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휴스턴
힝구의 샌프란시스코 발령일이 정해졌다.
그렇다. 우린 이 지긋지긋한 텍사스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정해진 발령일 때문에 이삿짐 정리로 바쁘다. 조촐한 신혼살림이지만 쓸 만한 물건들을 두 차에 나눠 싣기 위해 나는 최대한 부피를 줄여가며 초딩 시절 연마한 테트리스 실력을 발휘했다. 앞으로 입을 옷 몇 개만 남겨두고 가을, 겨울옷들도 모두 상자 속에 넣어두었다.
덥고 습하고, 아는 이 없는 삭막한 텍사스를 막상 떠나려니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야 텍사스 정서와 날씨에 적응했는데 말이다.
텍사스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을 두 개 꼽자면, 힝구와 예술이다. 문화의 불모지처럼 보이는 휴스턴에는 예상 밖으로 하이엔드 미술품과 공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것도 무료로. 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는 야외 공연장에서 여름밤 클래식 공연을 한다. 휴스턴 미술관은 고대 이집트 미술품부터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서양의 오래된 현대회화 작품까지 다양한 컬렉션을 갖추고 있고, 목요일마다 무료로 개방된다. 초현실주의 작품이 주로 전시되어 있는 메닐 컬렉션은 늘 무료로 입장 가능하다.
나는 특히 메닐 컬렉션을 좋아하는데,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한 캠퍼스와 공원이 주변과 어우러져 커뮤니티 친화적인 모습을 띄는 데다 르네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 후안 밀로의 작품들이 벽을 가득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던 거장들의 작품 앞에서 그들이 캔버스와 물감을 통해 전해주는 영감을 희미하게 부여잡는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란 생각에 나는 내가 좋아하는 미로와 마그리트의 그림 앞에 오래 서있었다. 그림을 몸으로 흡수하고 싶었다. 그런 내게 미술관의 나이 지긋한 안내 아저씨가 다가왔다.
“나 당신을 기억해요. 한국인이죠? 한국 사람들은 참 예뻐요.”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저도 아저씨 알아요. 어느 나라 사람이세요?”
“저는 필리핀 사람이요. 레이라고 해요.”
“진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저씨의 인사가 반가웠다. 미술관을 올 때마다 몇 번 눈을 마주쳤는데 그런 그와 이렇게 말을 하게 될 줄 몰랐다.
“사실, 오늘이 이곳에 오는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저 이사 가거든요.”
“오? 그래요? 아쉽네요. 어디로 가나요?”
“캘리포니아요.”
“그렇군요. 잘 가요. 행운이 늘 함께 하길.”
“감사합니다. 잘 지내세요.”
하루 수 백 명이 방문하는 미술관에서 아저씨가 나를 기억하니 괜스레 가슴이 뭉클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것이 아쉬웠다. 진작 아는 척했으면 아저씨에게 더 많이 인사할 기회가 있었을 텐데. 그가 빌어주는 행운의 인사는 인류애를 불러일으켰다.
종료 시간을 앞두고 아무도 없는 미술관 한 복판에 서서 거대한 그림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숨겨져 아무도 알지 못한 황금 사원을 혼자서 독점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커다란 캔버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에어팟이 내 귀안에만 불어넣는 음악이 더해지며 내가 있는 곳이 세상의 존재하는 유일한 공간인 것만 같았다.
메닐 컬렉션 덕분에 알게 된 Cy Tombly는 내 최애 화가가 되었다. 그림만 봐 왔고, 아직 그의 생애나 미술 사조를 조사하기 전이라 나는 내 마음대로 그를 상상해 본다. 아마 그는 장난꾸러기가 아닐까? 회화 작품이라면 심미성을 위해 조금이라도 노력해야 할 텐데 벽 하나를 다 차지하는 캔버스에 연필로 숫자 몇 개를 정신없이 적어놓고 한쪽 구석에 유화 물감을 꾸덕하게 발라 놓았다. 신기한 건 그런 그의 작품이 아름답다는 거다.
무제 5개 세트 작품은 더 웃기다. 집 외장재 페인트를 칠한 캔버스에 연필로 끄적인 게 전부다. 누군가의 집 외벽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은 기존의 회화를 벗어나 파격적이고 재치 있다. 로마에서 그린 9개의 초록 물결 세트는 금방이라도 출렁이며 화랑 넘쳐흐를 듯 회랑 전체를 가득 채운다. 단순한 색채들과 낙서의 조합들로 이런 감정과 울렁임을 만드는 작가가 천재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톰블리를 알게 되어 내 예술적 영혼은 한층 더 살찐다.
마지막 방문이 될 메닐 컬렉션에서 내가 추억하는 아름다운 휴스턴에 작별을 고한다. 모든 이들에게 예술혼을 채울 수 있는 공평한 기회를 주는 도시. 힝구와 내가 신혼을 보낸 이곳이 아마 그리울 거다.
안녕 휴스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