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는 일이 별로 없다. 개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정신적 여유는 충만하다.
그러나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
물리적 한계란 공간과 시간에 대한 것이다. 나는 이 대전에 있는 연구소의 사무실 안과 실험실에 있어야만 한다. 주말을 제외한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9시간동안.
퇴근 후와 주말에도 여전히 대전에 있다. 자가용이 없는 나는 집근처를 벗어나기가 꽤나 힘들다.
이상하다. 개인적 시간은 많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사무실에서는 책을 읽거나 공상을 하며 성과나 성적같은 것에 쫒기지 않는다. 약간의 취업걱정과 눈치를 제외하곤 나를 옥죄는 것이 없다.
이런 상황은 분명 여유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내가 가두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정신적 여유에도 불구하고 물리적 한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진짜 여유가 아니었나보다. 실습을 오기전, 나는 여유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래서인지 최근까지도 나의 고통을 의식하지 못한 채 어딘가 불편한 느낌만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정신은 어느 것에도 침해받지 않고 있음에도 이 물리적 공간과 시간의 제약만으로 썩어가고 있음을.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을 완전히 구분지을 수는 없다. 이것들은 결국 서로 얽혀있어서 한 쪽만 침해받아도 다른 쪽으로 전이 될 수 있다. 이 사실을 최근에야 느꼈던 것이다.
물리적 제약이 나의 정신적 여유를 침해하고 썩게한다.
생각해보면, 직장은 모두 그런 것 같다. 시공간의 제약이 있고 성과나 가치를 창출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이 인간의 고통을 유발하는 것은 필연적일까?
어쩔 수 없는 삶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참아야 할까?
그렇다기엔 이 고통은 꽤나 크다(나의 경우). 그리고 이 고통을 참아내야할 만큼 삶이 사랑스럽지도 않다.
고통을 받다보면 삶이 미워진다. 미워지면 사랑도 사라진다. 사람들은 가끔씩의 여행과 취기로 이 고통을 쏟아내는 듯 한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므로 고통으로부터 애당초 도망쳐야 한다.
그래서 생각해낸 단 하나의 돌파구는 존중할 만한 사업장에 들어가서 존중할 만한 사람들과 일하는 것이다(여기서 존중은 사랑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매일 노동의 8시간과 그곳의 공간이 일상으로 흡수될 수 있다.
work와 life로 구분됨이 아닌 work를 life의 일부로 집어넣을 수 있다면 나는 고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