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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국희 May 15. 2020

펜은 키보드보다 강하다

손 필기와 기억력, 사고력, 이해력, 문제해결력

나는 한국 월드컵이 있던 2002년, 대학에 입학한 후, 2003년 1월에 군대에 갔다가, 2005년 3월에 복학을 했다. 복학을 해서는 용돈을 충당하기 위해 학교 식당 설거지와 행정부서 업무보조 알바를 했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노트북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노트북 필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내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참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점점 노트북 필기가 왠지 나의 공부를 방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수님을 그대로 받아 적고 있는 내가  앵무새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왠지 약간 바보가 되어 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이건 느낌으로 끝나지 않았다. 중간고사 성적이 썩 좋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노트북 필기가 계속 마음에 걸렸다. 과학적인 이유는 없었다. 왠지 노트북으로 필기하는 것이 성적 하락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래 하던 손 필기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교수님의 이야기와 교수님의 칠판 판서를 다 따라가지는 못했지만, 나 만의 언어와 나만의 기호로 필기하면서 나는 뭔가 다시 공부에 탄력을 받았다. 손 필기를 하면서 머릿속으로 뭔가 정리된다는 느낌도 확연해졌다. 이것은 노트북 필기를 하면서 잊어버리고 있었던 느낌이었다. 그리고 기말고사에서 나는 놀라운 향상을 경험했다. 사실 필기를 하고, 필기한 것을 가지고 공부를 한 시간은 중간고사 때와 다르지 않았다. 필기 방식을 손 필기로 바꾸었고, 손 필기된 내용으로 복습을 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 차이가 성적의 차이를 만들었다.


지금 나는 인지심리학자 되었고, 이제는 노트북 필기가 왜 성적을 낮추었는지, 손 필기가 왜 다시 내 성적을 향상시켰는지 안다. 한 연구에서 연구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1]. 한 집단은 동일한 강의를 들으면서 노트북으로 필기하게 했고, 다른 집단은 손으로 필기하게 했다. 그리고 시험을 보았다. 시험 문제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하나는 단답형 주관식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서술형 주관식 문제였다. 시험결과는 나의 경험과 동일했다. 손 필기 집단이 노트북 집단보다 시험 성적이 좋았던 것이다! 단답형 주관식 문제와 서술형 주관식 문제에서는 손 필기 집단의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서술형 문제에서는 손 필기 집단이 월등히 우수했다. 학점으로 말하자면, 손 필기 집단은 A학점을 받았고(90점 이상), 노트북 필기 집단은 C를 받았다(70점 이상).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연구자들은 다양한 분석을 시도하였다. 먼저 필기량의 차이를 확인해보았다. 그랬더니, 노트북으로 필기한 사람들의 필기량이 월등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의 3배 차이였다. 만약 필기량이 필기의 질과 공부의 질을 결정했다면, 당연히 노트북으로 필기한 사람들의 성적이 좋았어야 할 것지만, 결과는 정 반대였기에 이것으로는 실험 결과를 설명할 수 없었다.


연구자들은 다른 요소로 눈을 돌렸다. 연구자들은 때마침 강의 녹취록을 확보할 수 있었는데, 이 녹취록과 필기 내용이 얼마나 유사한지 확인해보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강의 녹취록과 필기 내용 간의 표절 검사를 했다. 만약 녹취록과 필기 내용 간에 일치하는 부분이 많고, 유사도가 높다면, 이는 연구 참가자가 강사의 말을 앵무새처럼 똑같이 받아 적는데 바빴다는 의미다. 반대로 녹취록과 필기 내용 간의 유사도가 낮다면, 연구 참가자는 강의 말을 자신의 언어로 변환하려고 노력했다는 의미다. 결과는 명확했다. 손 필기한 사람들은 녹취록과의 유사도가 매우 낮았지만, 노트북으로 필기한 사람들은 녹취록과의 유사도가 매우 높게 나타난 것이다. 즉 노트북으로 필기한 사람들은 강사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친 반면, 손 필기를 한 사람들은 자신의 언어와 기호로 변환하여 필기하였다.


손 필기한 사람들은 강사의 말을 그대로 따라 적을 시간이 없었다. 대신 이들은 자신의 사전 지식과 강사와 말을 연결하고, 자신의 언어로 변환하는 생각하는 필기를 하였다. 반면 노트북으로 필기한 사람들은 마치 속기사가 된 것 같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리는 대로 받아 적었다.  그리고 손 필기하면서 생각하는 필기를 한 사람들은 단답형 주관식 문제에 필기한 정확한 기억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노트북 필기를 하면서 아무 생각 없었던 사람들은 정확한 기억력을 가지지 못했다. 심지어 손 필기를 하면서 생각하는 필기를 한 사람들은 서술형 문제에 필요한 이해력, 사고력, 문제해결력, 통찰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받아 적는데 바빴던 노트북 필기 집단은 이러한 중요한 인지능력을 향상 시키지 못했다. 이것이다. 바로 이 차이가 성적의 차이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책상에 앉아서 수업을 듣던 입장이 아니라,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예전보다 더 많은 수의 학생들이 키보드로 필기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과연 그들이 제대로 필기하고 있을까? 과연 생각하는 필기를 하고 있을까? 아닐 가능성이 높다. 구석기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뇌는 키보드를 알지 못한다. 동물 벽화를 그리고, 거북이 등껍질과 양피지에 글을 쓰고, 죽간과 종이에 글을 쓰던 우리 뇌는 키보드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일까? 손으로 필기할 때는 생각하는 필기 모드를 자동으로 발휘시켜 주는데, 키보드로 필기할 때는 생각 없이 필기하게 만든다. 키보드로 필기하면서 생각하면서 필기해야지 마음 먹어봐야 소용없다. 우리 뇌는 내 행동에 반응하지, 내가 마음 먹는 것에 반응하지 않는다.


키보드로 필기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건 당신의 기억력 향상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고. 최첨단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는 뇌는 여전히 구석기 시대의 뇌라고. 그래서


"펜은 여전히 키보드보다 강하다고!"


[1] Mueller, P. A., & Oppenheimer, D. M. (2014).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keyboard: Advantages of longhand over laptop note taking. Psychological Science, 25(6), 1159-1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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