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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Oct 09. 2020

독일 약대를 때려치고

아빠 덕분에 힘낼 수 있었어

마음 아린 기억이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간데도 나는 지금과 같은 결정을 했을 거다. 


독일에서 5년 넘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문득 이렇게 월급쟁이 생활만 하다가 퇴직할 때가 되면 차곡차곡 돈을 모으더라도 내 수중에 10억이 채 안 되는 돈 밖에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이리저리 계산법을 때려보아도 그저 고만 고만한 돈. 

열심히 젊음을 받쳐 일을 하는데 결국은 이 정도일 줄은 갗 직장생활을 시작한 나에게 가히 충격이었다. 


내가 대학 3학년 때 인문학 배워서 결국은 10에 7할이 공무원 준비를 하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의아해했다. 

내가 6개월 교환학생 이후 한창 독일병에 빠져있을 때다. 

인문대 대학 졸업장은 그저 허울뿐이고 모두 도서관에서 공무원 준비 시험 책을 들고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독일어과답게 독일어 시험 책을 들고 다녔지만. 현실 감각이 없었던 건지 인생 로망만 가득했던 건지 - 여하튼 나는 그랬다. 


모두가 영어권도 아닌 나라 가서 뭐하냐고 할 때도 나는 박박 우겨서 독일을 갔다. 

"왜?"

"그냥 독일어가 좋아."

그냥 너무 좋아서 했던 독일어는 내가 독일에서 어렵지 않게 직장을 찾는데 큰 공을 했고 나는 내 나이 25에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인 독립을 할 수 있었다. 그땐 언어가 내게 재산이었다. 




직장 생활 5년 차 내게 슬럼프가 찾아왔다. 알 수 없게 시작된 우울감은 내 삶의 리듬을 바꿔놓았다. 한 달 여 사이에 5킬로가 쑥 빠지고 나서야 나는 이렇게 계속되다간 내가 재가 되어 사라질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20대 초에는 빨리 돈을 벌고 싶었고 또 그래야만 했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은 독일어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번듯이 취직이 되어 승승장구하던 5년 차,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바다에 떠 있는 부표마냥 난 삶에 지표를 잃고 헤매고 있었다. 


그때 불현듯 든 생각은 '공부를 다시 해보자'였다. 

우연히 치과 박람회에서 독일어 통역으로 일을 하다가 해보자 한 것이 치대가 목표가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손기술도 나름 있다는 얘기도 들었고 몸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빨 하나만 잘 들여다보면 되는 일이니 서른 가까이 되어서 하는 공부인데 그 정도면 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의 우리 남편과 장거리 연애를 할 때였다. 


그러다가 치대는 낙방을 하고 제2 희망군이었던 약대에 합격을 했다. 

한국 가족들은 '니가 웬일이냐, 드디어 해냈구나.' 했지만 나는 그런 가족들의 반응이 되려 부담이 됐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잘하던 오빠 밑에서 성적이 고만고만하던 내가 약대를 갔다는 것은 가족들에게 큰 반향이었나 보다. 그렇게 얼떨결에 나는 뒤셀도르프 약대를 갔다. 


10여 년 만에 다시 마주한 생물, 화학 책이 내 책상 앞에 있었다. 

공부를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지만 난 이 과업이, 이 공부가 내가 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애초에 나의 계획은 치대였지 약대가 아니었다. 4년만 투자하면 약사가 되어 지긋지긋한 월급쟁이 생활 그만두고도 오롯이 돈도 잘 벌고 명망 있게 잘 살 수 있는 멋진 직업이지만 그건 내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한껏 부풀어 있던 한국에 가족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리자니 난 인생에 낙오자인 거만 같았다. 인생을 모질게도 그렇게 악바리로 못 산다는 얘길 들을 게 분명했다.

난 약대를 내 스스로 그만두게 되면 인생이 무너져 버릴 거 같았다.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그 우울감의 구렁텅이에서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거 같았다.


프랑크푸르트로 다시 돌아와서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대를 그만두겠다는 내 결정에 가장 실망을 했던 엄마와 오빠에게는 차마 이 사실을 바로 알릴 수가 없었다. 

아빠만 날 믿겠다고 해주면, 난 다시 인생을 잘 살아볼 수 있을 거 같아.
내게 힘을 주세요. 


울면서 전화를 했던 아빠에게서 아빠는 담당하게 아무 일 아니라고 했다. 

그러고선 괜찮다고 했다. 

"아빤 너를 믿어." 

전화 너머로 아빠도 우는 거 같다. 그래도 괜찮다. 난 다시 잘 살면 되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파리에서 다시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분명 나는 다른 길을 선택했다. 부모님이 독일 약대 버리고 선택한 코쟁이라고 한동안 많이 미워했던 그 코쟁이와 아이 둘을 낳았다. 

가족에게 큰 실망을 안겼었던 나였기에, 지금도 그 일을 회자하면 마음이 아린다. 

내가 인생을 모질게 못 사는 건가 아님 대충대충 사는 건가. 


하지만 하나는 분명하다. 

나는 지금 행복하다. 계산을 때려보아도 말년에 10억이 안 되는 돈이 수중에 남아 있을지언정 나는 지금 행복하다. 돈이 뭐 전부인가. 아빠의 그 한마디가 없었으면 나는 지금 어떻게 다시 인생을 꾸려서 살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겐 그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튼튼한 동아줄이 되었다. 내겐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들이 그리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코쟁이 아저씨가 있다. 


아빠는 알고 있을까. 

지금 그래도 내가 참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고마워요 아빠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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