 사랑해요. 내가 또 욕심을 부렸죠? 할머니가 계시기만 하면 저는 좋아요. 할머니가 나를 기억하고, 내 손을 잡고, 나를 예쁘다고 해줘서 너무 좋아요. 할머니 사랑해요. 우리를 잊지 말아요. 행복한 기억만 해주세요. 결국 삶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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