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직접 손필기한 것만 내 뇌가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필기란 정보의 세부사항에 대한 단서를 남겨두는 활동을 의미한다. 타인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상황에서 타인이 전달하는 세부정보를 모두 다 기록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은 필기를 통해 세부사항에 대한 기억 단서들을 남겨놓고 나중에 기억을 되살리곤 한다. 필기가 이루어지는 상황과 정의에 이미 나타나 있지만, 필기는 내가 직접하는 행위이다. 필기의 주체는 '나' 자신이어야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필기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타인의 필기나 교과서 메모를 빌리는 사람들 말이다. 필기를 빌릴 때, 자신보다 못하는 사람의 필기를 빌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과 동등하거나, 자신보다 나은 사람의 필기를 빌린다. 그리고 필기를 빌리기 위해서는 커피 한 잔 사주거나, 밥을 한 번 사주거나, 립서비스 같은 아쉬운 소리를 하게 된다. 쿨하게 빌리는 것 같지만, '빌려달라는 의사표현'을 하는 것 자체는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아쉬운 소리해가며 필기를 빌린다고 해서 다 똑같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필기를 빌려보는 사람에는 최소한 두 부류가 있다.
한 부류는 자신이 열심히 필기했지만, 혹시 놓친 부분이 있을까 염려하는 사람들이다. 이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필기에서 내가 놓친 부분을 찾아 보완하여 완벽하게 만들고 싶은 심리가 작용한다. 자신의 이해와 타인의 이해를 비교해보면서 생각을 확장해 가고, 자신이 잘못 이해한 부분이 드러나면 생각을 수정하며, 타인의 필기를 통해 자신이 보완할 점을 찾으면서 진보를 이룬다. 심지어 타인의 필기와 비교하면서 자신이 학습한 내용들이 더 정교해지고, 결과적으로 필기한 내용의 세부사항들을 더 잘 기억하게 된다[1].
다른 부류는 자신은 필기를 하지 않고, 빌리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다. 처음부터 필기를 하지 않고 나중에 잘하는 사람 것을 빌리려는 불순한(?) 의도를 가졌든, 아니면 자신의 필기 실력이 형편 없음을 알고 포기했든,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든 스스로 필기를 하지 않았다는 결과는 동일하다. 과연 이 사람들도 앞 문단에서 살펴본 (필기를 스스로 한 후, 다른 사람 것을 빌려 비교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동일한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 즉 이 사람들에게도 사고의 확장, 수정, 보완, 기억력 증진이 나타날까?
아쉽게도 이런 일은 좀 처럼 벌어지지 않는다[2]. 왜냐고? 첫째, 필기는 주관적이다. 필기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맥락과 삶에서만 의미가 있지, 필기하지 않은 사람의 맥락과 삶에서는 의미가 없다. 필기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사전지식과 연합되고, 그 사람이 필기했던 그 순간의 상황과 연합이 될 때 의미가 있지, 필기하지 않은 사람의 사전지식과 상황과 연합될 때는 의미가 없다. 필기는 그것을 창작한 사람의 습관, 즉 그 사람이 글을 쓰는 스타일, 상징 기호를 쓰고 해석하는 방식, 문장을 읽으면서 호흡하는 방식과 연결될 때는 의미가 있지만, 필기 하지 않은 사람의 스타일, 해석, 호흡과 연결될 때는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필기는 그 필기의 창작자에게는 세부사항을 기억하게 만들어 주는 단서를 제공하지만, 타인의 필기를 빌려보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둘째, 우리 뇌는 내가 만든 기억의 단서는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인식하여 기억시키는데 필요한 주의력 자원을 투입하지만, 타인이 만든 기억의 단서에는 별 관심이 없다[3]. 우리 뇌는 내가 만든 것은 중요하게 여겨 기억하려고 하지만, 타인이 만든 단서들은 내가 만든 것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너무 당연하게도 타인이 필기한 것으로 공부하는 것은 기억의 효율이 떨어진다. 내 것으로 공부했다면, 10번 만에 세부사항을 기억했을 텐데, 20번, 30번을 봐야 세부사항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20번, 30번 볼 시간에 다른 것을 공부하거나, 조금 쉬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거나, 운동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다.
셋째, 우리 뇌는 목적을 가지고 노력한 것의 세부사항을 기억시켜 주기위해 일하지만,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동일한 일을 해주지 않는다[4]. 필기를 직접한 사람이 만든 필기라는 콘텐츠에는 목적이 담겨 있다. 다시 기억하려는 목적, 지식을 사용하려는 목적, 더 진보하려는 목적이 있다. 우리 뇌는 이렇게 염두에 두고 있는 목적이 있는 것들을 더 정확하게 기억하게 만들어준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필기에는 내 목적이 들어 있지 않다. 타인의 필기에는 타인의 목적이 들어 있지, 내 목적이 들어 있지 않다. 타인의 필기는 우리 뇌에게 생소한 존재다. 갑자기 나타나 기억하라고 강요하는 이상한 녀석이다. 그리고 우리 뇌는 이러한 갑작스러운 요구에 잘 응하지 않는다. 우리 뇌는 이미 목적이 있었던 것, 자발적 의지를 발휘해서 했던 것을 좋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거부한다.
한 마디만 더 하고, 마치겠다.
"필기는 빌려보는 거 아니다."
[1] Moscovitch, M., & Craik, F. I. (1976). Depth of processing, retrieval cues, and uniqueness of encoding as factors in recall.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15(4), 447-458.
[2] Mäntylä, T. (1986). Optimizing cue effectiveness: Recall of 500 and 600 incidentally learned words.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Learning, Memory, and Cognition, 12(1), 66-71.
[3] Mäntylä, T., & Nilsson, L. G. (1988). Cue distinctiveness and forgetting: Effectiveness of self-generated retrieval cues in delayed recall. Journal of Experimental Psychology: Learning, Memory, and Cognition, 14(3), 502-509.
[4] Mäntylä, T., & Sgaramella, T. (1997). Interrupting intentions: Zeigarnik-like effects in prospective memory. Psychological Research, 60(3), 192-199.