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내가 아닌 나를 원한다
이따금씩 우리는 내가 아닌 나를 원한다. 그것이 초월이다.
SNS에 자신의 보정된 사진과 보정된 일상을 올리는 것. 나의 일상이 아닌 일상사진들을 올리는 것은 초월의 욕구에서 출발한다. 또한 종교적 초월도 그러하다. 현세에 불완전한 나를 뛰어넘어 저세상의 나가 되려는 것. 완전무결한 나로 향하는 것은 초월의 욕구에서부터 출발한 것이다. 여행의 이유도 비슷하지 않을까. 새로운 환경으로 가서 기존의 나로부터 잠시 탈피하는 것. 이것도 분명 초월의 욕구이다.
개인의 욕구를 포기하고 집단이 되려하는 것 역시 초월이다. 세상이 너무 복잡하게 돌아가는 나머지 우리는 가끔 자신의 생각을 포기한다. 사회가 강요하는 규격에 맞추어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려 한다. 자신의 생각은 드러내지 않은채 그저 다수의 의견대로 흘러가며 사는 '대중'이 되는 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찾으려하고 그곳에서 소속감을 갖는 일. 집단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라 믿는일. 예를 들어 애국심, 지역, 회사 혹은 학교같은 것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일들이다.
심지어 아이를 갖길 원하는 것에서도 같다. 우리가 아이에서 출발하여 청소년기를 거쳐 성인이될 때. 아이에서부터 청소년기까지의 인간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내고 그것은 자신이 관찰함에 있어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이때 초월의 욕구는 만족되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정신적 성장기가 멈추고 인간의 몸이 늙어가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성장이 점점 멈추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성장할 수 없음을 느끼지만 지금의 나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나로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에서는 벗어날 수 없다. 이때부터 아기가 갖고 싶어지기 시작한다.
나의 유전자와 유사한 새로운 인간을 낳고 기르게 됨으로써 부모는 자신의 초월을 아기에게 투영한다. 아기가 하루가 다르게 자라나는 것을 보면서 잃어버린 초월적 만족감을 다시 얻게 되는 것이다. 성숙한 부모일 수록 아이와 자신이 다른 존재임를 인정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아이의 진로와 앞길을 미리 계획하여 제어하려드는것(ex.학원에 시달리는 아이들)처럼 부모가 아이의 성장에 대해 집착하기 시작하는 것도 이 이유에서일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절대로 완전한 초월자에 도달 할 수 없다. 따라서 비참한 현재를 견디기만 한다면 자신의 미래에 안정된 삶이 올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간으로써 잘 사는 법을 지향해야 한다. 이제는 비인간적인 삶(완벽하고 안정된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극단은 같다. 국력이 약하거나 강한 나라 모두 전쟁이 일어나며, 동물적이고 야만적인 삶과 초월적인 삶 둘다 인간의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써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자신의 결핍과 함께살아간다는 것이니 결국 자신의 상황을 사랑해야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