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나던 때의 외갓집은 지금은 임하댐에 잠겨 있다. 내가 5살이 되던 해 까지 엄마의 친정은 지금은 물속에 잠긴 골부리(다슬기의 안동 사투리) 집이었다. 골부리집은 외갓집 식구들이 집에 지어준 애칭이다. 아마 근처 개울에서 골부리가 많이 잡혀 그랬나 보다. 댐을 지으며 옛 외갓집은 물속에 가라앉았고, 지금의 외갓집은 이주해 온 마을 사람들이 함께 만든 산비탈에 위치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 외갓집은 상단지, 하단지로 나누어진 네모반듯한 마을의 상단지 가장 높은 왼쪽 모퉁이에서 한 칸 아래에 있다. 파란색 신식 기와가 쌓여있고 초록색 대문이 있는 정다운 곳이다. 외갓집 옆으로는 깎아낸 산비탈이 위치하고 있어 한번은 실제로 산사태가 나 돌이 굴러 떨어져 경사를 완만하게 하는 공사가 이루어진 적도 있었다.
어릴 적 바라본 임동은 비탈이 가파르고, 아주 큰 동네였다. 젊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아이들과 함께 살고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꽤나 있었다. 슈퍼를 가거나 문방구를 갈 때, 아이들이 늘 보였고, 방학 중에도 학교 운동장에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있어 낯선 얼굴인 나와 수빤이를 보고 약간 경계심을 보이는 게 느껴졌다. 어른이 된 후 외갓집과 외갓집 마을은 영화의 세트장 같이 좁고 자그맣다. 더 이상 길에 사람도 다니지 않는다. 아이들은 물론 중장년층 모두 임동을 빠져나가 안동 시내로 이사했다. 임동중학교는 폐교가 된 지 오래, 임동 초등학교는 분교가 되었다. 그렇게 넓고 가파르게 느껴지던 외갓집의 경사로는 이곳에서 어떻게 눈썰매를 탔었나 할 정도로 좁고 완만하다. 어른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슈퍼에 가서 뭔가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그 길이 얼마나 멀게 느껴졌는지 모험을 하는 느낌이었는데, 이젠 5분 만에도 다녀올 수 있을 정도로 시공간이 단축되었다. 어린이들이 인지하는 세상은 어른의 것과 너무나도 다르다.
노인 둘이 사는 집에 아이 둘이 함께 살며 보내는 한 달 반 동안은 집에 활기가 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안에는 매년 여름, 겨울 방학 동안 외갓집에 보내졌다. 엄마는 우리의 자율성을 높이고 자연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게 하기 위해 외갓집에 보낸다고 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적적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생기를 주려는 목적과 동시에 어린이들의 육아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외갓집에 가는 대부분은 아빠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지만, 가끔은 엄마와 함께 북영천역에서 무궁화 호를 타고 안동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갔다. 엄마는 기차여행을 할 때마다 구운 계란과 켄터키 후랑크 소시지, 바나나우유를 사주었는데, 평소에 자주 먹을 수 없는 간식을 기차를 타는 순간만큼은 꼭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기차를 타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2학년인 수빤이(첫째 동생)와 나를 열차에 태워 안동역에서 기다리는 할머니에게 보냈다. 우리 둘만 기차에 태워서 말이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그때는 아이들 둘이 그렇게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것이 큰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그 누구보다도 똑 부러지는 어린이였다. 초등학교 4학년 치고 덩치도 컸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 옷가게를 하는 엄마가 물건을 하러 동대문까지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밤새 도매상점을 헤매고 다닐 때도, 그런 그녀를 돕겠다고 따라나서기까지 했던 책임감을 가진 어린이였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아직 어린 나를 큰 아이로 대접해 줬는지도 모른다. 나는 엄마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기차에 타 있는 내내 수빤이의 손을 꼭 잡았다. 계란과 켄터키 후랑크 소시지를 까먹으며 우리는 ‘이번 역은 안동역입니다.’라는 방송을 기다렸다. 한 시간 반쯤 지나 도착하는 안동역에 가면 나의 할머니가 나와 계신다.
