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한국, 여름 휴가
8월, 한국에 다녀왔다.
여름휴가로 엄마, 아빠와 마우이를 갈 계획이었다. 나와 힝구가 엄빠를 픽업하러 한국에 도착한 그날, 마우이에선 엄청난 산불이 났다. 가장 오래된 마을이 불타 없어져 버리고, 사람들은 살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하와이 당국은 마우이 여행자제 요청을 했고, 우리는 여행 이틀 전 모든 예약을 취소했다.
하와이로의 여행이 취소되어 발 빠른 힝구가 유럽으로 행선지를 돌리려 했으나, 잼버리가 끝나고 한국을 뜨는 외국인이 많아지면서 당일 항공편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우리는 꼼짝없이 한국에 머물러야 했다.
엄빠와 처음으로 해외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는 가 했지만 우리의 행선지는 지난 34년간 그랬던 것처럼 외갓집으로 정해졌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좋았다. 외갓집으로의 여행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추억여행이기 때문이다. 즐거웠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곳에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처럼 행복한 일이 또 있을까? 물론 열흘 간 장인, 장모와 모든 시간을 함께 했던 힝구에겐 커다란 도전과 인내의 시간이었을 테지만 말이다.
큰외숙모와, 조카 도윤이까지 합세한 이번 여행은 대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생들과 그들의 남친들까지 동원된 대식구가 모여 대전의 명소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닌 후 엄빠와 우리 부부, 숙모와 도윤이는 외갓집이 있는 안동으로 향했다. 외갓집에서는 외할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은 숙모가 맛있는 음식을 계속해서 만들어낸 덕분에 먹기 싫은데도 먹어야 하는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계속되는 진수성찬에 질린 힝구는 햄버거를 찾기 까지 했다.
이번 여행의 재롱꾼은 초1 도윤이였다. 집에 어린이 하나가 있으니 온 집안이 그 애 에게 집중 됐다. 설치고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지만 도윤이 덕분에 청송의 계곡에서 시원하게 수영을 하며 제대로 된 피서를 할 수 있었다. 요양원에 나의 사랑 할머니를 찾아갔을 때도 도윤이는 감초처럼 할머니 앞에서 춤과 노래를 선보였다.
숙모와 도윤이가 서울로 떠나고 우리 부부와 엄빠는 부산으로 향했다. 친구들에게 마우이에 있는 특급 리조트를 간다고 자랑한 엄마를 실망시킬 수 없었기에 힝구는 아난티 힐튼을 2박 예약했다. 다이아몬드 멤버인 힝구 덕분에 제대로 된 호캉스를 할 수 있었다. 사우나를 하고, 수영을 하고, 책을 읽었다. 숙모의 진수성찬에 이어 계속해서 호텔의 뷔페를 아침, 저녁으로 먹었다. 비싼 호텔값에 본전 생각이 났기 때문에 조금만 먹을 수가 없었다. 먹기 지옥훈련 같은 천국 이었다.
호캉스 종료 후 우리 모두는 함께 대전으로 올라왔다. 힝구와 나는 다음날 서울로 가 출국을 해야 했고, 엄빠는 계획했던 열흘을 다 채우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이래저래 사연 많은 휴가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집이 집 같지 않았다. 지난 열흘간 너무 자주, 너무 많이 잠자리를 바꿨기 때문일 거다.
호텔인 것 마냥 낯선 집에서 밤잠을 설치다 가지 못한 마우이를 검색해 본다. 사망자 백여 명에 실종자 천여 명이라는 믿을 수 없는 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지상낙원이라 불리는 곳에서 일어난 재해가 유독 슬프고 안타까웠다. 이틀 빨리 그곳에 갔다면 불타기 전의 마우이를 볼 수 있었을 테고, 그와 더불어 한줌의 재가 될 수도 있었을 거다. 나에게 다행인 세계의 불행에 깊은 애도의 마음을 전하며 계획 하나 없이 치러진 여름휴가에서 나는 다시 오늘의 삶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