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예정대로 제주도에 가는 비행기를 타고 네가 예약한 차를 렌트해 내가 예약한 숙소까지 함께 갔더라면. 종종 그날로 되돌아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 상상이 그날을 다르게 기억할 수 있게 해줄 것처럼.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3월 초입 제주도의 아침은 제법 쌀쌀했다. 방금 잠에서 깬 너는 아직 비몽사몽한 얼굴로 눈을 반쯤만 뜬 채 약간 비틀거리며 걸었고, 나는 너의 뒤에서 그 모습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다 조그맣게 웃었다. 너는 공항 의자에 가방을 올려 놓고 비행기에 타기 전에 넣어 둔 얇은 외투를 꺼냈다. 그 후 나에게 돌아서 보라고 하더니 내 백팩에서도 외투를 꺼내주었다. 우리는 각자의 외투 지퍼를 여미며 공항 밖으로 나섰다. 택시가 늘어선 정류장 앞에서 너는 찬바람을 맞아 잠이 조금은 깬 듯한 얼굴로 휴대폰의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몇 번 손가락으로 지도를 넓혔다 좁히더니 이제 알겠다며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너는 지도를 보며 걷기보단 지도를 외운 뒤 걷는 사람이었다. 길을 눈에 익히면 꼭 이제 알겠다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너는 마치 몇 번이나 와 본 것처럼 초행길을 헤매지 않았고 당도한 곳엔 우리가 렌트한 차가 있었다. 나는 박수를 짝짝 두 번 쳤고 너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차문을 열어주었다.
공항을 나서며 너는 히터와 시트의 온도를 조금 높였다. 나는 온도를 조절하는 네 손을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져보지 않아도 네 손이 따뜻하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너는 손이 따뜻한 사람이니까. 나는 손이 찬 사람이고. 나는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라 좋았다. 날씨 좋다, 그러네 좋네. 그런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바다로 다가갔다. 너는 내게 노래를 틀어달라고 했고, 나는 블루투스를 연결해놓고 한참을 고심했다. 제주도에서 같이 듣는 첫 번째 노래였으니까. 바다에서 듣기 위해 모아놓은 플레이리스트에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틀었다. 너는 노래가 마음에 들었는지 리듬을 타듯 고개를 가볍게 움직이며 검지로 핸들을 톡톡 쳤다. 나는 그 노래에 하트를 눌러놓았다.
해변 근처에 차를 주차한 뒤 함께 내렸다. 해변에 가까워질수록 파도소리가 선명해졌다. 바닥이 투명하게 비치는 맑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우리는 말없이 모래사장을 걸었다. 걸음을 따라 사박사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닷바람이 불어와 공항에서보다 훨씬 더 추웠지만 우리는 바깥으로 내놓은 손을 주머니에 넣지 않았다. 멈춰 서서 눈으로는 파도가 부서지는 것을 보며 귀로는 파도소리를 들었다. 순간 우리가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듣는다는 생각에 윤슬 같이 반짝이는 기분을 느꼈다. 누군가 멀리서 사진을 찍는다면 우리가 마치 바닷가 풍경의 일부처럼 담길까. 네 손을 잡을까 하다가 드문드문 사람들이 있어 한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너는 바다 쪽으로 시선을 둔 채라 아마 네 손을 바라보기만 하는 나를 몰랐을 것이다. 나는 네가 모르는 순간들이 좋았다. 그게 꼭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순간들인 것 같아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오늘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믿고 싶어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