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를 출산하고 엄마가 한국에서 산후조리를 도와주러 한 달 동안 프랑스로 와서 있게 되었다. 우리는 밤낮으로 깨고 잠을 반복하는 신생아를 교대로 봐야 했는데 엄마가 새벽조였다. 엄마가 새벽조라도 수유는 내 담당이라 나도 새벽에는 어쩔 수 없이 일어나야 했다. 닭머리 조아리듯 비몽사몽간에 십여 분간 수유를 하고 곯아떨어지면 안아 재 우기는 엄마 담당이었다. 낮이 되면 우리는 교대로 한 시간씩 바람을 쐬러 나갔다. 집에서 사투를 벌이고 몸이며 정신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밖에서 홀로 마시는 커피는 마치 따뜻한 위로 같았다. 나도 옆에서 친구를 기다리는 어느 누군가처럼, 한가로이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젊은 남자처럼 그냥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이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얼굴을 보며 엄마는 내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 아들 보러 오는 니 얼굴이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같노." 라고 했다.
그랬다.
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엄마는 대번에 그것이 산후 우울증임을 알고 종이쪽지에 안 되는 영어를 섞어가며 우리 남편에게 자기가 한국으로 돌아가더라도 쟤를 꼭 한 시간씩 산책을 시켜줘라 묻고 또 당부했다고 했다.
그때 하필 한국에서 키우던 우리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내 파란만장했던 20대를 함께 해주던 우리 콩쥐.
집이 다 정리가 되고 다시 우리가 살만해졌을 때 마치 제 할 일을 다했다며 떠나는 강아지를 보며,
나는 하루 종일 우는 아기를 안고 같이 울었다. 너무 허무한 인생 아닌가.
3.1kg로 태어난 조그만 아기는 내게 너무 큰 부담이었다.
잠도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 소위 일상생활이란 게 없는 그 시간은 '그냥 힘들다'로 정의할 것이 아니었다. 남편은 우는 아기를 어쩌질 못해서 내게 맡기길 일쑤였고 나는 그게 더 부담으로 다가왔다. 내 산후우울증의 7할은 아마 남편의 몫일 거다. 엄마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 젖먹이를 혼자, 아무도 없이 혼자 봐야 할 것을 생각하니 실로 까막 득했다. 더욱이 첫째는 영아 산통이 엄청 심해서 매일 거의 안아 재우다시피 했는데 부엌 창문으로 바라보는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창살 없는 감옥이 갇힌 거 같았다.
[사진 출처] common_wild
더구나 우리 남편은 눈치 없이 이런 나를 데리고 시댁 투어를 잘도 돌아다녀서 어리숙한 나는 그저 따라다니기만 했다. 지금 같았으면 너 혼자나 가든지 아기 데리고 가든지 으름장을 놨겠지만.
시댁 어른들도 아기를 보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지 나의 산후 우울증 따위 신경도 없었다. (물론 내가 그분들에게 '내가 정상이 아니오' 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지금도 남편과 종종 싸움을 할 때면 왜 엄마가 부탁한 한 시간 산책도 넌 내게 권하지 않고 왜 힘든 나를 그냥 두었냐는 게 늘 반복되는 레퍼토리였다.
몹쓸 프랑스 짬뽕 같은 놈!
부엌으로 바라보는 떠오르는 해를 그렇게 오래 그리고 자주 본 적이 없다.
퍼런 구름 사이로 하늘을 빠알갛게 수를 놓는 그 아름다움은 실로 경이롭다. 10분 만에 금방 해가 떠오르지만 그동안은 시간이 멈춘 듯하다. 우는 아이와 일출을 마주하노라면 마음이 되려 고요해질 때가 있다.
앞동에도 새벽 4시에 불 켜진 집이 있다.
그 집도 필시 아기가 있는 집일 거다.
'저 집도 고생이 많구나.'
그런 집들을 보면 내가 위로받는 느낌이다.
홀로 이곳에 독박 육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그냥 평범한 아기를 키우는 한 일상일 뿐임을 알게 된다.
다행히도 둘째를 낳고서는 그런 산후우울증이 없었다. 첫째 때 찐하게 겪고 나니 둘째 때는 뇌가 해탈을 한 모양이다. 시간이 다 어째 어째 가더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1년을 살지 말고 하루를 넘기며 살듯이 그렇게 지나가면 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