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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담 조셉 May 16. 2021

파리를 벗어나고 싶다

시댁 식구가 함께 한 둘째 돌잔치

남편을 비롯한 우리 가족 4명 모두 5월 생이고 두 아들은 일주일 차이로 생일이 달라서 5월이면 시댁 식구들과 함께 시골 어느 한적한 곳에 집을 빌려 다 함께 생일 파티를 하곤 했다.

작년은 코로나가 창궐하여 출산을 갗 한 나로서 매년 하는 그 큰 행사를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신생아를 데리고 떠들썩하고 불편한 자리를 2박 3일 웃음 가면 장착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사태로 작년은 그래서 더욱이 시댁 식구를 만나는 일이 적었다. 나는 그게 되려 혼자 아기를 키우고 조용하니 더 편하고 좋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막상 다 같이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새삼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첫째 돌 생일잔치를 시댁 식구들과 함께 했을 때는,

나는 그저 "시"댁 잔치에 초대된 아이 돌봄이 서비스로 발탁된 보모나 다름없었다. 물론 남의 아이가 아닌 내 아이 돌보는 일이었지만 그때는 내가 산후우울증으로 온갖 세상 짜증과 번뇌를 다 달고 다닐 때라 모든 게 부정적이었다.

'시어머니는 왜 흔한 기저귀 한번 안 갈아주실까?'

'남편은 가족들 만나서 저리도 신이 날까?'


수영장에 편안히 누워서 햇살을 즐기는 시댁 식구들과 다르게 나는 아기가 잘 때 잠깐 테라스에 앉아 아기가 깰 때까지 기다리는 게 휴식의 다였다.

아기 의자가 없어 온 다리로 아기를 감싸서 이유식을 먹이고 수영을 마치고 똥산 기저귀를 세면대에서 혼자 낑낑 갈고 있을 때에도 시댁 식구들은 한마디라도 '거들어줄까?' 하는 일이 없었다. 하긴 뭐 아기 아빠라는 사람 조차 그랬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다.

그때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온갖 세상 욕은 다 끌어다 했던 기억이 난다. 창살 없는 감옥이라면 그랬을까.  조용히 하루만 혼자 있었으면 했다.

아직도 회자하고 있는 그때 사건에 이미 3년 전 일인데도 이번 둘째 돌을 또 에어비엔비를 빌려서 함께 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벌렁거렸다.


근데 무슨 깡다구가 생겼는지, 남편의 제안에 선뜻 그러자고 했다. 재택근무 덕분에 남편이 아기를 봐주는 일이 늘기도 했고 뭐 더 피곤해봐야 죽기야 하겠냐며 2박 3일 동안 그냥 잠을 못 자는구나 그냥 생각하자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좀 심한 불면증이라 자는 환경이 좀 달라지면 더 못 잘 때가 많다.)


파리에서 한 시간 10분 남짓 떨어진 곳인데 집이 모던하진 않아도 운치가 있었다. 옛날 목조 그대로 곳곳에 서까래가 뉘어진 모습이 기이하리 마치 특이하고 재미있었다. 그리고 주인이 센스가 있으신지 장식은 장식대로 딱 그 자리를 위해 마치 만들어진거처럼 딱  있어야 할 것들이 가지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색감 어린 작은 작은 탁자이며 무심히 놓인 화병조차 너무 멋들어져서 도대체 주인이 누군지 너무 궁금했다.


"엥? 사토시?"

그 큰 저택의 주인은 먼 나라 이웃나라 일본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짝 뒤에 놓여있는 아이들 사진은 까만 눈에 까만 머리를 하고 있는 일본 아이들이었다. 일본어로 적힌 종이접기 책, 마네키네코 등 작은 부분에 일본의 흔적을 볼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깡시골에 그 사람들은 여기 터를 잡았을까?

큰 대지 한가운데 잔디를 깎지 않아 무성히 난 풀 속에 바람이 불면 사각사각 풀소리가 나고 집에서 가장 잘 보이는 먼발치 큰 나무 아래 큰 벤치를 두고, 장작 넣어 불 피우는 자리 근처에 까만 피아노가 있다. 도란도란 가족들이 모여 창가에 앉아  마시는 커피 향기가 좋다. 휑하던 저택은 사람이 들어서니 금세 사람 냄새나는 따뜻한 공기로 바뀌었다.




사실 파리를 떠나고 싶지 않다.

우리 집은 IN 파리가 아니라 파리 외곽 지역이지만, 어찌 되었든 파리를 떠나면 그냥 안될 거 같았다. 무엇보다 난 한국 엄마이기 때문에 아이들 교육문제가 우선이고 그리고 난 김치도 꼬박꼬박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 한국 슈퍼의 접근성은 내게 화장품보다 중요한 거였다.

남편에게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내 항변이,

'난 여기 50년을 살았다 하더도 마음만은 늘 이방인이기 때문에 여느 프랑스 할머니처럼 깡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상상이 안가!'


근데 불과 2박 3일을 보낸 그 저택에서 사토시 씨 아이들의 장난 어린 그림을 보며 문득 'why not?'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골에서 아이들을 키우게 되면 한국에 대한 인연의 끈이랄까  문화를 배우는 노출 강도가 더 적어지겠지만 그야 어떠리 - 아이들에게는 자연 속에서 바람을 벗 삼아 놀고 물가에 개구리도 잡고 마치 내가 부산 바다를 바라보며 놀았듯, 그런 추억을 심어줄 수 있을 거 같다는 희망이 있다.

나야 뭐 깡시골에서 장독대 사다가 김치를 담아 먹으면 되는 일이다. 그리고 이 참에 허름한 붕붕이를 하나 사서 파리로 출퇴근하면 되고. 어차피 파리지엥들이야 원래 내가 안 좋아하니 더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여세를 몰아 매물 사이트도 찾아보니 방 5개 저택이 파리 15평 남짓 집값보다 싸다.


모든 것에 장단이 있다.

그리고 정말 파리를 떠날 용기가 있는지는 다시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아이들이 반은 한국인인데 시골에서 그냥 프랑스 아이로 자라는 것이 아직 잘 모르겠다.


복작복작 파리도 재미있긴 한데 코로나가 사람의 생각을 여러모로 바꾸긴 했다. 내가 이렇게 시골로 갈 생각을 마흔도 되기 전에 한걸 보면.

언제든 때가 되면 어느 방향으로든 결정 내릴 때가 자연스레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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