“아이고, 우리 손녀들 왔는가.”
할머니의 푸근한 품에 안기면 작은 가슴에 있었던 긴장도 한꺼번에 녹아내린다. 그렇게 할머니의 손을 잡고 지금은 다니지 않는 33번 버스를 타고 임동으로 향했다. 마을로 들어가는 버스는 언제나 북적여서 수빤이와 나는 한 의자에 엉덩이를 포개 앉았다. 상단지와 하단지 사이에 위치한 버스 정류장에 내려서 외갓집까지 올라가려면 한참이었다. 물론 지금이면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지만 그때는 그 길이 참 멀었다. 숙제거리가 빵빵한 책가방을 짊어지고, 한 손에는 할머니 손, 한 손에는 수빤이 손을 잡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던 오르막길의 햇볕은 눈이 부시게 쨍쨍했다.
할아버지는 새벽 5시 반이면 동네 친구분과 산책 겸 운동을 나가곤 하셨는데, 그 길에 나와 수빤이를 항상 동반하셨다. 그때는 지금 보다 아침잠이 더 없었던지 할아버지가 운동 가자고 하시면 벌떡 일어나 신발을 신었다. 산골의 여름 아침은 쌀쌀했다. 두 살 어린 수빤이는 비몽사몽이다가 몇 걸음을 땐 후에 비로써 정신을 차린다.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버스정류장까지 내려가면 할아버지 친구분께서 기다리고 계셨다. 우리는 정중하게 배꼽인사를 한다. 그러면 할아버지 친구는 ‘아이고 손녀들이 아주 부지런하네.’ 칭찬하신다. 할아버지와의 아침 운동은 한 시간 반 정도의 산책이다. 산으로 난 찻길 옆 갓길을 따라 해가 뜨기 전까지 아직 선선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할아버지 뒤를 따라간다. 갓 길옆에 핀 달맞이꽃 향기가 달근하고, 숲에서 내려오는 싱그러운 향이 폐를 가득 채운다. 어느덧 얼음골에 도착하면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하다 못해 차가운 바람을 맞는데 어떻게 여기서만 차가운 바람이 나오나 싶다. 어스름 동이 터오는 아침, ‘어디까지 가는 거지? 다리 아프다.’ 할아버지가 실망할까 차마 입 밖으로 말은 못 하고, 생각만 할 무렵이면 “자 이제 돌아가자.”하신다. 다행이다 싶다가도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게 멀게만 느껴진다. 외갓집에 도착하면 어느덧 더운 햇빛이 지붕 위를 비춘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목청을 돋우어 할머니를 부른다. 오늘도 운동을 하고 왔다는 사실이 마냥 자랑스럽기만 한 어린이였다. 할머니는 “어서 밥 먹자 우리 강아지들.”하시면서 아침부터 푸짐한 한상을 차려내셨다. 새벽부터 설쳐서인지 아침에 먹는 밥이 꿀맛이다. 여름이면 항상 그렇게 아침을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아침 운동 하는 것이 몸에 버거워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텍사스는 이미 여름이다. 봄도 없이 바로 여름이 되니, 시간이 속절없이 더 빨리만 흐르는 것 같다. 잡을 수 없는 시간을 다시 돌이켜보고 글로 쓰니 그래도 활자에 그때의 시간이 묻어나는 것 같아 위안이 된다. 글을 쓰며 회상하니 어린 시절의 여름 방학이 더욱 그립다.
5월이 된 첫 번째 날. 인스타그램의 피드에 엄마의 글이 올라왔다. 엄마 혼자서 할아버지산소에 다녀왔다고 적혀있었다.
[어버이날 앞두고 아버지 생각. 혼자서 찾아뵙고 그리움 한 움큼 삼키며 이런저런 넋두리에 아픈 엄마를 부탁했네.]
세월은 흘러, 나는 어느덧 서른여섯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하늘나라로, 할머니는 요양원에 가셨다. 초등학교 시절의 그리운 나의 외갓집은 아무도 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집도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없어도. 두 분의 손때가 담긴 나의 외갓집에 얼른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